제목 [66호] [무위당학교 지상강좌] 동학의 생명사상과 실천적 삶 - 부산무위당학교
등록자 황진영 등록일자 201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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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의 생명사상과 실천적 삶
 
글. 김춘성 / 철학박사
 
 
* 지난 2018년 11월 23일에 열린 부산무위당학교 제3강 ‘해월사상과 실천적 삶’의 강의자료입니다.
 
1. 시작하며
 
자연생태계 파괴로 인한 지구사막화와 기후변화로 지구 환경이 점점 악화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환경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별반 달라지지 않고 있다. 환경문제를 기술이나 경제적 문제로 생각하여 과학이 더 발달하고 예산만 충분하면 이를 해결할 수 있다는 맹목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환경 문제는 우리가 자연을 바라보는 세계관의 문제이며, 우리가 어떤 삶의 가치와 방식을 선택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인간의 이기적 욕망을 앞세운 물질문명은 지속적으로 자연생태계를 파괴하고 생명을 죽여 온 것이 사실이다. 최근 ‘상생’과 ‘공존’ ‘공동체적 삶’을 모색하기 위한 새로운 세계관의 모색과 함께 생명이나 생명가치에 주목하여 지구상에 살아가는 모든 생명체들과 상통할 수 있는 영성과 생태적 삶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또 한편에서는 그동안 이성중심의 사고 속에서 신비주의로 비하해온 인간의 직관과 통찰을 새로운 눈으로 보기 시작했으며 동양의 종교사상과 전통에서 많은 영감과 지혜를 얻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다. 그렇다면 한국의 종교사상 속에는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생명위기를 극복하고 생태적 삶을 위한 세계정신사에 기여 할 수 있는 사상이 없을까?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19세기 중엽 지금까지의 인류문명이 낡고 병들었음을 선언하고 인류문명의 전환을 예고하였던 한국의 독창적인 종교사상인 동학에 주목하고자 한다.
나아가 동학을 온 몸으로 가르치고 실천해온 해월 최시형의 실천적 삶을 통해 동학의 세계관과 영성 그리고 실천적 삶이 새로운 미래에 어떤 단초를 제공할 수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2. 동학의 세계관 ‘시천주’
 
동학은 1860년 4월 5일 수운 최제우(1824~1864)의 득도와 결정적 종교체험을 통해 창도된 한국의 독창적인 종교사상이다. 수운은 오심즉여심 (吾心卽汝心)이라는 깊은 종교적 성찰 속에서 한울님 마음과 자신의 마음이 둘이 아닌 하나임을 깨달았다. 또 신령하고 무궁한 기운이 천지 만물을 이루어 놓고 간섭, 명령, 통일하고 있음을 자각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누구나 한울님을 모신 존엄하고 평등한 존재임을 천명하였으며, 나아가 만물 또한 한울님을 모시고 있는 신령한 존재임을 밝혔다. 그러므로 나를 떠나서 한울님을 찾거나 자신을 우상화 시키지 말고 오직 각자의 몸에 모셔져 있는 한울님만 믿으라고 가르쳤다.
수운은 ‘주문’을 직접 풀이 하면서 ‘시천주’의 의미를 자세히 설명하였는데 ‘시(侍)’는 ‘안으로는 신령한 마음이 있고, 밖으로는 기화작용이 있는 것을 온 세상 사람이 각각 깨달아 옮기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주’(主)라는 것은 이를 존칭해서 부모와 같이 섬기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시천주’는 안으로는 신령한 마음으로, 밖으로는 기화작용을 통하여 우주만물을 이루어 놓고 우주만물 속에서 끊임없이 간섭 명령 통일하는 지극한 기운이 있음을 밝힌 것이다.
시천주의 세계관에서 볼 때 한울과 사람과 만물은 유기적 관계로서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 근본에서는 하나이다. 더욱 만물과 자연이 단순히 물질에 불과한 대상이 아니라 무형한 한울님이 유형화된 것이다. 그러므로 ‘오심즉여심(吾心卽汝心)’이라는 인간의 주관적 체험과 우주 대자연의 질서를 모두 한울님의 조화작용으로 설명한다. ‘시천주’는 한울과 사람과 자연이 근본에서는 하나라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자연에 대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해준다. 자연은 더 이상 주변으로서의 ‘환경’이나 ‘자원’의 의미가 아니며 한울의 자기 현현으로서 한울의 몸인 것이다.
 
그러므로 동학의 개벽은 우주생명, 우주정신이 내 몸과 마음을 통하여 작용하고 있음을 온 몸과 마음으로 느끼며 이를 부모님처럼 ‘공경’하고 섬기며 사회적 공공성의 영역으로 확장해 나가는 것이다. 내 속에 있는 신령하고 무궁한 생명을 자각함으로써 진정한 주체를 형성하고 그런 주체들의 공경을 통한 ‘모심’으로 진정한 평등성을 확립하는 새로운 문명을 창조하는 것이다.
 
3. 시천주의 자각과 실천
 
수운의 뒤를 이은 해월(최시형 1827~1898)은 동학에 대한 지속적인 박해와 탄압 속에서 ‘우리의 일상생활이 모두 도 아닌 것이 없다’ ‘우리가 먹는 밥 한 그릇 속에 우주 만물의 이치가 모두 들어있다’ ‘사람이 바로 한울이니 사람 섬기기를 한울 같이하라’ 등등 어렵게만 느껴지던 道를 생활을 통하여 가르치고 실천하면서 동학이 추구하는 후천개벽의 새 세상을 열어갔다. 그러므로 동학은 해월에 의하여 민중들의 삶 속에 굳게 뿌리를 내리게 된다. 해월은 ‘天地父母’ ‘以天食天’ ‘三敬’등의 법설을 통해 이를 더욱 심화 시켜 온 우주가 하나의 신령한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끊임없이 상호 작용하고 있는 생명의 활동임을 밝혔다. 나아가 인간과 자연 만물을 유기적으로 파악함과 동시에 이를 공경의 차원으로 높였다.
사실 해월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랐다. 남의 집 머슴도 살았고 製紙所 직공생활도 하면서 가난을 면치 못하였기에 학문이나 지식을 별로 쌓지 못한 분이다. 또한 뛰어난 총명이 있거나 비상한 능력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수운선생의 제자 중에는 학식이 높은 사람들도 꽤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수운은 체포되기 수개월 전 동학의 도통을 성실하고 근면하며 독실하게 수도에 전념해온 해월에게 전수한다. 이후 동학의 2세교조가 된 해월은 72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36년 동안을 산간벽지로 보따리를 걸머지고 도망을 다녀야 했다. 그러나 가는 곳마다 새끼를 꼬고 멍석을 짜며 과일 나무를 심는 등 잠시도 일손을 놓지 않았다. 또한 가장 천대받던 며느리가 바로 한울님이며 사람이 하는 일이 바로 한울님의 창조적 행위임을 깨우쳐 주었다. 또 어린아이도 한울님을 모셨으니 아이를 때리는 것은 바로 한울님을 때리는 것이니 한울님이 싫어하시고 기운이 상한다고 하면서 일체 아이를 때리지 못하게 하였다.
해월에게 있어서 한울님은 초월적이고 추상적인 존재가 아니다. 직접 자신의 몸과 마음에서 느끼고 경험하는 한울님이다. 부모와 같이 봉양해야할 그리고 갓난아기 기르듯 잠시도 마음을 늦추지 않고 돌보아야 할 내 마음이며 사람이며 자연이다. 해월은 사람만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가 아니라 천지만물 또한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며, 심지어 무생물인 물건조차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는 것을 온전히 자각하여 생활 속에서 몸소 실천하였다.
 
“우주에 가득 찬 것은 도시 혼원한 한 기운이니 한 걸음도 감히 경솔히 걷지 못할 것이라. 내가 한가히 있을 때에 한 어린이가 나막신을 신고 빠르게 앞을 지나니, 그 소리 땅을 울리어 놀라서 일어나 가슴을 어루만지며 「그 어린이의 나막신 소리에 내 가슴이 아프더라」고 말했었노라 땅을 소중히 여기기를 어머님의 살같이 하라”
 
이는 결코 이성적 철학적 사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깊은 종교적 영성에서 우러나온 깨달음이며 체득인 것이다. 이로 인해 현실적 삶에서의 구체적 실천이 가능 했던 것이다. 땅을 어머니와 똑같이 대하라는 그의 말에서 우리는 이시대의 새로운 윤리의 핵심이 ‘공경’이라는 것을 확인한다.
해월은 추상적이고 두려운 의미의 하늘보다 구체적이며 포용성을 지닌 땅을 통하여 도를 말하기를 좋아했다. 또한 강하고 권위적인 카리스마를 가지고 민중을 교화한 것이 아니라 땅에게 가해지는 충격에 자신의 가슴이 아파하는 섬세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도 함부로 꺾지 말고 공경하며, 물건까지도 공경하는 마음으로 대하며 살 것을 당부한다. “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으니 이 이치를 알면 살생은 금치 아니해도 자연히 금해 진다”고 함으로써 구체적 사물을 통하여 동학의 가장 기본적 원리라고 할 수 있는 ‘시천주(侍天主)’를 가르쳤다.
 
4. 생태적 감수성과 생태적 삶
 
그는 특히 생태계에 대해 깊은 통찰을 보여준다. “천지는 곧 부모요 부모는 곧 천지니 천지부모는 일체니라. 부모의 포태가 곧 천지의 포태니 지금 사람들은 다만 부모포태의 이치만 알고 천지포태의 이치를 알지 못한다.” 또한 “젖이란 것은 사람의 몸에서 나는 곡식이요, 곡식이란 것은 천지의 젖이며 사람이 어렸을 때에 그 어머니 젖을 빠는 것은 곧 천지의 젖이요, 자라서 오곡을 먹는 것은 또한 천지의 젖이다”라고 하여 아이가 어머니의 젖으로 자라듯이 천지의 젖인 곡식에 의해 우리가 양육되고 있음을 밝혔다. 땅을 어머니와 꼭 같이 여긴 것이다.
그러므로 ‘ 침을 멀리 뱉고 코를 멀리 풀고 물을 멀리 뿌리는 것은 바로 천지부모님 얼굴에 뱉는 것이니 부디 조심 하옵소서’라고 당부한다. 이는 단순한 윤리적 덕목이 아니다. 외부로부터 강제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마음이 아파서 견디지 못하는 실존적 체득에서 나온 행위규범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야 몸에 있던 병도 없어질 뿐만 아니라 도를 속히 통한다고 당시의 민중을 교화하였던 것이다. 이같이 해월은 신과 인간, 인간과 자연, 신과 자연 등을 분리시켜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한울과 사람과 자연이 근본에서 하나라는 관점이다.
 
“우리 사람이 태어난 것은 한울님의 영기를 모시고 태어난 것이요, 우리 사람이 사는 것도 또한 한울님의 영기를 모시고 사는 것이니, 어찌 반드시 사람만이 홀로 한울님을 모셨다 이르리오. 천지 만물이 다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느니라. 저 새소리도 또한 시천주의 소리니라.” (중략) ‘만물이 낳고 나는 것은 이 마음과 이 기운을 받은 뒤에라야 그 생성을 얻나니, 우주만물이 모두 한 기운과 한 마음으로 꿰뚫어 졌느니라’
 
 
그러므로 侍天主 개념은 해월 선생에 와서 만물에 확대 적용되고 있다. 사람만이 한울님을 모신 존재가 아니라 천지만물 또한 한울님을 모신 존재이며, 심지어 무생물인 물건조차 한울님을 모신 존재라 했다. 그러므로 “만물이 시천주 아님이 없다”고 하였으며 ‘三敬’사상을 통하여 이를 더욱 구체적으로 설명하였다.
 
“사람은 첫째로 敬天을 하지 아니치 못할지니, 이것이 先師의 創明하신 道法이라.敬天의 原理를 모르는 사람은 眞理를 사랑할 줄 모르는 사람이니, 왜 그러냐하면 한울은 眞理의 衷을 잡은 것이므로 써이다. 그러나 敬天은 결단코 虛空을 向하여 上帝를 恭敬한다는 것이 아니요, 내 마음을 恭敬함이 곧 敬天의 道를 바르게 하는 길이니, (중략)
둘째는 敬人이니 敬天은 敬人의 行爲에 의지하여 事實로 그 效果가 나타나는 것이다. 敬天만 있고 敬人이 없으면 이는 農事의 理致는 알되 實地로 種子를 땅에 뿌리지 않는 行爲와 같으니, (중략) 사람을 버리고 한울만 恭敬하는 것은 물을 버리고 解渴을 求하는 자와 같으니라.
셌째는 敬物이니 사람은 사람을 恭敬함으로써 道德의 極致가 되지 못하고,나아가 物을 恭敬함에까지 이르러야 天地氣化의 德에 合一될 수 있나니라.”
 
생명의 실상은 이론이나 지식으로 파악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음상태가 이를 느낄 수 있을 때 비로소 드러나는 차원이며 경지이다. 그러므로 해월은 다만 한울만 공경하거나, 사람을 공경하는데 그칠 것이 아니라 물건을 공경(敬物)하는데 까지 이르러야 진정으로 바르게 道를 실천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공경한다는 것이 이성적 논리적으로 되는 것이 아님은 누구나 경험하고 있는 사실이다. 공경은 대립적인 구도가 아닌 상호의존적이며 서로 평등한 관계에서 비로소 성립된다.
이처럼 선생의 사상은 매우 독창적이다. 그의 사상은 학문이나 지식을 통하여 습득된 것이 아니라 내면적 직관과 통찰 그리고 생활을 통하여 몸으로 직접 체득한 것이다. 그의 가르침은 늘 생활 속에서 이루어진다. 어느 날 해월이 한가하게 있을 때 한 어린이가 나막신을 신고 그 앞을 급하게 지나갔는데 그 때 땅을 쿵쿵 울리며 지나가는 그 나막신 소리에 가슴의 통증을 느낀 해월은 ‘그 나막신 소리에 가슴이 아프더라’고 말한다. 자신의 몸과 땅이 결코 둘이 아닌 하나임을 직접 몸으로 느끼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땅은 바로 자신의 몸이었으며 어머니였다.
 이처럼 해월은 단순히 인식의 전환으로 그치지 않고, 생태적 삶이라는 새로운 문명, 다시개벽의 세상을 지향하고 있다. 그것은 선생께서 그토록 중시하는 마음공부를 통한 총체적 생활방식의 변화, 즉 생활의 성화이다.
모든 실천운동이 생명력을 지니려면 마음으로부터 공감이 되고 생활화될 때 가능하다. 환경운동, 생명운동은 진정으로 생명의 고귀함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어야 지속적인 실천이 가능하다. 생명은 이론적 지식적으로 학습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으로 체득되는 것이다.
따라서 동학은 제도나 정체(政體)의 변화를 통한 위로부터의 개혁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방식이나 태도를 하나하나 바꿔나감으로써 인간과 사회 우주자연의 총체적 변화를 이루는 밑으로부터의 개벽을 추구한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모든 서민들의 구체적 현실적인 삶의 실천을 중시한다. 그것은 우선 인식의 전환과 마음의 변화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은 바로 생활의 성화이며 총체적 생활양식의 변화를 의미한다.
 
5. 마치며
 
이성중심 물질중심의 문명을 극복하지 못하면 인류의 미래가 없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은 지금 우리는 지금 이성의 한계를 절실히 느끼고 있다.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만물과 만물, 나아가 온 우주가 하나의 기운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것이 우주 자연의 질서이며 또한 생명의 활동이다. 인류는 그 동안 이 우주의 질서와 생명의 가치를 소홀히 하여왔으며 당장 눈앞의 이익에 급급하여 개발과 발전이라는 이름으로 끊임없이 생명을 죽이면서 경쟁적으로 질서를 파괴시켜 왔다. 동학은 인간의 신령성을 회복하여 천지만물과 감응하고 소통하는 우주적 차원의 삶을 제시한다. 그 속에는 오늘날의 생태학적 사유가 내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생태적 삶의 전통이 살아있다. 우리는 뛰어난 영성으로 민중을 교화하며 민중들에게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어주었던 해월의 실천적 삶에서 인류가 추구해야 할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게 된다. 해월선생은 학식이 풍부한 것도 아니었고, 카리스마를 갖춘 지도자형도 아니었다. 다만 스승의 가르침을 자신의 삶 속에서 묵묵히 실천하였던 실천가였다. 그는 항상 온화하고 소박한 삶의 태도로써 제자들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을 공경하였고, 나아가 모든 생령들을 그렇게 대했다. 그의 생애를 통해서 보여준 동학적 삶의 실천은 언제나 밑바닥 민중의 편에 서 있었다. 그의 삶은 외형적 화려함과 편리함, 속도만을 추구하는 욕망의 구조에서 벗어나 내면의 신성을 발견하고 그것을 가꾸는 청빈하고 소박한 삶의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물질위주의 경쟁적인 삶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현대인들에게 이러한 삶은 거의 불가능 하게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늘날 한살림을 비롯한 생명운동을 하시는 분들에게서 이러한 삶의 모습을 찾아 볼 수가 있다. 비록 이런 분들은 소수에 불과하고 지금은 우리 사회를 주도할 힘이 아직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삶의 방향과 실천을 위해 지속적으로 이러한 논의와 노력은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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