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69호] 무위당학교 지상강좌 - 무위당과 환대의 사상
등록자 황진영 등록일자 20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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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학교 지상강좌
 
무위당과 환대의 사상
 
강의. 김종철 녹색평론 발행인
사진/정리. 편집위원회
 
 
 
30년 전에 제가 「녹색평론」이라는 잡지를 만들기 시작할 때, 30년 후에는 악화되거나 개선되는 징조가 보이거나, 둘 중의 하나의 상황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결과적으로 보면 부분적으로는 좋아진 점도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점점 상황이 악화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역시 기후문제거든요. 요새는 기후위기라고 합니다. 변화라는 말도 안 씁니다.
 
영국 신문 <가디언>이라는 데서는 작년부터 중립적이고 편안한 어감이라는 이유로 ‘기후변화’라는 말을 쓰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늘 동학과 해월 선생님 이야기도 해야 할 텐데 그 분들이 사셨던 120여 년 전 조선의 상황은 그야말로 위기였습니다. 지금 어쩌면 일상생활에서 당장 피부로 실감을 못할지는 모르지만 따지고 보면 그 때 이상으로 위기예요.
 
반식민지, 반제국주의 투쟁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수행하며 희망을 품고 동학운동, 독립운동도 하며 살아왔지 않습니까. 지금은 비약적인 변화를 꿈꾸는 운동이 아닙니다. 아무리 운동이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향후에는 지금보다 가난한 생활을 하게 돼요. 기후위기를 아무리 성공적으로 돌파한다고 하더라도 그 끝에 도달 가능한 삶은 지금보다 훨씬 수준이 낮아요. 어쨌든 인류 문명은 유지되는 거죠. 그런 상태가 최대한의 성공적인 미래입니다.
 
산업경제에서 생태경제로,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지속가능성이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지금 우리가 영위하고 있는 문명이라는 것이 지속가능한지를 생각해봅시다. 지속가능성이라는 게, 지금과 같은 생활을 생각하는 버릇이 생겼어요. 한살림 초기에 우리는 토론을 많이 했죠. 무위당 선생님도 지속가능한 문명이 아니라고 누구보다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지속 가능한 문명을 만들자. 인간다운 문명생활이 지속가능하느냐 마느냐를 우리가 생각해야합니다.
 
인간은 빙하시대에도 살아남았으니까. 다 죽지를 않아요. 일부 살아남겠죠. 인간이라는 종 자체가 소멸되겠습니까? 혹시 모르는 거죠.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아무도 모르는 거죠. 문제는 그 상황 속에서 인간다운 문명 생활이 가능한 지가 문제란 말입니다. 사람마다 정의가 다를 순 있겠습니다만 최소한 폭력으로 인간사회를 통제해 나가지 않고, 신의를 가지고 도리를 지키면서 예의바른 행동을 하며 서로 공경하고 자연을 아끼는 생활이 문명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석유 매장량이 문제가 아닙니다. ‘EROEI(energy returned on energy investment)’라는 말이 있습니다. 투자한 에너지만큼 수확하는 에너지가 얼만지 비율을 따지는 거예요. 1945년에 석유시대가 막 시작할 무렵에는 1을 투자하면 100으로 거뒀습니다. 2010년대 지금은 얼만 줄 아세요? 학자에 따라서 조사하는 사람에 따라 조금 다르긴 합디다. 어떤 사람은 1:10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어떤 사람은 1:3.5라고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석유시대가 끝나가고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생활이 전부 석유예요. 한국이 제일 심각합니다. 작년에 관세청에서 나온 우리나라 국가지표 통계를 보면 무역으로 먹고 사는 나라가 됐습니다. OECD 국가 중에 무역의존도가 가장 심하거든요. 우리나라 10대 수출, 수입품 모두 석유로 만듭니다. 우리나라가 산유국이 아님에도 몇 년 전까지 수출품 중 1위는 석유제품이었어요. 원유를 사들인 뒤 그걸 정유해서 휘발유, 경유, 등유 등으로 내보내는 거예요. 정유시설이 없는 나라도 많거든요. 정말 말도 안 되지 않습니까? 그런데 2018년도에는 1위가 바뀌었습니다. 반도체입니다. 2위가 석유제품입니다. 3위가 합성수지입니다. 합성수지도 석유제품이죠. 쭉 보면 자동차, 컴퓨터 등 전부 석유로 만들었습니다. 1위부터 10위까지. 우리나라의 경제활동이 석유와 직결돼 있습니다.
 
우리나라 경제학자들은 참 신통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이렇게 관심이 없지? 이런 이야기를 공개적으로 하는 경제학자들 보셨어요? 「녹색평론」에서 항상 이야기를 하죠. 주관적인 해석의 문제가 아니고 객관적인 사실이에요. 천년만년 까딱없이 석유가 계속 나온다? 그래도 문제예요. 그러면 또 석유가 떨어지면 기후위기는 걱정 안 해도 되겠네!’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어요. 어차피 석유가 떨어지면 가만히 있어도 이산화탄소가 배출되지 않을 테니까.
 
 
그런데 이건 시차가 있어요. 기후변화가 오면서 석유도 떨어지고 그러면서 경제가 완전히 무너져버려요. 아주 처참한 상황이 벌어질 수 있죠. 그러니까 석유가 가져다준 경제성장이 급속히 사라져가는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우리가 영위하는 산업경제를 어떤 식으로든지 생태경제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산업경제에서 생태경제로, 산업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 급격히 빠른 속도로 전환시켜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기후위기든 석유고갈이든 어느 쪽이든 간에 굉장히 비참한 상황이 벌어집니다.
 
근대문명은 결국 자본주의 문명이고 산업문명입니다. 그리고 다시 이야기하면 석유문명입니다. 그래서 생명사상이 100년 전보다 더 중요해졌다고 이야기 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사상이 뒷받침 되어야 합니다. 왜 그래야 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경제와 문명을 전환해야하는데 이유를 알아야 하잖아요. 저는 전근대라는 표현을 하지 않습니다. 비근대라고 합니다. 전근대라고 하면 뭔가 모자라고 덜 떨어지는 느낌이 듭니다. 우리가 극복하고 나아가야하는 그런 걸로 생각하기 쉬워서 저는 비근대라는 표현을 선호합니다. 산업문명 전을 비근대라고 지칭하는데 그 때도 사람이 살고 우수한 문화를 영위하면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비근대적인 모든 사람들이 다 나름대로 생명사상이 있습니다. 생명사상은 보편적이에요. 우리만 갖고 있는 특수한 게 아닙니다.
 
‘서양 문명이라는 게 약자에 대한 폭력의 역사’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완전히 아무것도 아닌 존재로 보던 영국군이 쳐들어와서 왕이 피신하고 그랬잖아요. 그 무렵에 엄복(嚴複)이라는 사람이 있어요. 저는 이 사람을 상당히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서양의 근대 문물을 받으려면 책을 번역해야 하잖아요. 영어도 익히고. 그래서 「국부론」이라든지 「종의 기원」이라든지 유럽의 근대를 뒷받침했던 중요한 사상서를 번역했습니다. 많이 했습니다. 우리는 간접적으로 이 무렵 중국과 일본에서 번역한 사상서를 많이 받아들였고 덕을 좀 봤어요. 근대니 현대니 하는 말 모두 이 사람들이 만든 거예요. 엄복이라는 사람이 거의 서양사상에 완전 심취해서 번역했어요.
 
그런데 한 10년 번역하고 나서는 서양 문명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나름대로 깨달았습니다. 완전히 돌아섰습니다. 그래서 서양문명처럼 야만인 문명이 없다고 말하기 시작해요. 이 사람이 완전히 복고주의자(復古主義者)가 돼요. 재밌죠. 처음에 서양의 본질을 몰랐을 때는 하루 빨리 우리가 모방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알면 알수록 서양문명이라는 게 약자에 대한 폭력의 역사라는 겁니다.
 
일본에는 다나카 쇼조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1900년 전후에 메이지 시대에 활동한 사람입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동학전쟁에 대해서도 알고 굉장히 칭송하는 발언도 했습니다. 동학이 굉장히 운명적인 사상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당시 유명한 구리광산이 있었어요. 근데 구리라는 것이 근대식 산업과 군수물자를 만드는데 필수잖아요. 이 동광에서 구리를 캐고 제련해야 하잖아요. 구리가 독성이 강한 물질입니다. 제련하는 과정에서 주변 논밭을 다 오염시키는 거예요. 짐승들이 죽어가고 있고. 농민들이 그렇게 당하고 있는걸 보다 못해서 반대운동에 나섭니다. 구리광산 폐쇄 운동을 시작합니다. 그 때가 청일전쟁, 러일전쟁 할 때 아닙니까. 광산을 닫을 수가 없죠.
 
다나카 쇼조가 이 운동을 하던 지역에서 출마해서 국회의원이 돼요. 그래서 국회에서 매일같이 떠들어요. 정부가 얼마나 성가시겠습니까. 그리고 천황한테 직접 직소를 올려요. 직소라는 것은 받아들여지는 경우에도 사형을 당하는 것이 일본의 전통입니다. 근데 나중에 천황이 특별히 사면을 해줍니다. 그래도 전부 해결은 못됐어요. 죽을 때까지 이 문제에 붙어서 투쟁했는데 투쟁 도중에 기록을 많이 남겼습니다. 일기, 편지, 청원서 등 일본사람들은 기록을 많이 하잖아요. 다나카 쇼조가 남긴 연구서들을 보면 산과 강을 파괴하지 않고 백성들의 삶을 파괴하지 않는 것이 진짜 문명이라고 말해요. 근데 지금 서양문명이라는 것은 조직적으로 백성의 삶을 파괴하는데, 이게 무슨 문명이냔 말이지.
 
표현이 굉장히 힘차요. 이 사람의 표현 중 하나를 제가 원자력에 관한 강연을 하면서 많이 인용을 합니다. ‘전기가 들어와서 세상이 캄캄해졌다’ 이런 역설이 어딨습니까. 얼마나 이 사람이 깊이 있게 생각했겠습니까. 산업문명이 세상에 들어오므로 해서 이 세상에 희망이 없어졌어요. 특히 백성들의 삶이. 현대로 넘어오기 위해 일부 겪어야 하는 희생이다, 이렇게들 이야기하는데 사실 그게 아니잖아요. 이게 근대문명의 본질인 거예요.
 
지금 호남 쪽으로 차를 타고 가다보면 쌀농사 짓는 거보다 전기생산하는 게 수입이 더 많답니다. 그래서 아까운 논밭들에 태양열 패널이 깔려있어요. 그거 보면 속이 상해 죽겠어요. 그런데 태양광 패널 문제없습니까? 그게 들어가는 금속들이 독성물질이라는 걸 아셔야 합니다. 다 중금속 처리고요, 그나마도 자원이 제한돼 있어서 얼마 안 있어서 그것도 고갈됩니다. 거기에 의존해야 해요? 대마도 같은 데는 풍력발전 많이 한다고 하는데, 해야겠죠. 그런데 거기에 의존해서는 안 됩니다. 그거 때문에 새들이 그 옆을 지나가다가 빨려 들어가거나 날개에 다쳐서 너무 많이 죽잖아요. 주변 주민들은 소음 때문에 살 수가 없어요. 다 문제가 있는 거예요. 문제는 어떻게 해야 해결됩니까? 전기를 안 쓰는 걸 생활화해야죠.
 
전기가 들어와서 캄캄해졌다는 게 얼마나 맞는 말입니까. 산업문명이라는 게 생활 속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우리가 이런 고민을 하지 않았을 것 아니에요. 어쨌든 들어온 거니까 할 수 없는 거고 맛을 아는 사람들은 벗어나기 힘들죠. 개인적으로 벗어나고 싶어도 사회 전체적으로 이 시스템에 갇혀 사니까. 여기서 떨어져 나온 순간 굶어야 해요. 이 생활이 앞으로 얼마 안가서 끝날 걸 알면서도 할 수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지금 가장 마음이 급한 것이 전통적인 농업을 부활시키는 거예요. 그렇게 해서 오천만이나 되는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전면적인 파멸은 피해야하지 않나 이거죠.
 
생명사상이라는 게요, 전근대(前近代)적인 사상이고 제가 쓰는 용어로는 비근대적(非近代) 사상입니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전근대라는 사회는 농경사회였잖아요. 탄소에 의존하는 문명이 아니었잖아요. 결국 핵심은 농경문명이에요. 농경문명이라는 게 결국은 사람들이 협력하고 상호부조하지 않으면 성립이 되지 않잖아요. 사소한 문제는 있을 수 있죠. 네 논에 물 많이 간다, 내 논에 물 많이 대야한다 싸우죠. 그런 트라우마는 인간세상에 얼마든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지금처럼 근본적으로 생존의 바탕 자체를 파괴하는 그런 건 없었단 말입니다.
 
 
 
생명사상의 핵심은 ‘환대’
 
오늘 제 강연의 제목이 ‘무위당과 환대의 사상’이잖아요. 생명사상을 저는 한 마디로 요약하면 환대의 사상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간에 무조건적으로 친절하게 대하는 걸 환대라고 합니다. 그런데 환대는 철저하게 비근대적 개념이에요. 근대 자본주의 이전에 모든 문명에 존재했던 민초들의 윤리예요. 엘리트의 윤리가 아니라. 어느 나라, 어느 지역이든 그렇습니다. 지금도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은 에스키모, 아마존의 부족입니다. 거기가면 아직도 환대해요.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와도 밥도 주고 재워주고 친절하게 대합니다.
 
우리 외가가 기와집이었어요. 대부분 초가집이었는데. 그 중에서 조금 넉넉했던 셈이죠. 어릴 때 기억으로 생면부지의 과객들이 가끔 드나들었어요. 제가 고향이 경남이거든요. 예를 들어서 진주에서 부산 가던 사람들이, 진주에서 터벅터벅 걸어가다가 오면 자야 하잖아요. 배도 고프고. 그럼 동네에서 좀 있어 보이는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럼 그 집에서 근사하게 상을 차려주고 재워줍니다. 정말 인심 좋은 집은 노잣돈까지 조금 보태서 보내줍니다. 이런 풍습이 사실 제가 어렸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 때가 어떤 시절입니까? 6·25 전쟁 직후예요. 그 당시만 해도 시골인심은 그랬어요. 그냥 오랜 세월 동안 부모에게 배운 방법이에요. 자식들에게 내려온 습관이에요. 그래서 식민지, 전쟁, 이런 험한 세월을 우리끼리, 동포끼리 살아남은 거예요. 지금과 같이 인심이 갈가리 찢긴 시대에 전쟁이라도 일어나면 우리는 다 몰살당합니다. 환대라는 게 생명사상의 핵심이라고 봅니다.
 
우리 무위당 선생님도 그 분을 기억하는 분들이 회상하기론 그럽니다. 만년에 주로 한살림 모임에서 얘기하신 내용 보면 결국은 환대예요. 사람과 생명에게 친절하게 대하면서 살자. 이 얘기예요. 결국 환대예요. 환대라는 건 나를 낮춰야 해요. 지가 잘난 사람은 남 환대 못합니다. 저기에 있는 ‘저파비(豬怕肥)’라는 글씨인데요. 저 앞에 인파출명(人怕出名)이잖아요. ‘사람은 이름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돼지는 살찌는 것을 두려워한다’ 이게 사실은 명문장가, 명사상가의 말이 아니거든요. 중국의 속담입니다. 민초의 지혜예요. 사실 문장 구성도 그렇잖아요. 돼지를 딱 갖다 대는 것 보십시오. 이건 그야말로 농사짓는 백성들의 감각으로 만들어진 속담이라는 걸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민초들이 고개 숙이고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무서운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인심도 그랬거든. 돼지가 살찌면 도살당하듯이 사람도 이름나면 반드시 남의 음해를 받고 공격을 받는 다는 얘기거든요. 세상의 인심을 직설적으로 얘기하고 있잖아요. 가식 없이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민초들입니다.
 
법보다 민중의 원초적 감정이 중요
 
‘민’이 갖고 있는 건 원초적인 감정이에요. 전근대 사회에서 법보다 중요한 게 뭡니까. 도리잖아요. 일전에 모 항공재벌 딸이 비행기 안에서 땅콩 때문에 횡포를 부려서 시끄러운 적이 있죠. 1심에서 아마 구속이 됐을 겁니다. 워낙 여론이 나빴잖아요. 민심이 악화됐었죠. 재벌의 횡포라고 해서. 법원에서도 그 압력을 분명히 느꼈어요. 그래서 유죄를 선고해야겠는데, 법령집을 아무리 뒤져봐도 항공안전법 밖에 없단 말이에요. 근데 항공안전법을 들여다보니까 어떤 구절이 있느냐하면 비행기가 항로를 바꾸면 벌에 처한다. 이런 게 있는 거예요.
 
그런데 이건 테러범이라든지 하이재킹 하는 사람들 생각해서 만든 법이거든요. 근데 비행장에서 막 나오다가 시비가 돼서 사무장을 내리게 하기 위해 비행기를 돌린 거 아닙니까. 이륙을 하기 전이었어요. 활주로로 가기도 전이었어요. 엄밀히 말하면 항공안전법에 저촉된 건 아니에요.
 
근데 이걸 가지고 비판하는 사람이 한국엔 아무도 없고 일본 교토대학에 한국철학을 공부한 학자가 있어요. 오구라 기조(小倉紀藏)라는 사람이 서울대에서 동양사를 전공했어요. 우리말도 잘해요. 한국사정을 잘 아는 사람이에요. 이 사람이 일본에서 나오는 한 잡지에 글을 썼어요. 뭐라고 썼느냐하면, 지금 한국은 법보다도 국민감정이 지배하는 나라다, 법보다도 도리, 윤리가 우수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서 살기 때문에 전근대사회라고 합니다. 은근히 깔보는 감정이 여기에 들어있어요.
 
틀린 얘기는 아니죠. 한국사회가 분명히 그런 사횝니다. 문제는 과연 법보다 감정이 지배하는 사회가 더 후진사회라든지, 그렇게 폄하되어야 하는가 말입니다. 저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저는 법보다도 민중의 원초적 감정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원초적 정의감이죠. 한국사회의 여론이 표출한 감정은 원초적 정의감입니다. 오랜 인류 역사에서 인간적인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서로에게 예를 갖추게 만든 건 법이 아니라 민중의 원초적인 정의감입니다. 이게 생명사상입니다. 이 원초적인 정의감이 바로 환대의 사상입니다. 피해 입은 사람, 굶주린 사람, 손을 잡아주고 밥을 먹여주는 게 원초적인 정의감이죠.
 
제가 좋아하는 소설이 하나 있어요. 카를로 레비라는 사람이 1930년대에 쓴 작품인데, 한참 이탈리아에서 무솔리니 파쇼당이 지배할 때입니다. 전쟁전야죠. 그 때 출판된 소설인데 「그리스도는 에볼리에서 멈췄다」는 제목의 소설입니다. 이 사람이 사회주의자였어요. 공산당 활동을 하다가 무솔리니 파쇼당의 공안경찰에 체포당해서 재판을 받고는 이탈리아에서 거의 오지에 유배를 당했습니다. 갈리아노라는 지명의 조그만 시골인데, 1년 동안 갇혀 지냈던 이야기를 회고해서 쓴 반 자전적인 소설형태를 띈 자서전이에요.
 
에볼리는 거기서 조금 떨어진 도시 이름인데, 농민들은 자기들이 워낙 문명의 혜택을 못 받고 살기 때문에 자조하게 되잖아요. 기독교 문명의 혜택도 못 받고 그리스도가 에볼리까지 왔다가 우리한테까지 안 오고 거기서 멈췄다, 스스로 자조하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힘겹게 중노동하면서 살고 자기네끼리 싸우면서 사는 사람인데, 근본적으로는 선량한 사람들입니다. 유배 온지 1년 만에 떠나는데, 작가를 이 사람들이 안 보내려고 울고 난리인거야. 줄거리를 다 말씀드릴 순 없고 작가가 이런 말을 합니다.
 
제가 하도 좋아서 노트에 적어가지고 다닙니다. ‘이곳 농부들은 환대라는 이름으로 생판 낯선 사람들에게 스스럼없이 문을 열어주고 이름도 묻지 않고 초라한 식탁이나마 늘 청한다. 날마다 경쟁하듯이 친절을 베풀고 지나가는 행인을 환대했는데 그 행인이 본모습을 숨기고 온 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었다’ 세계 각처에 퍼트려있는 환대라는 민중풍속, 가장 훌륭한 생명사상인 거 같아요.
 
농생 기반의 삶이 제대로 된 생명사상
 
제가 사상의 은사로 모시는 또 한 분이 이반 일리치라는 분입니다. 이 분이 환대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십니다. 어떤 신부가 20세기 초에 북경에서 로마까지 도보로 여행을 했다고 합니다. 그 때 환대의 풍속이 동양은 살아있는데, 서양 쪽으로 올수록 죽었다는 사실을 발견했답니다. 환대의 풍속이 가장 많이 살아있는 곳이 중앙아시아였다고 하는데요, 소위 말하는 서구문명에 가장 영향을 덜 받은 곳 일수록 너무나 친절하더란 거예요. 지나가는 나그네에게 너무 친절하게 환대를 하더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게 터키를 지나서 점점 서구권으로, 기독교 문명권으로 들어가면서 이 풍습은 없더란 거예요. 대신에 교회가 운영하는 자선원 같은 게 있었다고 합니다. 환대는 뭡니까. 비(非)시스템이죠. 환대는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발적으로 비시스템적인 방법으로 가난한 사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친절을 베푸는 거죠. 이런 환대가 서구에서는 언제 깨졌느냐, 이반 일리치는 서기 4세기부터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 때 기독교가 로마에서 국교가 됩니다. 기독교가 처음에 핍박을 많이 받았잖아요. 그 당시의 기독교는 시스템화 되지 않았죠. 완전히 개인의 자유의지에 의해서 돌아가는 믿음의 공동체였잖아요.
 
그래서 우리가 초기기독교, 원시기독교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원시기독교에서는 환대가 생생하게 살아 있었어요. 그 때는 기독교인들의 가정에 양초와 담요와 마른 빵이 구비되어있지 않은 집이 없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언제 어느 때 나그네가 지나가다가 여기서 재워주십쇼 먹여주십쇼 하고 나타날지 모른다는 겁니다. 나그네가 문을 두드리면 들여보내기 위해서 집집마다 등잔과 초가 필요하고. 나그네가 굶주렸을 테니 빵을 준비해뒀다가 식사 대신에 빨리 제공하고. 그 다음에 이 사람이 잠을 잘 때 담요가 있어야 하잖아요. 그래서 이 세 가지 요소는 초기 기독교 가정의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런데 4세기가 로마 국가가 기독교를 공인함으로써 여태까지 개인들이 자발적으로 필요한 환대의 풍속이 사라졌습니다. 왜? 교회가 자선원을 운영했습니다. 개인들의 환대의 풍속이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이반 일리치가 얼마나 영민한 사람이냐 하면 근대는 이때부터 시작됐다고 했습니다. 환대가 사라지는 것이 근대의 출발이다.
 
 
요즘은 전문가들이 재량권을 발휘할 수 있는 공간이 없어요. 전부 빈틈없는 시스템으로 돌아가요. 조금만 착오가 생기면 탄핵 당해요. 우리는 지금 기계의 부품으로 살아가고 있어요. 인간성을 표현할 공간이 없어요. 모든 게 시스템화 돼있고 관료화 돼있어요. 한나 아렌트라(Hannah Arendt)는 미국의 철학자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이라는 책을 썼습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의 관료잖아요. 이 사람은 아무 생각 없이 히틀러가 시키는 대로 유태인들을 절차에 따라서 학살했습니다. 나중에 전범재판에 이 사람이 붙들려 와서 자기는 아무 죄가 없다고 했습니다. 상관의 명령에 따라서 주어진 임무를 처리했을 뿐이고 완전히 기계적으로 했다 이거죠. 그래서 한나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써서 아이히만을 설명하면서 ‘악의 평범성 (Banality of evil)’이라는 표현을 썼단 말이에요.
 
그냥 절차에 따라서 일하다보니까 무시무시한 악을 저지르게 되는데, 그 악이라는 게 고의로 저지른 것도 아니고 너무 평범한 거예요. 지금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사람이 비의도적으로 절차에 따라서 일하다보면 결과가 누군가에게 악행을 범하는 결과가 되는 거예요. 이명박이 4대강을 파괴하는데 그 밑의 공무원들이 절차에 따라서 진행하다보니까 우리나라의 아까운 생태의 보고를 작살냈잖아요. 이런 식이에요.
 
가만히 생각해보면 우리 모두가 그렇습니다. 전부다 시스템이 시키는 대로 수용해서 사는 거예요. 자기가 판단해서 자의적으로 친절할 공간이 전혀 없죠. 그러니까 아렌트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우리 모두가 아이히만이다’ 그 말을 해서 유태인들에게 욕을 먹었어요. 우리가 질문 못하는 이유가 다 그런 것이죠. 자기 생각이 없죠. 결과적으로 그런 악행을 저지르는 것을 강요하는 게 시스템이란 말입니다. 이것이 근대의 본질이라고 이반 일리치라는 사람은 환대라는 용어를 가지고 그렇게 말했습니다.
 
결국은 우리가 아까 농경사회라는 말을 복구하는 게 제일 중요하다는 말을 앞에서 했는데 우리가 보다 인간적으로 살기 위해서도 결국은 분산돼서 소규모 공동체에서 농생을 기반으로 살아야하는 것이 제대로 된 생명사상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지 각자 심각하게 생각해봐야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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