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72호] 무위당학교 지상강좌
등록자 교육담당 등록일자 2020.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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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학교 지상강좌
 
숲에게 좋은 삶의 길을 묻다
 
강의. 김용규 자연스러운 삶 연구소 대표
정리. 편집위원회
 
저는 인문으로 숲을 하는 사람입니다. 나무의 얽힌 사연을 연구하는 것도 인문으로 숲을 하는 거지만 저는 다른 차원의 근원적 인문으로 숲을 봤습니다. 그래서 먼저 인문에 대해 살피며 인문으로 숲을 마주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보겠습니다.
숲은 우리에게 큰 스승입니다. 이 스승이 전하는 메시지를 마주하려면 눈이 열려야 합니다. 눈을 열지 못한 채로 만나면 숲이라는 어마어마한 창조적 세계에서 우리는 그것을 소비하다 끝나는 인생이 됩니다. 나무나 풀이 보여주고 있는 창조적인 삶의 모습들을 우리가 알 수 있으려면 나무나 풀이라는 존재가 도대체 어떤 존재인가 분명하게 살피고 들어가야 합니다.
 
숲을 마주하는 자세
#나이테 #무늬 #짐승성 #좋은 삶
 
 
 
나이테 사진입니다. 나이테는 나무가 그려내는 무늬가 오롯이 새겨지는 자리입니다. 저는 나무에 나이테 단면만 봐도 저 나무가 몇 살에 어떤 고난 속에 있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습니다. 나무가 그려내는 또 다른 무늬 중에 하나는 나이테 속살에 새겨지기도 하지만 그가 살아온 삶의 겉모양에도 새겨집니다.
 
고대에는 무늬 문이 글월문과 같이 쓰여서 인문은 원래 무늬 문자를 썼다고 합니다. 나무가 그려낸 무늬가 나이테라면 사람이 그려낸 무늬는 인문입니다. 나무가 살아온 삶의 오롯한 모습이 나이테의 깃들어 있다면, 한 인간이 살아온 무늬는 얼굴에 깃듭니다. 얼굴은 원래 얼에 골짜기라고 합니다. 우리 얼이 골짜기에 스며들어 그것이 얼굴이라는 말로 쓰이고 있습니다.
인류 전체가 그려온 무늬도 있습니다. 원래 인류는 짐승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짐승성이 있습니다. 성추행에 연루된 몇몇 정치인들을 보십시오. 이게 짐승성입니다. 인류의 원시조상은 네 발로 기었습니다. 학교에서 배울 땐 일어섰으니 호모 에렉투스, 도구를 사용했으니 호모 하빌리스. 이렇게 진화론적으로 설명합니다. 네 발로 기기 전에 인류는 뭐였을까요? “모든 생명은 나락 한 알 속의 우주가 있다.” 고 무위당 선생님이 말씀하셨듯이 사실 모든 생명 안에 우주가 응집되어 있습니다. 궁극적 근원으로 넘어가면 우리는 조상이 하나입니다. 하나의 단세포 생물에서 끝없이 창조되며 분화해 온 겁니다. 그러다가 몸체를 갖추기 시작하고 계통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사촌이 생겨나고 먼 친척들이 생겨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마스크를 쓰게 한 코로나바이러스는 사실 우리와 같은 뿌리이며, 한 생명이었습니다.
그럼 우리의 계통 속에 더 근원적인 생명은 원시포유류 그리고 그 근원엔 파충류가 있습니다. 무척추동물에서 척추동물로 나아갔습니다. 우리 안에 척추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끝에 뇌가 생겼습니다. 모든 생명은 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뇌가 생겨난 가장 끝에 짐승성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짐승에서 출발한 인류는 마침내 신에게 도전합니다. 유발 하라리는 이것을 호모 데우스(신)라고 표현했습니다. “호모 사피엔스를 지나 이제 우리는 호모 데우스가 되려한다.” 러시아에서는 과학자와 전 세계의 자본이 모여서 인간의 뇌를 상호 교환하는 실험을 기획하였다가 윤리적, 법적문제로 현재 멈춰져있습니다. 여러분과 저의 뇌를 바꾸면 어떻게 될까요? 과학은 놀라운 영역까지 발전하고 있습니다.
좋은 삶을 산다는 건 인간으로서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인간은 짐승일 수 있습니다. 평생 짐승의 차원을 살다가 끝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또 다른 차원은 부처가 될 수 있습니다. 또 예수가 될 수도 있고, 무위당 장일순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 가능성까지 펼치고 살다가 떠나는 것이냐 아니면 그저 파충류의 뇌에 사로잡힌 삶을 살다가 영문도 모른 채 다시 무덤 속으로 떠나는 것이냐. 태어나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없지만 나머지 가능성을 확장하는 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바스락 #가치 #생(生)극(剋)
 
 
내용에 동의가 되십니까? 왼편은 인류가 근대를 통과하며 지금까지 추구해왔던 가치가 이뤄낸 성취들입니다. 오른편은 그것에 따른 우리의 내면입니다. 왼편에서 말하는 가치를 요약하면 풍요, 편리, 속도, 안전, 위생입니다. 오른편에서 말하는 우리의 내면은 “바스락바스락 하고 있다”고 정의할 수 있습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의 삶은 더욱 바스락대고 있습니다. 지금까지가 참 괜찮았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코로나19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코로나19 이전에도 우리는 충분히 바스락대고 있었습니다. 정말 좋은 삶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우리가 추구해온 가치와 성취들 그리고 내면은 왜 이렇게 흘러가는 것일까.
제가 자연을 통해 통찰한 바에 의하면 신이라고 부릅니다. 동양에서는 이것을 천이라 명명했습니다. 하늘은 생명을 내리거나 우주를 창조할 때 놀라운 우주적 법칙을 주었다는 것을 숲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생(生)이요, 하나는 극(剋)이다. 살리는 궤도가 하나 있고, 죽이거나 괴롭히는 궤도가 하나 있습니다.
 
#냉이 #대상 #존재
 
숲을 제대로 마주하려면 눈을 열어야 합니다. 사람들에게 냉이하면 떠오르는 말을 물으면 대부분 냉이 된장국, 허브, 봄을 이야기합니다.
 
냉이 중에 황새냉이라고 하는 냉이입니다. 냉이는 주로 2월에서 3월쯤 캐러갑니다. 냉이를 캐러가는 계절의 밤은 춥습니다. 냉이한테 이렇게 물어보신 적 있으십니까? “냉이야. 너는 도대체 언제 싹을 틔운 것이냐, 왜 이 추위 속에서 삶을 시작하고 있는 것이냐.” 냉이는 가을에 싹을 틔웁니다. 냉이는 왜 따뜻한 봄날 싹을 틔어 삶을 시작하지 않고 얼어 죽을 수도 있는 겨울 전에 싹을 틔워 눈보라를 견딜 까요? 그건 관계 때문입니다. 생명의 세계를 살리고 죽이는 생과 극은 우주가 피조물에게 넣은 기본적 원리입니다. 나를 살리는 것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반드시 나를 괴롭게 하는 것들이 있습니다.
냉이는 늦으면 다른 풀들에 치어 광합성을 할 수가 없습니다. 냉이는 절박합니다. 그래서 다른 녀석들이 삶을 시작하기 전에 싹을 미리 틔워두었다가 추위 때문에 아직 발동하지 않은 다른 생명들보다 먼저 꽃피고 열매를 맺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 냉이를 마주하는 눈이 열렸다면 봄이며 된장국이 아니라 겨울의 시간 속에서 냉이가 감당했을 인내를 알게 됩니다. “서러웠겠구나 참으로 대견하다. 내 삶이 견디기 어려운 겨울 일 때 겨울을 견디는 너의 모습을 보며 내 삶을 추슬렀다. 고맙다 냉이야.” 여기까지 생명을 본 사람은 나만 서럽지 않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가 어른과 아이를 구분하는 기준은 간단합니다. “나만 아파.” 애입니다. “당신도 아프겠구나. 당신 얼마나 아팠니?” 어른입니다. 인간들은 이럽니다. 인간만 아프다고. 정말 어른들은 압니다. 풀도 아프고, 서럽겠다. 무위당 선생님 사상의 핵심은 “나만 아프지 않고, 모든 생명이 아프다.” 입니다. 오늘 제가 여러분에게 열어드리고 싶은 눈은 바로 그 지점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대상화했습니다. 냉이는 먹는 것입니다. 그 중에 특히 맛있는 부위는 겨울을 견뎌낸 뿌리입니다. “이건 보약이야.” 전부 대상화 한 겁니다. 대상이 된 모든 존재는 대체가능합니다. 제가 쓴 ‘숲에게 길을 묻다’ 의 서문에서 딱 한 문장으로 통찰을 담았습니다. “대상이 된 모든 존재는 쓸쓸하다.” 그러니 여러분이 나무나 풀을 만날 때 그들을 대상화하여 만나면 그 존재는 얼마나 쓸쓸하겠습니까? 대상의 반대말이 전 ″존재″라고 얘기합니다. 대상화하는 습관은 우리가 만물을 단면으로 만나는 데 익숙하기 때문입니다. 근대적 이성은 우리에게 끝없이 단면으로 세계를 분별하라고 가르칩니다. 단면이 무엇인지 한번 볼까요?
종이를 예로 들어보겠습니다. 종이는 원래 뭐였습니까? 모든 단면은 어마어마한 배경과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종이는 저 멀리 인도네시아 어딘가에서 마음껏 장대비를 맞으며 자신의 키와 몸을 넓혀갔을 것입니다. 그러다 어느 날 까닭도 알지 못한 채 날카로운 굉음소리와 톱날을 몸으로 맞고 쓰러져 넘실대는 파도를 타고 어느 항구로 끌려왔을 겁니다. 그리고 트레일러에 실려 제재소로 넘어가서 또 톱날을 맞고 부서져 제지공장으로 넘어가 표백제를 뒤집어쓰고 압착기를 통과해서 더 날카로운 칼날을 만나 잘려서 포장돼 트럭을 타고 여러분 앞에 왔을 겁니다. 이렇듯 종이하나가 엄청난 배경과 사연을 가지고 있습니다.
 
#삼위일체뇌 #기억 #불완전함
 
신경 생리학자 폴 맥린은 우리의 뇌가 파충류의 뇌, 포유류의 뇌, 인류의 뇌 이렇게 세 가지의 층위가 하나로 되어있는 ″삼위일체뇌″ 라고 주장하였습니다. 먼저 파충류의 뇌가 하는 행동이 네 가지 있답니다. 4F라고 하는데, 먹기 위한 행동으로 Feed. 먹기 위해 싸워야 하는 행동 Fight. 싸우다가 불리해지면 도망치는 행동 Flee. 마지막은 서양 사람들이 주먹을 쥐고 감아서 하는 행동 Fuck입니다. 교미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파충류의 뇌는 먹기 위해 싸우고, 불리해지면 도망치고 그러다 욕정을 토해내서 종을 이어나갑니다. 사실 이것이 생명을 살리는 원리입니다. 뜨거우면 뜨거운 것으로부터 얼른 손을 빼거나 몸을 빼서 도망쳐야 합니다. 이 뇌가 작동하지 않는다면 생존할 수 없습니다.
포유류의 뇌는 주로 감정을 다룹니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느낌. 파충류의 뇌가 자기 새끼까지 잡아먹는 것과는 대조적입니다. 포유류는 자기 새끼를 챙깁니다.
우리가 흔히 의학드라마에서 보는 뇌의 겉 부분은 바로 인류의 뇌입니다. 맨날 뱀만 잡아먹어야 되냐? 이게 반찬이냐? 이런 질문을 시작하며 삶 전체를 문제 삼는 사고(思考)를 다루는 것이 인류의 뇌입니다. 여기에 어떤 가능성이 있냐면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또 예수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맹자는 “내 아이만이 아니라 우물에 빠지려고 하는 다른 사람의 아이를 보면 인간은 그 아이를 구한다. 그러니 인간은 본래 선한 것” 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맹자의 뇌가 인간의 선한부분을 통찰해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주로 어디에 뇌를 쓰고 사는 것 같습니까?
공부를 잘하는 것이 좋은 삶일까요? 우리의 삶이 염전이라고 생각해봅시다. 볕 좋은 날에 구슬땀을 흘리며 염전을 쓸어냅니다. 그러면 마지막에 알갱이가 남는데 가끔 햇빛을 받아 반짝입니다. 얘를 소금이라 부릅니다. 우리 삶이 염전 같아서 우리의 삶도 다 쓸고 마지막 순간에 남는 소금 같은 결정체가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 것 같습니까? 이름? 여러분 증조할아버지 이름 아십니까? 이젠 족보도 안 만드는 시대입니다. 우리 삶의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바로 기억입니다. 치매를 앓더라도 기억은 남습니다.
기억에는 세 종류가 있습니다. 첫째, 덤덤한 기억입니다. 둘째, 아픈 기억이 있고, 셋째 아름다운 기억이 있습니다. 덤덤한 기억은 이런 겁니다. 여러분 고등학교 때 배운 수학공식 기억나십니까? 우리가 죽자 살자 외우고 해석한 기억들은 다 휘발하는 기억입니다. 소금 결정체처럼 남는 건 머리로 쌓는 기억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해 낸 것입니다. 논두렁과 밭. 여기 계신 분들이 어렸을 적 가지고 있는 기억입니다. 수학공식은 더 컸을 때 배운 것인데 여러분은 어렸을 적 경험한 논두렁과 밭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제 뭐가 남는지 아시겠습니까? 다 휘발합니다. 공부 소비하지 마십시오. 제가 늘 얘기합니다. 우리는 공부를 소비하는 수준에 머물러 살고 있다. 좋은 삶은 더 많은 걸 소비하는 데 있다고 생각하고 더 많은걸 소비하는 능력을 가질 때 삶이 좋아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생산하는 삶을 살 때 좋은 삶을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가 훌륭한 사람을 동경하려 하지 말고 훌륭한 사람이 되자는 얘기입니다. 그렇게 거창할 것도 없습니다. 머리로 뭘 자꾸 쌓는 삶이 아니라 몸으로 경험해낸 아름다운 삶의 기억을 쌓으시면 됩니다. 이것으로 내 삶은 스스로 좋았는지 나빴는지를 평가할 수 있습니다.
제 질문에 한번 대답해 보십시오. 여러분은 선한사람입니까? 악한 사람입니까? 반반입니까? 여러분은 도덕적인 분들입니까? 부도덕한 사람입니까? 도덕적입니까? 위험합니다. 여러 정치인들이 거기에 발 걸려 넘어졌습니다. 우리가 인정해야 할 것은 불완전함 입니다. 우린 참 불완전한 존재입니다. 참 나쁜 겁니다. 할머니들과 함께 산 삼십년의 세월을 무언가 하나로 부도덕함으로 몰고 가면 다 발 걸려서 넘어집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인정하십시오. 우리 다 부도덕하고, 불완전함이 있습니다. 그래서 반성하고 겸허해져야 합니다. 처음에 제가 우리 모두 짐승이라고 했지 않습니까. 우리가 짐승임에도 불구하고 인간인 까닭은 우리는 성찰하고 반성할 줄 알기 때문입니다.
 
#생태 #갯메꽃 #나눔
 
삶이 무엇일까. 왜 사는가. 왜 이렇게 사는가. 당신과 내게 신이 주신 숙제는 무엇일까. 이런 것들이 숲에서 풀어보고 싶은 이야기입니다. 생태(生態)라는 단어에서 태자는 꼴 태자입니다. 순 우리말로 풀면 사는 꼴이라는 뜻입니다. 사는 꼴은 누가 만듭니까? 제가요? 제가 재벌가에서 태어났으면 지금과는 인생이 달랐을 겁니다. 근대시대는 신이 아닌 내가 나를 책임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처럼 사는 까닭의 절반은 신의 책임입니다. 태어나는 건 우리가 선택하는 게 아닙니다. 풀도 마찬가지입니다. 태어나는 게 절반은 결정짓습니다. 그리고 이후 극복해야할 숙제를 다뤄가는 과정에서 내 꼴이 만들어집니다. 생태계라고 하는 건 그 꼴들의 집합입니다.
 
갯메꽃입니다. 딱 보기에도 척박해보입니다.(왼쪽사진) 갯메꽃에게는 극복해야할 숙제가 세 가지 있습니다. 첫째, 물이 없습니다. 둘째, 바닷가라 바람이 넘치고, 셋째, 염분이 넘칩니다. 갯메꽃이 이 세 가지를 어떻게 풀었나 보십시오.
이파리(오른쪽사진)를 한번 보십시오. 완벽한 깔때기 모양을 갖춘 이파리를 통해 이슬과 가랑비 같은 수분을 온통 모아서 뿌리로 흘려보냅니다. 이 뿌리에 부족한 물에 대한 숙제를 풀어낸 비밀이 있습니다. 갯메꽃은 뿌리가 통통합니다. 갈수기에 대비해 물을 저장하는 장치로 뿌리를 진화시킨 것입니다. 바람이 넘치는 것은 어떻게 풀었을까요? 앞에 돌을 이용하여 바람막이로 삼아냈습니다. 끝없이 나만 아파라고 얘기하는 아이의 마음은 우리에게 가해자를 찾도록 만듭니다. “이렇게 아픈 건 너라는 가해자 때문이야.” 꽃은요? 돌맹이가 가해자입니다. 그런데 자신을 핍박하는 저 돌 틈을 기어가며 오히려 바람막이로 삼아냅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마지막 숙제인 넘치는 염분 속에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왁스를 만들어 잎을 코팅합니다. 이렇게 하면 벌레가 왁스를 먹어봤자 소화가 안 됩니다. 갯메꽃은 이러한 과정을 통해 버려진 땅에서 자기의 삶을 당당히 꽃피우며 살아갑니다.
삶은 무엇일까요? 제가 숲을 보다가 내린 생명적 관점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생명은 본디 신이 불완전하게 만드셨습니다. 동시에 완전하게 만드시기도 하셔서 생명이 자신의 불완전함을 극복하고 자기에 이르는 과정이 삶입니다. 삶은 결국 자신을 극복하고 꽃피워나가는 과정입니다.
‘나무들은 제가끔 서있어도 숲인데, 너와 나는 왜 숲이 아닌가?’ 『저문 강에 삽을 씻고』 라는 시집으로 유명한 정희성 시인이 쓰신 ‘숲’ 이라고 하는 시의 한 문장 입니다. 시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너희들은 이념과 제도와 법률과 교도소와 징벌을 만들고도 어찌하여 숲을 이루지 못하느냐. 나무들이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각각 서있어도 그윽한 숲이 되는데 인간들아 너희들은 왜 그러냐고.
아무런 이념 없이 숲이 숲을 이루어낼 수 있는 것은 나눠서 쓸 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동네마다 있던 빵집을 대기업들이 몰아내고 차지했습니다. 동네마다 있던 시장도 마찬가지 입니다. 작은 것들에 삶을 시기하여 큰 것들이 먼저 피워보겠다고 합니다. 숲이 가지고 있는 놀라운 모습 중에 하나는 시간을 나눈다는 겁니다. 자신들이 이뤄낸 모든 성과를 사회적으로 환원합니다. 죽은 나무 단면 잘라보십시오.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미생물과 애벌레들이 삶을 기대어 살고 있는가. 자기를 파먹는 더러운 존재입니까? 아닙니다. 저 아이들을 키워내야 합니다. 자신의 죽음을 파먹는 저 아이들이 나중에 자기 자식이 피워낸 꽃을 결실로 바꿔내는 나비가 되고 나방이 되는 것입니다. 이 끝없는 되돌림과 순환의 과정이야 말로 숲이 저절로 푸르러지고 깊어지는 핵심적 비밀입니다. 이것을 인간이 차용한 방식이 협동조합이나 사회적 기업일 것입니다. 그 원조의 뿌리를 원주가 시작했다는 측면에서 저는 오늘 여러분 앞에 초대된 것이 큰 영광입니다.
 
숲을 마주하다
#등산 #소나무
 
 
 
제가 벤처기업 CEO 3년 차였을 때, 그냥 겉은 화려하고 속은 바스락바스락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그때 저를 위로한 유일한 시간이 등산이었습니다. 홀로 수락산을 걸으며 살고 싶은 삶이 다른데 있어서 이렇게 괴로운 거구나 라는 자각이 왔고, 자연스러운 삶을 살고 싶어졌습니다. 그러나 밥이 문제였습니다. 밥 때문에 살고 싶은 삶이 아니라 살아야 되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이젠 살고 싶은 삶의 길로 나가고 싶었는데 두려움에 꼼짝 못하던 어느 날. 수락산에서 굵은 소나무 한그루가 바위를 뚫고 자라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소나무는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바보야, 나는 바위를 뚫고 밥을 해결했어. 너는 뭐하는 거냐?” 그 순간 해머로 머리를 맞은 느낌이었었습니다. 나무가 어떻게 바위를 뚫었을까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그날부터 숲 자가 들어가는 모든 책을 서점에 가서 펼쳐놓고 순서대로 읽어나가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좋은 선생님을 만나 공부를 이어나가며 내린 결론은 나무는 우리처럼 욕망하는 존재이며 상처받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숲을 보는 눈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하면서 그때부터 나무가 하는 말이 들리는 듯 했습니다.
 
#광합성 #사유
 
신이 동물에게 내린 형벌은 누군가를 잡아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식물에겐 어떤 형벌을 주셨을까요? 산에 있는 표지판을 세우기 위한 목적으로 나무를 자르는 사람들을 보셨을 겁니다. 만일 여러분이 나무라고 생각하면 나무를 자르는 사람들이 자기 앞으로 걸어올 때부터 마음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그런데 나무는 단 한발자국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대신 신은 선물을 주었습니다. 바로 물과 이산화탄소 그리고 빛의 에너지를 버무려 만들어진 광합성입니다. 이걸 통해 식물은 스스로 밥을 만들 수 있습니다. 만약 인류가 스스로 밥을 만들 수 있다고 하면 지금처럼 다툼이 일어나겠습니까? 신은 인류에게 움직일 자유를 준 대신 누군가를 잡아먹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인간은 사유하기 때문에 신념을 갖게 됩니다. 도시가 무언가를 개발하고 발전하는 과정은 자연과 끝없이 충돌하는 문제입니다. 우리는 어떤 것이 더 중요한지 선택해야 합니다. 인류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도록 규정되어있는데, 그러면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삶을 지속하면서 어떻게 자연에 부담을 덜 주면서 살아갈지를 고민해야 합니다.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나무가 우리 때문에 받은 상처입니다. 자동차를 쓰는 것, 일회용을 쓰는 것 등을 통해 나뭇가지 하나 자르는 것보다 더한 폭력을 나무에게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걸 각성하여 대상이 아닌 존재로서 나무를 보며 어떻게 하면 더불어 살까 고민해야 합니다.
 
#캘러스(callus)
 
 
 
(나뭇가지가 잘려진 나무를 가리키며) 누군가가 꺾인 흔적이 보이는 나무입니다. 우리가 살다보면 꺾이는 날이 생기면 아프고 힘들 듯 나무도 똑같습니다. 대신 나무에겐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물질이 있습니다.
 
캘러스(callus)라는 것인데 그 자리가 잘려나갔다면 나무는 스스로 치유할 수 있습니다. 아쉽게도 보시는 나무는 캘러스(callus)가 없는 자리가 잘린 탓에 벌써 썩기 시작했습니다. 줄기가 썩고 그 아래 부위까지 모두 썩게 되면 결국 나무는 고난 속에 살다가 죽음을 맞습니다.
치유물질이 있는 위치는 나무에 주름이 잡힌 자리입니다. V형태로 되어있는 나뭇가지에 위아래가 만나는 꼭짓점이 치유물질이 집중되어 있는 자리인데 톱으로 자르기는 어려운 자리입니다. 나무의 회복탄력성이 바로 이 자리에 있습니다. 길에 나무를 심어서 길을 만들려면 많은 돈과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나무가 스스로 상처를 치유하고 오래 살 수 있도록 돕는 것입니다. 나무의 치유물질을 모르고 아무 부위나 자른다면 가지 뿐 아니라 줄기까지 썩어버립니다.
어떤 존재의 아픔을 매만져주십시오. 그것은 숭고한 일입니다. 나무도 상처받고 삽니다. 그리고 스스로 치유하려고 애쓰고 분투하며 삽니다. 여러분이 오늘 이야기를 듣고 나무에게도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눈을 열었으면 좋겠습니다.
 
#스승님 #목련 #상처치유
 
사람들은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깨달아야 할께 여러 가지라고 생각하는데 저는 딱 하나만 제대로 깨달으면 삶은 좋아진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좋은 삶을 살기 위해 단 하나를 깨달아야 한다면 뭐일 것 같습니까?
제 삶의 스승이 계십니다. 전 재산을 처분해 숲을 장만하고 숲 학교를 지어 생명의 사상과 이야기를 많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 때 고민과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때 스승님께 여쭤봤습니다. “선생님도 두려운 날이 있으십니까?” “용규야 날마다 두렵다. 희망에 깨어 두려움과 함께 잠든다.” 그게 답이었습니다. 스승님은 20여권의 책을 내신 요즘 말로 샐럽이셨습니다. 그런 분도 날마다 두렵다고 하시니 제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전기도 안 들어오는 땅에 전기를 끌어와서 집을 지었습니다. 어느 날 스승님께서 책을 쓰면 인생이 바뀐다고 조언하셔서 그곳에서 책을 썼는데 책을 써도 인생은 안 바뀌었고 아내는 저보고 생활비를 보내라고 독촉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다시 스승님께 문자를 보냈습니다. 스승님이 쓰신 글 중에 ‘너도 한번은 꽃피리라’ 라는 제목이 있었는데 제가 이런 질문을 하였습니다. “선생님 제 꽃도 언젠가 필까요?” 하루 뒤에 온 답장은 이랬습니다. “집으로 오르는 길에 남의 집 담벼락을 넘어 온 목련 가지 끝을 보았다. 가지 끝에 목련 꽃망울이 있더구나. 털가죽 안에 목련 제꽃 있겠지” 목련은 꽃망울에 꽃이 접혀 있다가 때가 되면 핍니다. 그 글을 보고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그래 아직 내 때가 아니구나. 언젠가 내가 살고 싶은 삶으로 세상에 꽃을 피우는 날이 목련처럼 있겠지.”
2012년. 한 방송사에서 생방송 특강을 하고 난 뒤 몇 년간 정신이 없을 정도로 바빠졌습니다. 그 무렵 스승님께서 제가 만든 숲에 오셔서 2박 3일을 계셨습니다. 같이 있는 와중에도 끊임없이 오는 섭외전화를 보시더니 “너 너무 바빠서 안 되겠다. 목련 꽃 필 때 한번보자” 그러곤 가셨습니다.
스승님께선 항상 홈페이지에 글을 남기셨는데 어느 날 딱 다섯줄이 올라와있었습니다. “아프다. 너무 아프다. 너무 아파서 한 줄의 글을 쓸 수가 없구나. 아픈 것 보다 더 아픈 것이 있었다. 글 한줄 쓸 수 없다는 것.” 너무 놀라 문자를 보내니 스승님께서 한 달 뒤면 괜찮을 것이라며 숲에 꽃 피우면 목련꽃 그늘 아래서 술 한잔하자고 답장하셨습니다.
그러나 얼마 뒤 제가 받은 문자는 선생님이 위독하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때서야 찾아뵈니 스승님은 너무 초췌하고 야위어 계셨습니다. “용규야. 목련꽃 그늘 아래서 술 한 잔 참 좋겠구나. 좋은 술로 준비해둬라” 그리고 며칠 뒤 스승님은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께 받은 마지막 가르침은 삶이 어느 날 뚝하고 멈출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당신께서 저하고 함께 보고 싶어 했던 목련 꽃을 선생님은 끝내 못 보셨습니다. 저는 이 사실을 알고부터 가짜인생을 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년에 목련을 못 볼 수도 있다는 생각을 늘 하며 오늘 먹은 점심이 마지막 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오늘 마주하는 내 아이의 얼굴이 마지막 얼굴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삽니다.
그러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군가 제 손을 잡았을 때 “더워 이 사람아” 하면서 뿌리치겠습니까? 아니면 “당신 손 거치네. 어쩌다 이렇게 됐어?” 라고 따뜻하게 묻겠습니까? 하루하루 내가 보고 듣고 있는 소리와 풍경과 사람이 마지막일 수 있다는 마음으로 사셔야합니다. 그래야 진짜로 살 수 있습니다. 앞에서 말한 살면서 깨달아야 할 한 가지는 바로 “우리가 보고 있는 이 풍경이 마지막일 수 있다. 이 마음으로 사는 것” 입니다. 산 정상까지 오르는 것보다 한발씩 디디며 땅과 발이 만나는 감각을 느끼는 것. 목표 중심이 아닌 내가 살고 있는 과정의 삶을 기쁘게 보내는 것. 상처는 이렇게 치유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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