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64호] 무위당자취를 찾아서 - 내가 만난 무위당과 무위당사람들
등록자 황진영 등록일자 2018.08.01
IP 59.29.x.153 조회수 639
내가 만난 무위당과 무위당 사람들
 
 
 
안인수 거제민예총 회장
 
 
 
 

무위당 선생님 댁 앞에서
 
 
 나의 원주행은 십년을 넘게 다니던 회사를 퇴사하고 한 달 즈음 지난 후, 무작정 길 위에 나를 올려놓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특별한 계획을 갖고 나선 길이 아니었다. 몇 개의 도시 이름을 머릿속에 올리고 지우기를 반복했다. 즉흥적으로 이 도시 저 도시를 당일 혹은 하루 전에 선택해서 이동했다. 서울·수원·부여·군산·광주를 거쳐 원주에 이르렀다. 어떤 곳에서는 하루, 어떤 곳에서는 이틀을 머물렀다.
 
 처음에는 광주에서 목포로 갈 생각이었다. 목포로 내려가는 것이 집과 가까워지는 방향이었다. 하지만 광주에서 목포로 가기에는 내 몸도 마음도 너무 무거워져 있었다. 길 위에 선 이후 내내 따라다녔던 빗줄기가 몸을 무겁게 했고 길 위에서 만나고 생각하고 지우기를 반복한 일들로 정신도 힘들어했다. ‘그만 길의 끝을 잡을까?’하는 생각이 광주에 머무는 동안 반복해서 떠올랐다.
 
 광주에서 무등산을 오르내린 후, 나의 오랜 친구이자 옆지기 영주에게 전화를 했다. ‘그만 돌아갈까?’하니 ‘이대로 돌아오면 후회하지 않겠어?’ 했다. 그랬다. 아직은 미련이 남아있었다. 어떤 형태로든 결심이 서면 그때 이 길의 끝을 잡으면 될 일이었다. 아직은 길 위에 있어야했다.
 
 4월 26일, 게스트하우스에서 일찍 일어난 나는 광주시외버스터미널로 갔다. 광주로 오면서 계획했던 목포행은 이미 머릿속에서 지워져 있었다. 영주와 통화한 후 갑자기 한 이름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무위당 장일순!’ 잘 알지도 못하는 선생의 이름 석 자가 생각났다. 원주행을 결심했다. 내려왔던 길을 다시 거슬러 올라가는 길 위에 나를 올려놓았다.
 
 시외버스를 타고 원주로 이동하는 동안 무위당 선생과 원주에 대해 검색해 보았다. 어디서 선생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지 알아야했다. ‘무위당사람들’과 ‘무위당기념관’이란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이 정도면 충분했다. 직접 찾을 테니 다른 정보는 더 이상 찾지 않았다. 시외버스가 원주 경계에 접어들자마자 나는 무위당 선생을 만난 것 같은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원주시를 알리는 대형표지판에 쓰여 있었는지 아니면 다른 어떤 알림판이었는지는 기억이 분명하지 않지만 처음 만난 원주가 제일 먼저 내게 보여준 것은 ‘밝음’이라는 글자였다.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이고 느낌이었지만 ‘밝음’이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무위당 선생의 흔적을 볼 수 있겠다는 믿음이 생겼다.

 버스에서 내린 나는 터미널 앞에 세워진 거대한 원주지도에서 무위당기념관이 있는 중앙시장을 눈대중으로 확인했다. 횡단보도를 몇 번 오가면서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중앙전통시장방면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했다. 정확한 위치를 몰라 KBS 원주방송국 근처 정류장에서 내려서 왔던 길을 되돌아 걸었다. 시간에 쫓기거나 조급할 이유가 없었기에 원주의 거리를 여기저기 둘러보았다. 걷다보니 원주 강원 감영지가 앞에 있어 그곳에 들어가 눈요기를 했다. 문 닫는 시간이 다되어 그곳을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던 것은 아쉬웠다. 몇 개의 표지의 해설을 읽고 눈에 들어오는 건물을 본 것으로 아쉬움을 달랬다.
 
 감영지를 나와 길을 물어 횡단보도를 건너니 중앙전통시장이었다. 평일 낮 시장이 그렇듯 한산했다. 점포의 주인마저 한가해 보이는 그런 늦은 오후였다. 시장은 잘 정돈된 느낌이었고 사람들은 느긋했다. 사람들이 무위당기념관을 들어본 적은 있는 것 같았으나 정확히 설명해주는 사람은 만날 수 없었다. 그래도 여기 있다 했으니 어떻게든 볼 수 있으리라 여겼다. 그렇게 마음먹으니 시장이 눈에 들어왔다. 한지로 만든 전통공예작품을 전시, 판매하는 원주 한지 Gallery에 들어가 보았다. 주인의 허락을 얻지 못해 공예작품을 한 점도 사진으로 찍지 않았다. 시장에는 무위당 선생이 즐겨 쓰던 벙거지 모자를 파는 곳이 제법 많았다.
 

 인연이었을까? 처음 원주에 들어오면서 ‘밝음’을 보았는데 시장에서도 ‘밝음’을 보았다. ‘밝음’, 바르게 보고 바르게 나아가라는 화두처럼 보였다. 밝음신협은 그렇게 점포 사이에 아담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어떤 이끌림이 있었을 것이다. ‘밝음’이란 글자를 보는 순간 저곳은 무위당 선생과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되었다. 가까이 다가가 보았다. 건물 옆쪽 계단이 있는 곳에 무위당기념관이 있음을 알리는 표지가 있었다. 저녁 일곱시에 무위당 학교의 강좌가 열린다는 공고를 보았다. 강연시간은 두 시간 정도 남아 있었고 나는 그렇게 무위당기념관을 찾았다.
 

원주밝음신협 건물과 4층에 있는 무위당기념관
 
 
 밝음 신협 건물 4층에 자리한 무위당기념관은 그리 크지 않았으나 무위당 선생이 남긴 것들을 알차게 전시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나는 무위당 선생이 남긴 동양화에 매료되었다. 대부분의 작품이 난을 그린 것이었는데, 난은 소심란(素心蘭)이었다. 선생이 그린 웃고 있는 소심란을 보며 절에서 만든 달력 속에 뛰노는 어린 동자승을 닮았다 여겼다. 무위당 선생께서는 화폭을 통해 말하고 있었다. 사람이 가진 꾸미지 않은 마음은 본디 선하고 밝은 것이라고.
저녁 일곱 시에 시작된 강연, 나는 그것을 통해 한살림운동의 일면을 보게 되었다. 한살림운동은 지역 공동체 속에서 함께 성장하고 내가 사는 곳을 행복하게 만드는 데 방점을 두고 있는 운동이었다. 이웃과 함께 하며 이웃을 보듬어 안아야 성장할 수 있는 운동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소통과 배려가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을 강연에 나선 서울지역의 한살림공동체에 속한 연사의 경험담을 통해 알 수 있었다.

 나는 강연 뒤에 이어진 뒤풀이에도 참석했다. 무위당사람들의 소통과 연대에 함께 하고 싶었기에 뒤풀이 초대에 응했다. 낯을 많이 가리는 편이기에 이런 초대에 응하는 일은 나로서도 보기 힘든 일이었다. 사무국장님과 사무차장님의 배려가 나를 쉽게 무장해제 시켰던 것 같다. 뒤풀이 장소였던 미네르바는 80년대 대학가에서 흔히 보았던 주점을 재현해놓은 것 같았다. 그곳에서 무위당사람들이 함께 했던 무위당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원주에서의 하루를 마무리했다.
 
 다음날 아침 일찍 무위당 기념관을 찾았다. 전날 사무국장님의 안내로 무위당 선생의 흔적을 만나는 기회를 갖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기념관을 나온 우리는 장날이라 북적거리는 원주민속풍물시장을 통과해서 원주천을 건넜다. 선생이 늘 지나다녔다는 방죽을 따라 무위당 선생의 생가로 가는 길에 선생과 관련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풍물시장을 통과하면서 시장을 정비하는 과정 중에 있었던 시와 상인 간에 있었던 갈등과 중재의 어려움을 무위당 선생이 해결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무위당 선생이 방죽을 지나다니는 동안 가졌던 사람들과의 소소한 만남과 진솔한 사귐도 들었다. 대성학원에 대한 이야기며, 가택연금을 당한 상황에서도 동지나 후학들의 곤란을 외면하지 않으셨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사무국장님이 들려주는 무위당 선생의 이야기를 듣는 동안 ‘무위당 선생은 참으로 어른이었구나’하는 생각에 머리가 절로 숙여졌다. 그저 나무라고 가르침을 내리는 어른이 아니라 늘 곁에 계시는 그런 어른이었다고 생각했다. 부러웠다. 무위당 선생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동안 사무국장님은 무위당 선생과 함께 있는 것 같았다. 생전에 무위당 선생 곁에 머문 기억을 갖고 있는 무위당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랬다. 원주에는 어른이 있었다. 원주에는 무위당 선생이란 어른이 있었다는 생각이 원주를 벗어난 지금도 마음 속 깊이 남아있다.
 
 
원주, 무위당 사람들
 
 
원주 사람
무위당 장일순
 
선생은 어른이었네
원주에 사는 어른이었네
어른이 사는 동네에는 아이들이 있다네
참 밝은 아이들이 있다네
 
어른이 있어 아이들이 밝게 사는 곳
그곳이 원주라네
 
 
  ▷ 의견 목록 (총0개)
 
의견글 등록 권한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