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75호] 무위당학교 지상강좌 '미얀마 민주화와 한국 시민사회의역할'
등록자 관리자 등록일자 2021.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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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학교 지상강좌
 
미얀마 민주화와 한국 시민사회의 역할
 
강의. 김형종 연세대학교 국제관계학과 교수
정리. 고승민 편집위원
 
 
미얀마 상황의 심각성과 의의는 단순히 미얀마 국내문제를 넘어 국제적 차원에서 생각해봐야 할 과제입니다. 현재 한국사회는 미얀마 상황에 대해 큰 관심과 지지를 보내고 있고, 그 부분에 대해 한국에서 미얀마 유학생들도 감사해하고 있습니다. 뉴스를 보며 우리 역사를 돌이켜봤을 때 남의 일 같지 않아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들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코로나 시국과 통제 등으로 인해 많은 관심에 비해 무기력함도 많이 느끼는데, 미얀마 분들에게 이야기를 들어보면 관심을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이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고민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 의미가 있지 않을까 하여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미얀마의 개황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국민국가의 개념은 한 민족이 하나의 국가를 형성하는 것인데, 미얀마 사회는 좀 다릅니다. 미얀마는 지리·역사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 복합사회 또는 다중적사회로 쉽게 얘기하면 오랜 전통과 정체성을 가진 다수의 소수민족이 정치적 권리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독립 이후 하나의 정체성을 가진 국가 형성이 가장 중요한 지향점이 되었지만 정치적 굴곡을 겪으면서 여러 비극적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래서 다수의 버마족과 소수민족들이 정치과정에서 대결적 양상을 띄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군부가 자리 잡았습니다. 군부는 다수 버마족의 명분을 구실로 독재유지를 위해 소수민족을 탄압하였습니다. 그런 역사적배경이 현재 미얀마 사태를 야기한 구조적 문제입니다. 앞으로 궁극적으로 군부가 양민에 대한 학살을 멈추고 정기적인 일을 도모하는 데 있어서 그런 구조적 제한요건을 어떻게 변화 시킬 것인가가 또 다른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2월 1일 쿠데타 이후 백일이 지났습니다. 현재 언론보도에 따르면 8백 명 정도로 추산되는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정확히 수를 헤아리기 어려운 사람들이 실종 혹은 구금되는 등 고초를 겪고 있습니다.
미얀마는 인도,중국,라오스, 태국 등과 접해있고, 지리적으로 서부 남부 중부 북부로 나눕니다.
 
 
여기 1번 지역이 농경에 적합하여 살기가 좋은데 이곳을 버마족이 다스리고 있습니다. 나머지 지역은 소수민족의 분포가 큽니다. 인도와 인접해있는 서부지역은 높은 산맥이 있어 미얀마 왕조가 확장되는 과정에서 편입되었습니다.
미얀마는 버마족을 중심으로 한 왕조들이 중심을 이뤘습니다. 다만 여러 왕조가 영토를 넓혔지만 실제 중앙집권적 행정력이 미치는 국가구성은 최근에야 이뤄졌습니다. 특히 고산지대나 아래 지방에 사는 사람들은 역사적 인식과 정체성이 다릅니다. 왕조가 바뀌더라도 그들만의 전통과 정체성을 유지하였기에 하나의 중앙국가가 만들어진 것은 독립 이후에나 가능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소수민족은 독립 과정에서 여러 요구들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독립 이후 사실상 대부분의 기간을 군부가 통치하면서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이 있었습니다. 특히 언론에 많이 알려진 로힝야족 탄압 같은 경우 거의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삶의 터전을 떠나는 상황을 맞았고 극단적 학살,방화 등 다양한 국가폭력이 자행되었습니다. 그래서 미얀마의 갈등문제는 그동안 국제사회의 큰 과제였고 책임을 묻는 이슈였습니다.
 
미얀마의 역사Ⅰ_왕조시대
 
11세기 무렵에 버마족이 중심의 버강왕조가 건국되었습니다. 미얀마 최초의 통일왕조로서 이 시기에 현재 미얀마의 근간을 이루는 불교문화가 유입되었습니다. 불교를 국가의 이데올로기로 삼을 목적으로 전 지역에 불교를 확대 보급하였습니다. 1287년에 몽골의 침입으로 멸망한 후 군소왕조들이 만들어지다가 다시 버마족이 결집하여 따웅우왕조(1486~1752)를 건국하였습니다. 따웅우왕조는 영토 확장을 추구하여 다양한 소수민족들을 편입시켰고 그 결과 현재 미얀마 영토의 기틀이 형성되었습니다.
식민지 이전에 있던 꽁바웅왕조(1752~1885)도 영토 확장을 추구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당시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에게 침략의 빌미를 제공하였습니다. 영국과 세 차례의 전쟁을 하다 패배하고 결국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여 1937년까지 인도의 한 주로 편입이 되는 치욕을 당했습니다.
 
미얀마의 역사Ⅱ_식민지시기와 독립
 
식민지시기 자원 수탈 및 지배의 편리성을 추구한 영국의 목적으로 인도인이 대거 유입되어 복합사회를 형성합니다. 독립 이후 식민 잔재를 청소한다는 구실로 인도인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축출하는 과정을 겪기도 합니다. 영국의 식민통치는 일반적으로 분리지배였습니다. 단결하여 대항하지 못하도록 각기 다른 영역 및 사회적 지위를 부여하였고 이 과정에서 소수민족이 등용되었습니다. 그들이 다수 버마족을 통치했다고 보긴 어렵지만 인구 구성비로 봤을 때 소수민족들의 영향력이 컸던 건 사실입니다.
다수 버마족들은 소수민족에 대한 일종의 피해의식과 증오감을 갖게 되었습니다. 또 인도인의 대거 유입 등으로 이뤄진 경제수탈과 그들의 경제적 기반확대로 인해 여러 민란이 발생하였습니다.
왕조가 무너지고 불교에 대한 탄압도 이뤄졌습니다. 미얀마에서 불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닙니다. 근대교육이 자리 잡기 전 교육기관 역할을 수행했고, 마을 공동체에서 필요한 공공서비스 등이 불교사원을 통해서 이뤄졌습니다. 불교에 대한 재정적 지원 중단 및 축소는 단순히 종교적 의미 뿐 아니라 다수 버마족의 생활에 있어서도 부정적 영향이 컸습니다.
식민지정책에 대한 반감으로 독립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이때 그들을 하나로 묶은 것은 불교였고 불교단체들이 결성되어 민족주의 운동을 주도하였습니다. 또 하나의 세력은 학생입니다. 랑군대학교 학생들은 미얀마 현대사에서 굉장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이들은 아웅산 수치 여사의 아버지인 아웅산을 중심으로 30인 동지회라는 조직을 꾸리고 무장투쟁을 전개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 지원을 받았습니다. 일본에 대동아 공영권은 우리에게는 가혹한 식민통치였지만 2차 대전 때 일본이 동남아로 진출하면서 초기엔 유럽의 지배를 받고 있는 민족들을 포섭하여 대동아 공영권을 홍보하고 지원을 하게 됩니다. 하지만 일본 지배의 본질을 알게 된 아웅산이 영국과 협력하여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을 결성합니다. 그리고 마침내 미얀마는 독립을 쟁취하였습니다. 무장투쟁을 전개하였고 그 주축들이 독립의 주체가 된 것은 미얀마 군부가 오랫동안 정당성과 명분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일본 패망 후 영국과 회담을 하면서 반파시스트인민자유연맹(AFPFL)이 미얀마를 대표하는 단체가 되어 그 대표로 아웅산이 선출됩니다. 이들은 합의 과정에서 소수민족의 자치주를 인정하는 연방 안을 채택하여 소수민족들의 합의를 이끌어냈습니다. 그래서 미얀마는 연방국가가 되었습니다. 실제 역사적으로 형성된 소수민족들의 다양성을 정치적으로 포용하기 위한 타협점으로 연방제가 형성되었고 이것을 어떻게 실현시키느냐가 독립 이후 지금까지 가장 핵심적인 문제입니다.
 
미얀마의 역사Ⅱ_독립 이후
 
독립직전 이뤄진 총선에서 AFPFL이 압승하였습니다. 연방제로 선거를 치루고 그 결과를 바탕으로 독립을 하였는데, 이때 아웅산 장군이 피살당합니다. 그리고 1948년 미얀마는 연방으로 독립하였습니다.
아웅산의 동지였던 우누가 정치적 책임을 맡았습니다. 우누정권은 식민지배 과정에서 형성된 경제문제, 통합문제 등 다양한 문제가 발생하였고, 여기에 독립형성과정에서 모인 다양한 분파들의 내분까지 일어났습니다. 혼란을 겪었고 이틈에 네윈이 이끄는 군부를 중심으로 한 과도정부가 형성됩니다. 이들은 새로운 질서를 만들고자 1년의 과도기를 거쳐 민간이양을 하겠다고 하였고 다음해 이뤄진 총선에서 우누가 이끄는 세력이 다시 정권을 잡았으나 소수민족 자치주 설치, 연방제 문제로 인하여 군부와 갈등을 빚어 결국 1962년 네윈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였습니다. 이때부터 2015년부터 올해 2월까지의 짧은 민정을 제외하곤 실질적으로 군부가 집권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얀마의 역사Ⅲ_군부독재와 저항
 
네윈 집권 후 미얀마는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수립하면서 버마사회주의계획당(BSPP)를 만들고 나머지 정당을 해산시키며 독재체제를 구축했습니다. 이때부터 미얀마의 민주화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쿠데타가 일어난 그해 학생시위가 일어나자 진압군은 발포하였고, 다음 해시위가 재발하자 양곤대학 등을 폐쇄시켰습니다. 지금까지도 미얀마 대학들은 정치학과 및 정치학 강의들이 개설되지 않고 있습니다.
이 당시 미얀마는 버마식 사회주의를 내걸며 정부가 생산통제를 하고 국유화 정책들을 실행하게 됩니다. 효율성이 떨어지는 문제로 효과를 보지 못했고 이 과정에서 군부는 정치권력 뿐 아니라 사회 전 분야에 걸쳐 주도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국유화 된 여러 경제적 기반이 군부로 넘어가면서 우리로 말하면 군부가 재벌까지 소유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1974년 광범위한 시위로 계엄령이 있었는데 이 시기를 기점으로 군부통치가 약간 변화하였습니다. 퇴역을 한 군인들이 권력을 쥐는 방식으로 이것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군인들이 군인으로서의 권력 뿐 아니라 퇴역 후에도 정부에서 자리를 잡았습니다. 이러한 군부통치 안에서 우누정권에서 추진한 연방제 지향정책 같은 것들이 잘 이루어지지 못했습니다. 오직 버마중심주의와 소수민족에 대한 탄압이 이뤄지다보니 그 안에서 소수민족들의 저항은 격렬해졌습니다. 지리적으로도 고립되어있는 이들은 각종 혜택에서 제외되고, 착취를 당하면서 저항의식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군부세력이 등장하게 됩니다. 1988년 8월 8일에 일명 88항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 항쟁은 군부독재 종식을 요구하는 시위로서 학생과 승려가 중심이 되었습니다. 당시 우리가 알고 있는 아웅산 수치 여사가 어머님이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영국에서 귀국한 후 시위에 상징적 구심점으로 부상하였습니다.
 
88항쟁 당시 수천 명이 죽었습니다. 이러한 희생으로 사람들은 군부통치의 완화를 기대하였고, 국제사회의 압박도 심해졌습니다. 그런데 이때 소마웅이라는 사람이 친위쿠데타를 일으켰습니다. 그는 국가법질서회복위원회를 만들고 정신적 민주화를 명분으로 내세우며 다당제 총선을 약속했습니다. 그 결과 1990년에 총선이 이뤄져 야당인 민족민주동맹(NLD)가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신군부는 선거결과를 무시하고 다시 군부가 의회를 꾸리게 되어 당선된 야당의원들이 해외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구성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해외 각지에서 미얀마 민주화운동이 벌어졌습니다.
군부통치가 계속되어 여러 집권자가 교체되다 마침내 2007년 ‘샤프론 혁명’이 발생하였습니다. 승려가 중심이 된 혁명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고 그 결과 군부가 오래전 약속한 신헌법을 제정하게 되었습니다.
이 헌법은 굉장히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군부의 영구집권을 가능하게 하는 안전장치가 마련된 것으로 내용을 살펴보면 국회 및 지방의회 상하원에서 25퍼센트를 군부에게 할당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이러면 현실적으로 헌법 개정이 불가능하게 됩니다. 또한 군부가 누린 경제 분야의 특권을 보장하였고, 치안과 관련된 내무,국방 등의 장관직을 군부가 임명하도록 되어있습니다.
 
상당히 악법적인 요소들이 있는데 지금 쿠데타 세력은 “우리는 2008년 헌법에 따른 것”이라 주장하고 있습니다. 헌법의 찬반여부를 국민투표에 붙이고자 준비하던 중 태풍피해가 발생하여 약 13만 명이 사망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군부는 국제사회의 개입 및 구호를 전부 거절하였고 군부 통제 하에 선거가 열려 신헌법은 통과되었습니다.
2011년 출범한 테인세인정부는 국제사회에 지속된 압력과 국민들에 민주화요구에 대해 민주화를 위한 점진적인 로드맵을 시행하였습니다. 여기서 88항쟁 이후 거의 가택연금 되어있던 아웅산 수치를 정계에 복귀시키고 NLD를 2012년 보궐선거에 참여시켰습니다. 그즈음 국제사회는 미얀마의 민주화 로드맵이 정상적으로 갈 것이라 기대하며 미국대통령 오바마가 미얀마를 방문하였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2015년 총선에서 마침내 NLD가 압승을 거두고 집권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만 여전히 많은 문제가 있었는데 헌법에 의해 군부는 25퍼센트의 의석을 보장받았고, 대통령의 자격 중 외국인과 결혼한 사람은 할 수 없다는 요건이 있어 영국인과 혼인한 아웅산 수치는 정상화 된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대신 국가고문을 하게 되어 결국 비헌법적인 권력구조를 통해 등장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NLD에 집권으로 군부통치가 막을 내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민주화에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군부는 여전히 25퍼센트의 의원 할당과 경제적 이권을 유지했고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아웅산수치는 취약했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선 다수 버마족의 지지에 연연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로힝야족 사태 당시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음으로서 대외적인 비판에 직면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군부와 타협을 하고 그들을 제어하려는 시도를 하여 인사권에서 군부의 영향력을 축소시키는 개혁을 단행하였습니다. 이런 개혁들은 군부에게 2008년 헌법을 통해 영원하리라 믿었던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위협으로 인식되었습니다. 지난 해 열린 총선에서도 NLD는 승리하여 재집권하였습니다.
그동안 군부는 독립과정에서 기여했다는 역사적인 정통성과 경제권의 장악으로 권력을 누렸습니다. 그들은 불교사찰에서 헌금을 내는 등의 방법으로 선정을 베푸는 모습을 보이며 대중에게 호의를 얻어 권력을 유지하였는데, 연이은 선거패배와 부패문제가 드러나며 대중의 신뢰를 상실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지난해 선거는 군부가 직접 정당으로 참여하였는데 그 대표의 지지도가 형편없이 낮았습니다. 이런 상황을 지켜보며 군부는 큰 위협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지난해 총선 이후 NLD정부에게 주어진 과제는 독립을 요구하는 소수민족을 어떻게 규합시킬 것인가 입니다. 로힝야족 사태에서 보듯 기본적으로 NLD정부가 이 부분에 대해서 진정성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다만 점진적으로 대화시도 같은 것이 지난해부터 이뤄지다가 올해 2월 1일에 쿠데타가 발생하였습니다. 이 날은 선거 이후 새로운 국회 회기가 시작되는 날이었습니다.
 
2021년 쿠데타
 
쿠데타를 주도한 사람은 육군 총사령관인 민 아웅 훌라잉입니다. 그는 양곤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육군사관학교를 연거푸 떨어지다 세 번째에 들어갔다고 합니다. 주변의 평은 학자적인 사람에 가까운 온건한 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이 사람이 군부 내 1인자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소수민족 탄압에 앞장섰습니다. 특히 로힝야족 사태에 실질적 책임자였습니다. 로힝햐족은 미얀마 내에 다수의 소수민족 중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외모와 종교도 다른 그들을 영국 식민지시절 불법으로 들어온 사람들로 규정하였기 때문인데 그렇기에 일종의 공공의 적으로 불렸기에 탄압을 당했어도 그들을 동정하거나 연대하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굉장히 민감한 부분이라 버마족은 이 부분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부분이 훌라잉을 주축으로 한 군부가 정통성을 주장하며 소수민족 문제를 해결하고 버마족 우선주의를 내세우며 집권하는 명분을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납득되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군부가 연이은 선거에서 패배하고, NLD정부에 개혁으로 위협을 받았다고 해도 여전히 25퍼센트의 의석이 보장되어 있고, 경제적 기반이 있는데 굳이 쿠데타와 이로 인해 발생한 유혈사태로 그들이 얻을 이익이 무엇인가입니다. 오히려 비즈니스 측면에선 마이너스입니다. 왜냐하면 국제사회가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군부가 집중하고 있는 천연가스사업 등이 손실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군부는 경제력이나 권력을 강화한다는 목적보다 더 이상 선거를 통한 집권이 어렵다는 위기의식이 가장 큰 요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미얀마 민주화운동Ⅰ_전개
 
미얀마 시민들은 불복종하기 시작했습니다. 많은 전문가들은 저항의 가능성을 낮게 보았습니다. 군부가 워낙 강하고 지난 88운동도 실패한 것을 봤을 때 어렵다고 보았는데 예측을 뒤집고 굉장히 적극적인 저항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지난 운동과는 몇 가지 차별점을 가졌습니다. 지난 88운동이 아웅산 수치 여사를 구심점으로 한 특정 정치세력을 중심으로 일어났다면 이번 운동은 집단지성. 즉 대중들이 직접 지도하는 시민 불복종운동이었습니다. 또한 88년도는 소식을 알리는 매체가 충분하지 않아 고전했지만 이번 운동이 처음 일어났을 때는 SNS를 통해 전 세계로 활발히 소식이 전해졌고 기록되었습니다. 가장 큰 차별점은 NLD의 집권입니다. 연이은 선거승리를 통해 지금의 젊은 세대들은 민주주의를 느끼고 경험하였고 무엇보다 승리한 경험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굴복하지 않는 한 이길 것이다.” 라는 광범위한 연대와 믿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정치세력화 되어 NLD 지도부를 중심으로 연방의회 대표위원회 (CRPH)가 구성되어 임시정부를 선포하였습니다. 이들은 내각을 구상하고 새로운 헌법을 얘기하며 국민통합정부(NUG)를 위한 ‘임시헌법계획안’을 수립하였고 소수민족 무장단체와 연대한 연방군 창설을 선언하였습니다.
 
미얀마 민주화운동Ⅱ_전망
 
논란도 있습니다. 현재 거리에서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고 있는데 이들 정부가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주는지 회의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소수민족 무당단체와 연계한 연방군을 창설할 경우 내전 양상으로 가는 것도 배제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전반적으로 불확실성이 증가하고 있습니다. 군부는 언론 폐쇄 및 통행금지조치로 탄압을 강화하고 있고 방화사건을 조작하여 시위대에게 뒤집어씌우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습니다. 곳곳에서 정전이 일어나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외부로 알리지 못하도록 인터넷을 끊고 있습니다.
군 내부에서 동요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몇 가지 사례가 나오고 있는데 군에서 이탈하여 대외적인 메시지를 넣는 일이 생기고 있어 이것이 군의 이탈 및 분열로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도 있습니다만 현재는 모든 것이 불확실한 상황입니다.
현재 일어날 수 있는 상황은 군부가 회의장으로 갔을 때 시민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은 상황, 부분적으로 수용하거나 전격적으로 수용하는 상황, 저항세력이 군부와 타협하거나 전면적으로 저항하는 상황이 있습니다. 현 상황은 저항세력이 전면적으로 저항하고 있고 이에 군부는 절대 수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여기에 흔히 얘기하는 실패하는 국가. 즉 혼돈상황을 얘기할 수도 있습니다.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쿠데타를 했지만 1년 이내에 총선거를 실시하고 권력을 이양하겠다고 약속하여 시민들이 받아들인 경우가 1964년의 과도기 군정이었던 네윈 군정이 있었지만 현 상황은 오랫동안 축적된 군부의 기득권이 크고 여기에 위협을 느낀 상황에서 일어난 쿠데타이기 때문에 자발적으로 타협안을 수용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미얀마 민주화운동Ⅲ_국제사회의 대응
 
일단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긴급 소집되어 민간인 학살에 대해 강력히 규탄하였습니다만 내정간섭으로 비춰질 수 있는 문제와 중국 등 강대국 간의 이견 차로 인해 단기간에 실현되기는 어렵습니다.
서구국가들 위주로 개별국가차원에서의 제한적 제재를 시도하고 있는데 놀라운 사실은 이미 훌라잉 같은 군부 지도자들이 로힝야학살로 인해 국제사회의 제재 대상으로 오른 사람들이라는 점입니다. 제재라는 것이 결국 개인에 대한 여행 금지, 해외 자산 동결 등인데 이미 제재를 받은 대상들인 만큼 큰 효과를 기대하긴 어려워 보입니다.
또 하나는 아세안입니다. 지난 4월 자카르타에서 아세안 특별정상회담을 개최하였습니다. 여기서 5개항을 합의했는데 다음과 같습니다.
 
 
여기에 대해 미얀마 군부는 “상황이 안정된다면 아세안 정상들의 건설적인 제안을 신중히 검토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일단 글로만 보면 나름의 성과인데 문제는 미얀마군부가 하기 나름이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회담에 참석한 훌라잉을 정부 대표로 인정한 게 아니냐는 비판도 있습니다만 그래도 성과라면 군부 쿠데타 이후 처음으로 대화의 장으로 불러내서 이런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점은 의의입니다. 특히 중요한 점은 미얀마 군부를 공식적인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한국정부는 먼저 정부와 국회에서 비판성명을 냈습니다. 그리고 교류중단, 군용물자 수출금지, 인도적 사업을 제외한 공적사업 전면 재검토를 발표하였습니다. 이런 조치들은 미얀마 사태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분노 및 공감이 반영되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사태가 장기화 될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럼 결국 군부가 유지되지 않겠냐는 의견이 많습니다. 그러면 외교나 경제적 관계를 위해서 일정 선에서만 제재를 하게 되는데, 아까 말씀드린 현 사태에 대한 여러 가능성을 비춰 보았을 때 미얀마의 민주화를 위한 가장 중요한 것은 국제사회의 지원 및 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를 위해 좀 더 단계적인 조치 강화 이를테면 군부의 이해관계에 기여하는 한국기업 활동에 제재 같은 것들이 필요한 상황입니다.
 
미얀마 민주화운동Ⅳ_한국시민사회의 역할
 
일단 여러 시민사회단체들의 연대체가 발족했습니다. 이들은 군부쿠데타를 비판하는 성명을 냈고, 미얀마 투자교역에 대한 정부에 실질적 조치를 촉구하는 한편 실제 관련 기업들에 대한 관계 단절 촉구 서명을 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습니다. 창의적인 활동도 이어져 지난 보궐 선거 당시 선거권의 행사를 미얀마 민주주의에 대한 지지로 하자는 것도 있었고, 불교단체들은 무고한 생명이 죽어가는 미얀마 사태의 종식을 기원하며 오체투지 행진을 하였습니다. 여러 언론보도에서도 관심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직접적인 접근이 불가능한 상태에서 여러 형태로 민주화 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연대 기금모금운동도 진행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드린 말씀은 현 문제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배경설명입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시민 개개인의 의지이고 이것을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지에 관한 고민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 이상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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