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65호][일파만파] 항일 무장투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을 찾아서
등록자 황진영 등록일자 2018.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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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 무장투쟁의 영웅 홍범도 장군을 찾아서
                               
      글. 박찬수 치악초교 교사/ 민족문제연구소 회원
 
 
 지난 8월 18일부터 20일까지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의 궤적을 찾아 카자흐스탄을 다녀왔다.
작년부터 한국인은 카자흐스탄을 무비자로 입국할 수 있다.
12년 전 중앙아시아를 여행 할 때는 비자가 나오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려 카자흐스탄 여행을 포기했었다.
알마티 국제공항에 입국하자마자 환전을 하고 홍범도 장군의 묘소가 있는 크질오르다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는 1,100Km를 날아 크질오르다에 도착했다. 크질오르다는 카자흐스탄 남부에 있는 도시로
대부분의 지역이 아랄카라쿰 사막과 키질쿰 사막으로 덮여 있어 카자흐스탄에서 가장 덥고 건조한 지역으로 꼽힌다.
홍범도 장군은 1868년 평남 평양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7일 만에 어머니를, 9살 되던 해에는 아버지를 여의었다.
15살이 되던 해인 1883년 나이를 두 살 올려 평안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한 장군은
을미의병운동에 자극을 받아 1907년 함경북도 갑산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한일강제병합 후에는 만주로 건너가 독립군을 조직해 국내 일본군을 수차례 급습했다.
홍범도 장군은 대한독립군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며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일제강점기 30여 년을 일관되게 무장 투쟁을 한 항일투사는 그가 유일하다.
 
홍범도 장군은 한국 독립운동사에 최초의 대규모 승리를 거둔 주인공으로
장군이 이끌던 만주 대한독립군은 1920년 6월6일 오후 1시 중국 지린성 투먼시 인근 봉오동 협곡에서 대규모 전투를 벌였다.
두만강을 넘어 협곡까지 온 일본군 500여 명은 이곳에서 700여 명의 독립군에게 포위당했다.
3시간가량의 전투 끝에 전사한 일본군은 157명. 중상자도 200명이 넘었다. 독립군 전사자는 4명에 불과했다.
그해 10월, 일본군은 보복전에 나섰다. 이때에도 홍 장군은 김좌진 장군과 합세하여 일본군을 대파하였는데,
그것이 유명한 청산리 전투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 사상자는 100여명이나, 일본군 전사자는 2,000여명, 부상자는 1,000여명에 달했다.
 
1923년 소연방의 압력으로 무장단체가 해산되자,
홍 장군은 연해주의 집단농장에서 일하며 한인사회를 이끄는 지도자 역할을 하였다.
그러다가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이주시기에 크질오르다로 이주됐다.
이곳에서 홍 장군은 낮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밤에는 고려극장의 경비로 일했다.
홍범도 장군은 쓸쓸한 말년을 보냈으며 그리던 중 광복을 보지 못한 채 1943년 10월 25일, 76세로 세상을 떠났다.  
 홍범도 장군은 일본군이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 부를 만큼 공포의 대상이었고,
실제로 수십 차례 전투에서 일본군을 무찔렀지만 가족들의 희생도 컸다.
장군의 부인은 일본군에 붙잡혀 고문으로 숨지고 장남은 전사하고 차남은 전투 중에 병사하였다.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인은 9만 5천여 명에 이른다.
이들 고려인들은 크질오르다, 알마티, 카라간다, 심켄트 등 15개 도시로 분산됐다.
고려인이 가장 많이 이주된 곳은 크질오르다로 3만 5천여 명이다.
크질오르다는 붉은 도시라는 뜻으로 1925년부터 1929년까지 4년 동안 카자흐자치공화국의 수도였다.
이곳으로 이주한 고려인들은 고려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새로운 한인사회를 건설했다.
오늘날 고려일보의 전신인 '레닌기치', 고등교육기관인 '크질오르다 사범대학'과
한국어 공연으로 유명한 '고려극장' 등이 모두 이곳에서 우리의 정체성을 보전하며 한인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였다.

고려인 이주의 가장 큰 이유는 중앙아시아에서의 식량생산 증대다.
이곳에 정착한 고려인들은 성실하게 황무지를 개척했으며
그 결과, 크질오르다는 카자흐스탄 농업생산의 모범사례로 꼽히고 있다.
1970년까지 카자흐스탄의 고려인 노동영웅은 모두 67명인데 이중에서 크질오르다 출신은 32명에 달한다.
연해주를 떠난 고려인들에게 크질오르다는 제3의 고향이었던 것이다.
 
크질오르다 시내에 구 중앙공동묘역의 홍범도 장군의 묘역에는
한글로 '통일문'이라 쓰여진 입구가 있고 한국식 정자가 있다.
통일문을 열고 들어가니 홍범도 장군의 흉상이 우뚝 서 있다.
흉상 왼쪽에는 '다시는 반복되지 않기를…'이라고 새겨진 문구가 쓰여있어
아픈 역사에 대한 홍범도 장군의 염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크질오르다 중앙공동묘역에 있는 홍범도 장군 동상과 홍범도 거리
 
 
 
홍장군의 흉상 옆으로는 한글학자 계봉우의 흉상도 있다.
계봉우는 '뒤바보'라는 필명으로 독립운동의 혼을 불어 넣었고
크질오르다로 이주하여서는 한글로 교재를 만들고 교육시킨 인물이다.
흉상에 인사를 드리고 묘역을 찾아가려고 했지만 잡초와 갈대가 가득해 묘역은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막 한가운데 잠든 홍범도 장군의 묘는 관리가 되지 않은 채 방치되어 있다.
묘소에서 2Km 정도 떨어진 곳에 '홍범도의 거리'가 있다.
1994년 고려인들의 청원을 카자흐스탄 정부가 받아들여 홍범도 거리로 명명되었다.
거리에 가보니 집집마다 홍범도라는 이름으로 집주소가 새겨져 있다.
먼 이국땅에서 인정받는 독립운동가의 모습이 뿌듯하기도 하지만
방치되어 있는 홍범도 장군의 묘소를 보면서 죄송하고 부끄러운 마음이 더 앞섰다.
이제 홍범도 장군의 유해 봉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할 시점이 아닐까?
아니 많이 늦었다. 늦게라도 홍범도 장군이 조국의 품에서 잠들 수 있게 많은 분들의 관심을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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