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80호] 무위당학교 지상강좌 ‘식량 및 에너지 위기와 ‘탈자본’의 철학’
등록자 관리자 등록일자 202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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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위당학교 지상강좌
식량 및 에너지 위기와 ‘탈자본’의 철학
강의. 강수돌 고려대학교 명예 교수
정리. 편집위원회
 
 
들어가며
러시아-우크라니아 전쟁 때문에 가깝게는 물가 인상 문제, 더 큰 차원으로는 세계 평화에 금이 가고 있습니다. 조금 더 이론적으로는 90년대 이후로 자본주의 1세계 내부에서 여러 가지 헤게모니 다툼들이 있었습니다. 오늘날은 미국과 중국, 러시아 간의 권력 문제까지 겹쳐 복잡한 상황들이 생기고 있습니다.
좀 더 단순하게 이야기하자면 자본주의의 끝자락에는 늘 어떤 경제 위기, 사회 위기 내지는 생명의 위기가 존재합니다. 대표적으로 생태계 위기나 전쟁으로 나타난다고 볼 수 있는데 코로나 사태와 기후위기까지 겹쳐 지금 현실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저는 이런 현실을 ‘복합적 삶의 위기’라 부릅니다. 아주 다양한 위기들이 동시에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가 보기에는 이럴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서 충실히 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봅니다. 식량 문제와 에너지 문제를 포함한 우리 생활 방식 전반의 문제(시스템, 가치관, 일상생활)를 한 번 더 성찰해 보는 시간을 가진다면 더욱 의미 있게 탈출구를 찾아갈 수 있지 않을까요?
 
식량과 에너지 위기
요즘은 자영농들이 살아가기 상당히 힘듭니다. 일단 농업이 자본주의 노동력을 뒷받침하는 수단으로 기능한 지 오래됐고, 국가가 전략적으로 노동력을 값싸게 만들기 위해 식량 가격을 통제하는 바람에 농사·농민·농업이 그 자체로서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이 전 세계적인 현상이자 특히 한국에서 더 노골적으로 드러납니다. 한국의 곡물자급률 19%, 식량자급률 45%는 매우 심각한 수준이죠. 그것마저 석유와 연관된 기계, 농약, 비료, 비닐하우스 등의 요소를 빼면 실질자급률이 5%도 안 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초국적 기업이 세계 곡물 생산과 공급을 독점적으로 장악하는 현상이 우리 눈에 보이지 않게 작동하고 있죠. 이런 상황을 염두 한다면 식량 위기는 최근 우크라이나 사태 때문만이 아니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이런 전쟁 상황이 기존의 모순과 문제를 조금 더 악화시킨다고 생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에너지 위기를 한 번 살펴보죠. 에너지 위기가 한편으로는 생필품 가격 문제, 물가 상승처럼 우리 생활의 위기로 다가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산업혁명 이후 가속화된 화석 연료 기반의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는 이산화탄소를 비롯한 온실가스를 대량 방출했습니다. 이것이 지구 온난화와 오늘날의 이상 기후 내지는 기후 위기를 초래하고 있습니다. 한쪽에서는 가뭄과 산불이 존재하고 다른 쪽에서는 홍수와 물난리 같은 온갖 재앙이 발생하는 게 현실입니다. 이런 면에서 에너지 위기를 단순히 에너지 원천의 고갈과 생산 문제로만 국한하지 말아야 합니다. 에너지를 둘러싼 생산과 소비, 그리고 우리 삶의 방식 전체가 인간 생존에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좀 더 거시적으로 바라봐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이런 문제에 보다 진지하게 임한다면, 어떤 대안을 생각할 수 있을까. 지금까지 많은 학자가 강조해 온 바를 제 나름대로 압축한다면, 결국은 ‘탈자본’의 방향으로 귀결됩니다. 대체로 우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이 영원무궁할 것처럼 생각하고, 아무리 우리가 저항해 봤자 자본주의 자체를 바꿀 순 없다는 식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해가 뜨고 지고 하듯이 자본주의도 결국은 생로병사의 과정을 거치게 돼 있습니다. 길게는 약 700년 된 자본주의, 짧게는 (한국의 경우) 약 100년짜리 자본주의도 이제는 늙은 상태입니다. 즉 생로병사의 사이클 중에서 현재 자본주의는 ‘병’과 ‘사’ 사이에 있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내용을 담은 ‘생태 민주주의’가 탈자본을 구현할 대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식량과 에너지 위기에 대한
세 가지 접근방식
이제 우리의 시각과 관련해서 정리할 필요가 있다고 느낍니다. 왜냐하면 어떤 문제를 갖다 붙이더라도, 크게 세 가지 접근방식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교육이나 선거 문제도 그렇고 식량과 에너지 위기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첫 번째 접근방식은 기술주의적 접근입니다. 보수적이고 특권 중심적인 접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기더라도 ‘그거 기술 혁신하면 돼, 효율 높이면 얼마든지 해결할 수 있어.’라고 말하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식량과 에너지 문제에 적용해볼까요? 대표적인 예가 녹색 혁명입니다. 1960~70년대에 화학비료나 농약(살충제), 제초제를 통해 식량 생산성을 엄청나게 향상 시키거나 품종 개량을 통해 생산성을 높였죠. 근데 품종 개량을 또 다르게 보면 결국은 제초제나 농약을 더욱 잘 견뎌낼 수 있는 품종을 만들어 생산성을 높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농업만이 아닙니다. 통상적으로 공장의 기술 혁신은 인간 노동력을 배제하고 소수의 인력으로 높은 생산력을 획득하는 방식입니다. 이게 기술주의적인 접근입니다. 사람을 위한 혁신이 아니라 이윤을 위한 혁신이죠. 사람이나 자연을 희생시키면서 자본의 수익성을 추구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저는 기술이 결코 해법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다음에 제도주의적 접근을 볼 수가 있습니다. 기술주의적 접근보다는 훌륭한 입장입니다. 시스템을 민주화하고 각종 개혁을 통해 식량 자급률을 높이고, 에너지 자립과 에너지 전환을 이루자는 거죠. 예를 들어 태양광 설치를 유도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제도적인 지원하고 개혁을 통해서 에너지 지원법을 만드는 것, 이게 제도주의적 접근법입니다. 물론 이것도 필요하지만, 반드시 우리가 짚어 봐야 하는 부분도 있습니다. 태양광이 기존 화석 연료 에너지보다 훨씬 청정하므로 대량으로 공급하기 위해 산을 일부 훼손하더라도 괜찮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농촌을 갔을 때 기존의 산이나 밭에 태양광을 대대적으로 설치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조금이라도 양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풍경을 보면 ‘이것은 아니다.’라는 마음이 들겠죠. 제도적 대안을 찾더라도 그 방향이 소규모, 분권화, 지역 자립형, 탈상품, 탈이윤의 방식이 아니라면 여전히 문제가 크다는 얘깁니다.
바로 그 마음이 세 번째 생태주의적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도주의적 접근에서는 장기적인 인류의 생존이나, 인간과 자연의 공생을 도외시하고 당장 민주적인 개혁을 통해 좋은 것을 값싸게 대량으로 생산해 대중적으로 배포하려고 하죠. 이건 옛날 기술주의적 접근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약간 삐딱하게 표현해서 ‘소비의 민주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소비의 민주화는 말이 좋아 민주화이지,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 상품 시장을 넓히는 것이죠. 그런 차원에서 우리는 반성을 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면에서 생태주의적 접근방식은 대량생산-대량유통-대량소비-대량폐기가m 아니라 적정생산-적정분배-적정생활-적정순환의 새로운 시스템을 만드는 과정이고, 그 과정에서 자본이나 권력이 아니라 시민과 공동체가 주체적인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조금 먹고 조금 싸자’는 철학이 근저에 깔려 있습니다.
 
자본주의 생활양식
우리가 진지하게 자본주의 생활양식을 반성하자고 할 때, 어떤 부분을 어떻게 반성해야 할까요. 역사적으로 인간과 자연이 철저히 분리되는 것이 자본주의 생활양식입니다. 우리 주변의 아파트를 보십시오. 산을 뭉개버리고 아파트를 짓잖아요. 도로 건설, 태양광 설치 역시 마찬가지고요. 새마을운동은 농어촌 공동체를 해체했고 우리는 이제 개인만 남았습니다. 각자도생의 시대죠.
그다음으로 학교에 간다는 게 무슨 뜻입니까? 인격체가 아니라 노동력을 기르는 과정입니다. 정말 인격체를 기르는 과정이었다면 아이들을 시험 점수나 등수로 평가하지 않았겠죠. 우등생과 열등생으로 나누면 안 됩니다. 왜 어떤 아이들은 우등생이 되고 어떤 아이들은 열등생이 되어 평생 열등감을 가져야 합니까. 학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보석 같았던 존재는 초·중·고, 그리고 대학교를 거치면서 보석과 돌멩이로 나뉩니다. 10%의 보석과 8~90%의 돌멩이로 나뉘죠. 이는 취업을 해도, 사회생활에서도 마찬가집니다. 비싼 차를 몰면 사람을 높이 보고, 경차를 몰면 낮춰 보죠.
자본주의에서는 인간의 내면과 외면도 분리됩니다. 내면의 어떤 통찰력이나 삶에 대한 지혜보다 외면의 성공과 졸업증이나 명품 등을 우선시하죠. 그런 것을 확보하면 마치 자기 자신이 빛나는 존재가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거죠.
자, 그러면 자본주의가 우리를 이렇게 분리했을 때 이 부분이 실제로 작동하는 사회 구조 체계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을까요. 많은 아이가 공부를 잘해서 좋은 직장에 취업하고 싶어 합니다. 여기서 좋은 직장은 돈을 많이 주는 직장이죠. 그렇게 돈을 많이 벌어서 뭐 합니까. 상품을 사는 거죠. 좀 더 차별화된 상품을 사서 나 자신을 표현하고 싶고, 드러내고 싶고, 우월감을 지속해서 유지하고 싶은 마음으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물신주의’ 사회죠.
자본주의는 상품을 생산해서 많이 팔아야 이윤을 남기는 시스템입니다. 그 과정에서 인간 노동력을 동원해야 하고, 자연 자원을 원료를 써야 합니다. 많이 쓰고 버려야 재구매하기 때문에 대량 폐기를 반복한 결과 원료는 갈수록 고갈되는 한편 쓰레기는 감당이 어려울 정도로 축적됩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우리 경제 구조는 자원을 대량으로 소모하고 있으며 인간 노동력을 대량으로 쓰면서도, 또 대량으로 실업자(잉여 인간)를 만들어내는 형태로 달려갑니다. 왜 그럴까요? 자본주의 초기에는 생산하는 만큼 대부분이 팔렸습니다. 그런데 시장이 갈수록 포화 상태가 되면 어떻습니까. 이제는 쓰고 있는 물품을 일회용품처럼 버려야만 새로운 상품을 팔 수 있죠. 한편에서의 자원 고갈, 다른 편에서의 쓰레기 더미는 불을 보듯 뻔합니다. 미세먼지나 미세플라스틱 문제, 그리고 수질오염, 대기오염, 토양오염 역시 그 결과입니다. 한 마디로, 점점 사람이나 생명체가 살기 어렵게 돼 간다는 얘깁니다. 자본주의는 우리에게 신분의 자유화나 소비의 민주화를 주고, 또 온갖 편리함을 안겨다 주었지만, 마침내 사람과 자연이 망가질 만큼 망가지게 만든 시스템입니다. 그런데 자본주의 자체는 사람이나 자연의 생명력을 먹고 사는데, 그 생명력이 바닥을 치게 될수록 자본주의 자체도 종말을 고할 날이 다가오는 셈이지요. 제가 생로병사 중에서 ‘병’과 ‘사’ 사이에 있다고 한 근거 역시 바로 이런 점 때문입니다.
자본주의는 경쟁과 이윤이 핵심 메커니즘인데, 자본주의에서 경쟁이 격화되면 더 효율적인 기술 시스템을 도입해야 하는 압력이 생깁니다. 그런데 더 효율적인 기술 시스템을 도입할수록 인력이 덜 필요하게 되는 거죠. 그런데 상품 단위 당 노동력이 덜 들어갈수록 자본이 추구하는 이윤은 그만큼 줄어듭니다. 인간 노동이 새로운 부가가치를 불어 넣는 원천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칼 마르크스 이전에 데이비드 리카도나 애덤 스미스가 이미 말한 것이죠. 안젤름 야페 교수가 <파국이 온다>라는 책에서 한 얘깁니다. 그 결과 자본주의는 경쟁을 위해 기술혁신을 할수록 자기가 추구하는 이윤이 줄어든다는 본질적 모순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한푼이라도 더 이윤을 만회하기 위해 갈수록 더 많은 생산과 파괴를 일삼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코 기업가가 도덕적으로 나빠서 그런 게 아니란 점, 즉 자본주의는 윤리적 관점이 아니라 경제적 관점에서 보더라도 자기파멸적으로 달려갈 수밖에 없는 자가당착적 시스템임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생산과 소비 차원 모두가 성숙 단계 내지는 포화 단계에 이르면서 자원도 고갈되고, 노동력의 소중함도 가치가 떨어집니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는 잉여가 되는 두려움, 즉 버려짐과 쓸모없어짐에 대한 두려움으로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공동체와 개인, 인격체와 노동력, 자연과 인간, 우리 인간도 외면과 내면이 분리된 결과 시스템은 발전했는데 자연과 인간의 공생은 물론이거니와 생존 자체가 의문시되는 시점이 왔습니다. 자연과학자들이 말하는 ‘6차 대멸종’에 대한 경고가 바로 그것이죠. 최근 수백 년밖에 안 되는 자본주의 삶의 방식이 새로운 대멸종을 초래한 셈입니다.
이 시스템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감히 시스템을 버려야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그렇게 하지 못하느냐면, 이 시스템이 만들어낸 병 때문에 그렇습니다. 트라우마고 상처 때문이죠. 자본주의와 더불어, 또 자본주의로 인해 사람이 정상적으로 행위 할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얘깁니다. 공부를 못하면 ‘루저’가 된다는 두려움이 아이들을 짓누르죠. 청년들이나 어른들도 마찬가집니다. 취업을 하고 돈을 벌지 못하면 인생이 망가진다는 두려움에 짓눌려 삽니다. 온 세상이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사회, 물신주의 사회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겁니다.
이런 식으로 우리는 두려움 앞에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쓸데없이 손해 보고 싶지 않아서 가만히 있는 겁니다. 트라우마와 두려움으로 인간 주체가 변형된 거죠. 주체가 병들어 있습니다. 이 병든 주체들이 다시 건강성을 회복하지 않으면, 잘못된 사회 구조를 고칠 수 없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자본주의는 이런 식으로 트라우마를 만들어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이 가진 두려움에 기초하여 가치증식을 추구합니다. 그래서 우리 내면의 트라우마를 직시하고, 그 뿌리를 응시하면서 서로 소통하고 연대함으로써 서로 상처를 치유하는 과정을 밟아야 비로소 우리는 근본적인 대안을 얘기할 수 있게 됩니다.
 
중독 시스템으로서의 자본
지금까지 자본주의 시스템이 문제라고 했는데, 정말로 그런지 데이터로 잠시 살펴보겠습니다.
 
(1인당 GDP)
 
지금 아래쪽 X축을 보시면 연도입니다. 산업혁명이 일어난 1780년대까지만 해도 그래프는 그냥 밑바닥을 기었습니다. 1인당 소득으로 따졌을 적에 전 세계 전체의 평균이 밑바닥이었다는 겁니다. 산업혁명 이후라는 게 바로 ‘자본주의’잖아요. 지금 이 그래프를 보시면 최근 100년 동안 소득이 이렇게 가파르게 올라갔음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불평등도 있고 절대적인 빈곤이 있습니다만, 그런데도 평균적으로 잘살게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대량 생산과 소비 시스템 속에서 물질 풍요가 엄청나게 증가했습니다. 어디를 가나 넘쳐나고 편리한 사회가 된 것이죠. 그런데 그게 최근 100년 사이의 일이란 것을 봐야 합니다.
 
(이산화탄소 배출량 변화 )
 
근데 이것과 무엇이 맞물리느냐 하면 최근 100년 동안의 자원 소비량, 그리고 온실가스 이산화탄소 배출량과 맞물립니다. 특히 이산화탄소량이 제일 많은데, 화석 연료를 태우면 나오기 때문에 온실가스의 대표 주자입니다. 19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온실가스양이 적었습니다. 지구가 감당할 수 있는 선 안에서였습니다. 근데 지금은 어마어마하게 올라가 있지 않습니까. 결국 우리가 잘살게 된 것과 지구가 뜨거워져 살기 어려워진 것이 맞물려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조건 속에서 상품 하나를 만들어서 남길 수 있는 이윤이 점점 작아지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 한 대 팔아서 남는 돈이 예전에 비하면 현저히 적어졌습니다. 자본의 입장에서는 기존 시장 속에서 신제품을 만들어내는 것도 한계가 있고 돈벌이가 안 되니까, 마지막 단계로 가는 겁니다.
바로 합법적인 파괴입니다. 그게 뭡니까, 우리가 가장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있는 것은 ‘재개발’입니다. 그리고 이 재개발을 더 대규모로, 또 더 폭력적으로 하는 게 곧 전쟁입니다. 유럽의 요한 갈퉁 선생님이 ‘자본주의는 평화의 능력이 있는가.’ 이런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습니다. 한 줄짜리 질문인데 얼마나 심층적입니까. 자본주의가 평화의 능력이 없는 것, 달리 말해서 자본주의의 끝은 전쟁이다. 이런 이야기이죠.
자본에는 한계가 없어요. 자본이 추구하는 것은 돈의 가치이기 때문에, 돈의 가치를 이제 학문으로서는 그냥 가치라고 표현합니다. 요즘 사람들이 ‘가치 있다’라고 느끼는 게 대체로 돈의 가치·교환가치로 환산되는 걸 말하거든요. 교환가치를 줄여서 가치라 합니다. 자본주의에서 가치 있는 것은 교환가치로 환원됩니다. 흔히 자본주의를 ‘돈 놓고 돈 먹는’ 체제라 하죠. 돈(가치)을 투자해서 더 많은 돈(가치)을 버는 식으로 가치증식이 일어나는 것이 자본주의죠.
사업주 입장에서는 내가 노동력을 사는데 내가 준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생산해야 이윤이 생기잖아요. 그걸 잉여가치라 합니다. 이윤의 원천이죠. 인간 노동력이 생산한 이 잉여가치를 자본이 가져가는 것, 이것을 착취라 하죠. 자본주의에서 착취는 불법이 아니라 합법입니다. 기업가가 노동력을 임금과 등가교환 했기 때문입니다. 시장에서는 등가교환 공장에서는 잉여착취가 이뤄지는 것. 이게 자본주의의 비밀이죠.
근데 이제 자본은 추상적인 개념이고 구체적인 개념으로는 개별 기업이 되겠죠. 개별 기업, 가게, 사업이 될 텐데 이런 개별 사업체들은 수많은 개별 자본들과 또 경쟁해야 하잖아요. 그 과정에서 효율적으로 혁신을 하는 데 가장 좋은 희생양이 뭡니까. 사람입니다. 사람을 관리하는데 작동하는 법칙은, 아래로 ‘갈’구고 위로 ‘비’벼야 살아남습니다. 생존과 출세를 위해선 아래로 갈구고 위로 비벼야 하기에 저는 이것을 ‘갈비의 법칙’이라 합니다. 기업은 경쟁력 있는 노동을 수행하면 살려두지만, 그렇지 않으면 과감히 잘라내겠죠. 그래서 우리는 상시적인 구조조정 속에서 노동하게 됩니다. 그러니 모두가 탈락과 배제, 잉여와 쓸모없음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려 살고 있죠.
이제 자본주의에 작동하는 3가지 근본 법칙을 정리하면, 등가교환의 법칙, 착취의 법칙, 그리고 갈비의 법칙이 있습니다. 등가교환은 노동력과 임금의 교환, 상품과 화폐의 교환교환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이고요, 착취는 자본이 노동의 결과물에 포함된 잉여가치를 가져가는 것(생산과정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갈비는 자본이 노동력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통제하는 방식(노동과정에서 일어나는 것)과 관계됩니다.
 
(중독 시스템으로서의 자본)
 
앞서도 말했지만, 이런 경쟁 속에서 어쩔 수 없이 자본은 자가당착적인 상황에 빠지는데 더 경쟁력 있게 생산하기 위해서 기술 혁신을 한 결과, 단위 상품당 들어가는 인간 노동력의 가치와 양이 줄어드는 거죠. 효율이 향상되는 것만큼 가치가 줄어드니까, 본전을 찾기 위해서라도 더 많이 생산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습니다. 경제계나 정치가들이 눈만 뜨면 경제성장, 경제성장 외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결과 갈수록 자연 훼손이 더 많이, 더 빨리 심해집니다. 이 부분을 직시한다면 ‘탈성장’ 논리도 얼핏 들으면 맞지만, 탈성장만 주장해서는 안 되고 ‘탈자본’이 되어야 비로소 탈성장도 가능함을 알 수가 있습니다.
 
새로운 윤리: EBC
탈자본을 하지 않고서는 탈성장도 어렵다는 것, 이 부분을 잘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가 드릴 말씀은, 제도의 민주화로는 자연과 인간이 공존할 가능성이 오지 않는다는 겁니다. 그것은 우리가 가치, 교환가치, 돈의 가치, 화폐나 상품 가치로 돌아가는 이 시스템 전반(등가교환의 법칙, 착취의 법칙, 갈비의 법칙 등)을 바꾸지 않으면 여전히 무한한 가치증식을 추구하는 자본의 품 안에서만 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근본적으로 이 가치 시스템의 운영 원리를 넘어서는 새로운 윤리나 가치관이 필요합니다. 근본적으로 앞서 말한 3가지 자본주의 법칙을 넘어서야 한다는 얘깁니다. 즉, 등가교환을 넘어 선물의 원리를 실현하고, 착취를 넘어 우애의 원리를 구현하며, 갈비를 넘어 존중의 원리를 실천해야 합니다. 쉽게 말해, 내가 손해 보더라도 너의 기쁨이 곧 나의 기쁨이라는 원리, 내가 너와 함께 있는 것, 공존하는 것이 내 삶의 존재 이유라는 원리, 살아있음의 기쁨, 함께함의 기쁨, 도와주고 선물을 주고 나누는 것의 기쁨, 서로의 존재를 존중해주는 기쁨… 바로 이런 것들은 결코 자본주의의 3가지 법칙 안에서는 볼 수 없는 것들이죠. 바로 이런 것들이 (돈) 가치를 넘어서는 새로운 가치(인간 가치, 생명 가치)이거든요.
그래서 제가 오늘 여러분들과 공유하고 싶은 개념은 바로 values beyond value, 즉 가치를 넘어선 가치들입니다. 제가 최근에 낸 『(자본이 사람을 멈추기 전에) 부디 제발』이란 책의 핵심 명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서 ‘가치들’이란 영어 단어는 ‘가치관(철학)’을 뜻하기도 합니다. 양질 전화(양이 상당 정도 축적되면 결국 질적으로 변환이 일어남)가 일어나는 셈이죠. 즉, 돈의 가치, 상품이나 자본의 가치를 넘어선 인간적 가치와 생명의 가치를 중심으로 해서 돌아가는 새로운 시스템이 절실하다는 얘깁니다. 왜냐하면 오로지 더 많은 가치(돈)만 추구하는 기존의 경제 가치 중심 시스템은 가면 갈수록 더 많은 가치를 추구하기에 일종의 중독 시스템이라 할 수 있거든요. 이는 마치 알코올 중독자가 갈수록 더 도수 높은 술을 찾는 것과 원리가 같죠. 그 중독의 끝은 죽음이죠.
그러니까 우리가 중독 시스템에서 벗어나야지만, 비로소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음을 우리는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탈자본의 새로운 가치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는 곧 탈자본의 교육, Education Beyond Capitalism을 강조로 이어집니다. 무언가를 희생하고 오염시키고 오남용해 내 이득을 취하는 관점은 결코 인간의 관점, 생명의 관점일 수가 없습니다. 그건 자본의 관점이죠. 이런 면에서 우리는 지금의 무책임성에 기초한 중독 시스템에서 벗어나 공동의 책임 윤리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삶의 방식으로 변화해야 합니다. 미시적으로 각 개인은 공동의 책임 윤리를 복원해야 합니다. 같은 맥락에서 거시적으로는 무한한 이윤 추구를 핵심으로 하는 대량 생산과 소비 시스템의 작동 방식에 대한 성찰도 필요하고요. 온 사회에 탈자본의 새로운 배움과 실천이 절실합니다.
요약하자면, 에너지 문제나 식량 문제, 기후 위기나 전쟁 위기 등으로 상징되는 우리네 복합적 삶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자본주의를 좀 더 제대로 보아야 하고, 자본주의적인 대량 생산·소비·유통 시스템이 아니라 적정 생산, 적정생활, 그리고 나눔과 순환의 대안적인 시스템을 생각하고 실천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자본주의 가치 법칙(등가교환, 잉여착취, 갈비법칙)을 넘어서, 선물과 우애, 존중과 나눔의 새 세상을 열어야 한다는 것이 제 마지막 결론입니다. 이걸 저는 최근의 『부디 제발』에서 ‘생태 민주주의’라 표현했습니다. 아무리 힘들더라도 선물과 우애, 존중과 나눔의 새 세상을 열어나가는 것, 이것이 복합적 삶의 위기에 직면한 우리들의 역사적 책임입니다. 무위당 장일순 선생님과 그 정신을 이어받은 ‘한살림’ 생협을 비롯한 전국 곳곳의 생명·평화 운동들은 그런 생태 민주주의를 열어나가는 선구자임이 틀림없습니다. 대안은 결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바로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 안에 대안이 있습니다. Power In People입니다! 다소 지루한 이야기, 끝까지 들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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