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68호] 무위당학교 지상강좌 '무위당과 서화 - 서화 세계로 본 무위당의 삶과 사상'
등록자 교육담당 등록일자 20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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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과 서화
- 서화 세계로 본 무위당의 삶과 사상 -
 
곽진 상지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오늘 이 시점에서 왜 우리들은 다시 무위당 선생을 초대해야 할까요? 제 짐작으론 시대의 해묵은 과제와 새로 떠오른 난감한 물음을 풀어내기 위해 선생에게 그 해답을 구하자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선생의 어떠한 삶의 행적과 실천이 우리에게 그러한 기대를 갖게 만들었는지를 되새겨 볼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무위당 서예 작품을 보면서 선생님의 모습이 제 마음 속에서 마치 고무풍선처럼 커졌습니다. 인용한 서적이 상당히 폭이 넓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참 재미있는 분이면서도 주제가 잡히지 않았습니다.
 
서화와 다른 자료를 통해 살펴본 선생의 모습은 일견 끊임없는 자기 성찰을 거쳐 완성된 자아의 정립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를 기초로 분열된 사회를 화해시키고 정서적으로 통합, 통일시키면서 각 개인들과 사회 주체들에게 그 실천적 비전을 제시하는 일이었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그러한 과제의 해결 지점은 일차적으로 사적 욕망을 누르고 사회적 약자들의 삶을 살찌우며 자존적 삶을 살아가도록 도우는 것이었습니다. 즉 그들을 배고픔으로부터 해방시키려는 기름진 민생의 현실 구현이었습니다. 자본주의 거대 시스템에서 소외된 서민들에게 주체적이고 자생적 생활기반을 마련해주려는 기획입니다. 가능하면 협동과 단합으로 다 같이 잘사는 방식을 스스로 찾아가자는 정신이 바로 그것입니다.
 
선생은 이러한 생각과 주장을 서화로 때로는 몸으로 전파하고 설득해 갑니다. 젊은 시절 그를 사로잡았던 그 무엇에 대한 필자의 호기심은 여기였습니다. 그는 서화라는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자기 생각을 다듬고 그것을 사회로 확산해 가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때문에 그분의 서화는 일종의 저술적 성격을 갖습니다. 여느 전문 서예인들이 지향하는 작품 구상 동기와 목표가 매우 동떨어집니다. 선생은 서화에 정통한 이론을 겸비했지만 전업 서예가가 아닙니다. 그가 세상을 향해 말하고자했던 생각과 민생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붓끝으로 그려냈습니다. 작품들을 살펴보면 그는 평생 나와 너를 가르지 않고 어떻게 살 것인가를 사색할 것을 권유하면서, ‘자신은 어떻게 쓸 것인가? 무엇을 쓸 것인가’를 늘 깊이 고민하며 붓을 잡는 모습이 그림처럼 선명하게 떠오릅니다.
 
성찰과 학습으로 자아를 단련하면서 나와 나의 관계, 나와 너의 만남, 나와 세계와의 관계를 주목하고 나와 나의 관계가 미진하면 너와 나, 나와 세계와의 상호작용은 무너진다고 말한다. 이른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의 유가의 학습 과정을 다른 사상과 조정, 변용해 적용합니다. 그는 인간이 닿고자 하는 성취를 완결된 목표로 보지 않고 과정임을 강조했습니다. 삶의 기쁨은 그러한 과정에 동참하고 변화의 물결을 함께함으로 얻어진다고 믿고 만물이 변화해 갈 수 밖에 없는 이치에 따라 부단한 자아 단련을 요구합니다. 선생의 교육사업 참여가 이러한 생각의 현실적 실천이라고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좀 더 구체적인 질문을 던져볼까요?
 
 
서화에 비친 그의 모습은 일면 추상적이고 사변적이며 현학적인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그러나 선생이 전달하고 교양하려고한 의미들을 주목해보면 그것은 피상적 느낌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선생의 서화 읽기에서 주의해야할 지점입니다. 선생의 삶에서 드러난 현장성은 기본적으로 사변적이거나 관념적인 것과는 다소 거리를 둡니다. 고전 문구를 활용하는 의미망도 비교적 현실적이고 실용적 것들로 짜여있습니다. 무위당 서화의 특징이 아닐까싶습니다. 선생의 붓끝과 만나는 고전 문구들은 선생이 전달하고자 하는 생각과 만나 다른 얼굴로 세상에 나옵니다.
 
그리고 그의 민생에 대한 관심과 열정적인 교육사업은 그러한 사상적 모태에서 발현된 결과물들입니다. 선생에 대한 세상의 평가가 성공한 인물로 바라보기보다 존경받는 인물로 그려지는 까닭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나는 왜 사는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선생에게 그러한 인간의 근원적 물음에 대한 관념적이고 초월적인 답을 구한다면 조금 실망할지도 모릅니다. 서화에서 드러난 선생의 답은, 삶은 자기가 만들어가고 삶의 공간들은 그대들의 처지에 맞게 스스로 채워가야 한다는 걸로 대신합니다. 원용(援用)하는 글귀들은 어떤 특정 학맥이나 종파에 편향되지 않고 두루 사용한다. 유가, 노장, 양명학, 불교, 기독교, 동학 등 폭넓고 깊다. 특히 노자와 장자의 인용 문구들은 그가 평소에 기울인 노장학의 관심과 독서의 범위를 알려줍니다.
 
기존에 발간된 서화집이 8권, 파악되지 않은 개인 소장품은 그 숫자를 얼마인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합니다. 대단한 작품량입니다. 본 발표를 준비하면서 서화자료집 5-8책 4책을 일별하여 내용별로 나눠보았습니다.
 
1) 측은지심 (惻隱之心)
 
선생의 서화에서 나타나는 민생에 대한 연민과 고민은 작품 곳곳에서 나타납니다. 이는 오랜 사색과 내면을 성찰하여 각득(覺得)한 생각을 서화를 빌려 발현시킨 것입니다. 예견되는 민생의 어려움에 대한 줄기찬 연민과 우려를 <인(仁)>, 화민성속(化民成俗)의 문구로 표출하였습니다. 민초들과 함께하면서 그들이 마주한 문제들을 자신들의 문제로 수용해 해결하려 는 의지를 담은 문자입니다.
 
선생은 사회적 병리는 병이 위중해진 다음에 치료해서는 효과가 반감함으로 병이 들기 전에 사전에 치료해야 하는 것처럼, 민생문제의 진단과 치료는 자신을 낮추고 정성을 기우려 마음을 다스리는 이치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배고픈 문제를 우선 과제로 삼되 배 아픈 문제로 번지지 않게 하자는 겁니다. 선생의 삶에서 증오와 독선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선생은 거듭해 사람 사랑의 기본은 겸양과 겸손이며 참된 마음으로 분제를 바라볼 것을 강조했습니다. 그러한 마음이 무한한 사람 사랑 곧 측은지심의 실천입니다.
 
대인(大人)은 허세를 부리지 않고 이기거나 다투지 않는다.
시끄럽게 떠들며 이기고자 하는 것은 속 좁은 자의 허세다.
마음이 넓고 깊은 사람은 아는 체 않으며, 자기의 재주를 과시하지 않는다.
세상이 시끄러울 때일수록 평심(平心)을 지키면, 잃었던 것들을 되찾을 수 있다.
 
사물을 나를 낮추고 문제를 바라보면 오히려 참된 해결 방법을 얻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이를테면, 고요한 물은 깊이 흐르고, 깊은 물은 소리가 나지 않듯 <정수유심(靜水流深), 심수무성(深水無聲)> 고요함 속에 자아의 해방이 온다는 것이다. 자랑하지 않으며 살피는 사랑은 <인(仁)>, 마치 밭을 일구고 씨앗을 뿌린 후에 새싹이 돋아나기를 기다리는 농부의 기다림과 같습니다. 이 때문에 고인(古人)들은 사람 사랑은 지루한 기다림에서 성숙된다고 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말을 배우는 데는 2-3년이 걸리지만 고요한 침묵의 지혜를 배우기 위해서는 수십 년이 걸린다고 합니다. 최고의 경지에 오른 사람은 누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마음 쓰지 않고 또 자신을 알리려고 안달하지도 않습니다. 인간을 사랑하는 따듯한 마음이 그 사람을 데워주기 때문입니다. 선생의 서화집의 많은 작품들이 사람 사랑의 방식과 자신의 성찰, 침묵의 지혜로움을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증오와 미움의 에너지를 사랑으로 바꾸고 배고픔의 문제에 따르는 배아픔의 시샘을 넘어서기를 당부하는 선생의 정신이 빛을 발합니다.
 
2) 수시변혁 (隨時變革)
 
모든 것은 변하고 시간은 흘러간다. 사람다움의 자리는 공경과 겸손, 겸양과 사랑이 제자리라고 합니다. 이것을 변하는 원리 속에서 변할 수 없는 근본을 찾아 지키되 변해야 할 때에 변하지 못하면 자연의 이치를 거스른다는 경계의 글귀들입니다.
 
선생의 서화에서, 핵심적인 가르침은 변화하되 낮추고 자신을 비우며 낮은 것을 꺼려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변화하고 모두가 지나갑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들어 놓은 이 세상의 모든 차별도 변화하는 이치에서는 별다른 의미가 없습니다. 자기를 더 낮출 수 있는 사람이 세상을 품을 수 있고, 주어진 천성을 되찾아 성인에 다가설 수 있습니다. 선생이 자주 인용하는, ‘사람이 하늘이다’라는 글귀는 이러한 자아 완성의 경지를 설명한 문장입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물건치고 쓸모없는 것은 없습니다.
 
어느 식물학자의 말을 빌리면, 엄밀한 의미에서 자연에서 잡초란 없다고 합니다. 보리밭에 인삼이 나면 인삼이 잡초이고, 인삼 밭에 보리가 나면 보리가 잡초입니다. 변화의 원리에 따라 제 자리를 알아서 자리 잡느냐의 여부에 따라 잡초가 정해진다는 것입니다. 변혁의 논리는 기본 원리를 지키며 상황에 따라 변해가는 순리를 말합니다.
선생의 서화집에 인용된 문장들을 보면 변하지 말아야할 기본 도(道), 그 원리를 터득한 사람을 완성된 인격체로 보았습늬다. 꼭 있어야 할 곳에 있으면 스스로 귀해지고, 뻗어야 할 자리가 아닌데 다리를 뻗고 뭉개면 하찮은 잡초가 된다는 뜻입니다.
 
선생께서 이러한 변혁의 의미를 담은 글귀를 사람들에게 나눠주시는 속내는 타고난 우수한 자질을 제대로 가꾸지 못하고 어디서나 남을 앞서려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은 현실을 고치려는 것이 아닐까요. 천지의 변화를 채득하고 하늘이 주신 천성을 인삼밭에 난 밀처럼, 자리를 가리지 못해 뽑히어 버려지는 잡초처럼 방치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3) 생생지리 (生生之理)
 
이 세상 생명 가운데 귀하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 생명 탄생의 원리를 고전의 철학적 해석을 빌려오지 않더라도 조금만 마음을 기울이면 풀 한 포기 곤충 한 마리도 천지자연의 생성의 이치가 담겨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서화집에는 생명의 위대함과 그것의 고귀함에 눈을 뜨라는 글귀가 비유적으로 표현한 작품들이 상당합니다. 기실 생명에는 가치의 等差와 좋고 나쁨의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 선생께서 생명의 고귀함을 다양한 글귀로 반복 제시하는 의도는 사람들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러주려는 뜻이 담겨있습니다.
 
앞서 선생의 ‘나와 너, 나와 세상의 연결 속에서 너 없는 나는 무의미하다’는 말씀을 예거(例擧)한 바 있습니다. 내가 나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너 속에 비친 나를 아는 것이 먼저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 자신을 알고, 이해하며 훌륭한 관계를 맺으면서 더 나은 나를 만들어 가야 다른 생명의 고귀함도 제대로 보입니다. 선생은 여기서도 역시 겸손과 낮춤, 양보와 물러남의 수양을 통해야 그러한 경지에 올라설 수 있다는 말씀을 반복합니다. 인간들이 바라는 평등의 세계를 다른 생명들에게도 확산하려는 운동은 인간 자신을 위해서도 도달해야 할 중요한 과업입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인간의 사소한 실수가 인류는 물론 지구상의 생명체들을 순간에 파멸로 몰아넣는 위험한 시대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후쿠시마 원전 사고입니다. 선생의 이러한 생명의 절대적 가치를 사람들에게 각성시키고 동참시키려는 노력은 저술로, 서화에도 그대로 이어졌습니다. 여기에 이른바 환경 살리기 또는 되찾기 운동의 이념적 근거가 있습니다. 선생은 생명현상의 위대함을 자연의 생생(生生)하는 이치를 빌려 설명합니다. 생명의 자기 생성은 인간의 인위적인 간섭을 차단함으로서 본래의 모습을 회복합니다. ‘자연의 생성 이치에 맡겨라’는 노자의 글귀는 선생의 생각을 반증합니다. 인간의 자기 기준으로 자연을 재단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오리는 알은 껍질을 깨는 어미의 고통이 없다면, 살아갈 힘을 얻지 못한다고 합니다. 누군가 도와주면 그 오리는 몇 시간 못 가서 죽습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자연선택의 시련을 견뎌내야 활력 있는 생동감이 생깁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더욱 빛나듯 시련이 있어야 삶은 더욱 풍요로워진다는 글귀가 생생이치의 설명으로 등장합니다.
 
서화집에서 선생께서 전하려고 했던 그의 말씀들을 요약하며 그의 삶의 지향과 사상을 정리하는 것으로 강의를 마무리 할까합니다. 장일순 선생님 선생님은 어떻게 보면 신비가 없고 평범합니다. 아무 때나 만날 수 있었죠. 아마 돈을 빌려서 안 갚아도 아무소리 안 하셨을 겁니다. 이게 물과 같은 겁니다. 물은 바위를 만나면 돌아가며, 숲이 있으면 건너뜁니다. 선생님은 물이야기를 많이 하셨습니다. 낮아야 채워지고, 채운 것을 드러내야 새로운 것이 있습니다.
 
상선약수(上善若水)라는 말이 있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인생은 물처럼 사는 것이라는 뜻입니다. 선생은 격동의 시대의 무거운 과제를 품에 안고 풀어내면서 물처럼 부드럽지만 노도 같은 激情의 삶을 살다 간 분입니다. 그의 서체도 얼핏 물의 기세를 닮은 듯합니다. 그러나 그는 흐르는 강물처럼 남과 다투지 않는 삶을 살았고, 민생을 향한 사랑을 가슴 속에서 덜어낸 적이 없었지만 그 공(功)을 드러내거나 밖으로 자랑하지 않았습니다. 그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것은 늘 겸양과 겸손, 낮춤과 물러남, 비움과 자기 수양의 끊임없는 단련이었습니다.
 
흰 구름처럼 자유롭고, 흐르는 강물처럼 만나는 모든 것들에서 배우고, 세속의 시비와 선악을 뛰어넘어 만인과 담소하며 자기 삶을 개척하고 사람 사랑을 몸으로 실천했다. 오늘 우리는 그가 남긴 서화에서 생명의 위대함과 자연의 아름다움을 일깨워주는 얼굴을 다시 만나게 되었습니다.
 
글씨에는 인격이나 자신의 생각이 나타납니다. 후기에 오면서 선생님의 글씨가 물렁물렁하게 느껴졌습니다. 정자를 쓰면 그 사람이 기본이 되어 있는지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읽는 사람은 지루하고 갑갑해요. 그런데 정체로 해자를 쓰는데도 보면 볼수록 마음을 당기는 것이 무위당 선생님의 글씨입니다. 글씨가 물렁물렁하다는 것은 붓이 종이에 오래 머문 것이 아니라 힘을 뺐다는 겁니다. 어느 경지에 오른 수준입니다. 이 분의 서예는 사회에 대한 해석으로, 단순한 글씨는 아닙니다. 무위당사람들은 선생님이 남긴 글씨로 거기에 대한 이력 족보를 남겨야 합니다. 어려운 작업이지만 그래야 무위당의 사상적 기초와 범위가 짐작이 될 것입니다.
 
가장 어려운 사람이 가장 쉽게 보이는 사람입니다. 무위당의 특징은 물과 같습니다. 만인과 만나 대화하셨고 ‘비워라, 양보해라, 들어라, 낮춰라’를 실천하신 분입니다. 사람은 속이 커야 큰 인물이 됩니다. 무위당 선생님은 껍데기가 아니라 내용이 중요함을 강조하셨습니다. 그게 이분의 지향점입니다. 영의정, 총리 같은 사회적 지위보다는 네가 그 자리에서 뭐했는지 입증해야 합니다. 우리는 그렇게 사람을 봐야 합니다. 사회적 지위, 돈, 위치, 가문과 같은 차별과 구별이 없을 때 민생의 평등한 세계가 옵니다. 그게 바로 협동조합의 정신입니다.
 
선생의 생전 모습을 서화를 통해 살펴가면서, “다 지나간다. 모든 것은 변한다”는 변화의 이치를 중국 지식인들에게 실감나게 일깨워준 현대 중국 지식인들의 스승이요 사상가인 季羨林<지셴린>의 자취가 떠오릅니다. 한분은 몸으로 실천하고 서화로 세상과 만났다면 다른 한분은 교단에서 저서와 강연으로 세상과 대화했지만 두 분 삶의 그 처절한 진지함과 고난의 시대를 극복해나간 우뚝한 모습이 일정부분 겹쳐져서 그럴 것입니다.
 
선생에게서 노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됩니다. 어떤 생각과 어떤 방식으로 살아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순간이라면 사랑과 겸양 그리고 배려와 비움을 피할 까닭이 없지 않을까요? 앞서 우리가 던진 물음에, ‘삶은 아름답지만 외롭다. 함께해라. 참됨과 비움과 겸손이 이 이 세상을 차별 없게 바꿀 것이다.’라고 답하실 거 같습니다. 선생이 주신 답에 어울리는 시를 인용하면서 강의를 마칩니다.
 
 
나하나 꽃피어
풀밭이 달라지겠느냐
말하지 말아라
너도 꽃피고 나도 꽃피면
결국 풀밭이 꽃밭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
나하나 물들어
산이 달라지겠느냐고 말하지 말아라
나도 물들고 너도 물들면
결국은 온산이
활활 타오르는 것 아니겠느냐
 
-조동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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