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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4호] [나의 회고록] 원주는 어떻게 70년대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나?
등록자 황진영 등록일자 2018.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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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주는 어떻게 70년대 민주화의 성지가 되었나?
 
 
 
 
 
                              글. 김영주 무위당민인회 고문
                        

1960년대 4·19 혁명 국면에서 마산·부산이 민주화의 발원지로, 1980년대 광주민주항쟁 이후 광주가 민주화의 성지로 평가된다면 1970년대 유신체제에 항거한 민주화의 성지는 단연 원주였다. 박정희 유신독재 시절 서울의 동쪽 변방에 위치한 원주는 민주화에 대한 염원을 강렬한 행동으로 실천한 민주화 역사에 길이 남을 저항의 도시였다. 원주가 민주화의 성지로 부상된 데는 천주교 원주교구장 지학순 주교와 재야 세력을 아우르며 민주주의의를 위해 헌신한 무위당 선생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민주화운동의 도화선 부정부패규탄 대회
 
 
원주 민주화운동의 발화점은 1971년 10월 5일 원동성당에 있었던 부정부패규탄대회였다. 부정부패 규탄의 대상은 원주MBC였다.
5·16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자마자 5·16장학재단 설립을 계획했다. 1962년에 박정희 군부는 부산지역 기업인 김지태 삼화그룹 사장을 부정 축재자로 몰아 구속시킨 뒤 그가 설립한 부산일보와 부산문화방송 주식 100%, 부산 서면 일대 금싸라기 땅 10만 평, 그리고 부일장학회의 경영권을 국가에 헌납하겠다는 각서를 쓰게 한 뒤 풀어줬다. 한마디로 국가권력에 의한 강탈이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5·16장학회였다(박정희가 죽고 전두환이 집권한 뒤 1984년에 5·16장학회는 정수장학회로 이름을 바꾸고 1994년부터 2005년까지 박근혜가 12년간 이사장을 지냈다.)

5·16장학회는 박정희 측근인 대구사범 동창들과 친인척이 장악했다. 5·16장학회는 이들의 권력 놀이터였다. 원주 문화방송이 설립된 1970년에 5·16장학회의 이사장은 육영수 동생의 남편 조태호였는데 그는 문화방송 이사를 겸임하고 있었다. 실로 막강한 권력이었다. 문화방송 사장은 대구매일신문 주필을 지낸 박정희 친구 최석채가 맡고 있었다.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원주에 방송국을 설립하자는 움직임은 1969년부터 일기 시작했다. 로마에 유학했을 때 유럽 매스컴의 위력을 실감한 지학순 주교는 원주 교구장으로 취임한 후 교회가 방송을 통해 사회 참여를 하는 것도 바람직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역 문화방송 허가권을 갖고 있었던 5·16장학회에서는 원주교구에 원주MBC를 공동으로 설립하자고 제안했다. MBC 서울 본사에서 60%의 자본을 투자하고 원주교구에서 40%를 투자하기로 약속하고 원주MBC 설립에 착수했다. 방송국을 설립하는데 총 3천만 원이 필요했다. 원주교구는 5·16장학회의 방송국 설립권을 인정해 1천7백만 원을 투자하고 MBC 본사는 1천3백만 원을 내고 1970년 9월 10일에 원주 가톨릭센터 건물에 원주MBC를 개국하여 지역 라디오 방송을 시작했다. 초대 사장은 박정희가 지목한 이양호라는 인물이었다. 그런데 방송국을 개국한지 2달 뒤에 문제가 터졌다.
 
 
원주문화방송은 원주가톨릭센터에서 개국했다.
 
 
1970년 11월, 필리핀에서 열린 아시아주교회에 참석한 지학순 주교가 여러 나라 신부들과 대화 하던 중 “원주교구에서 방송국 설립했는데 MBC 본사에 10만 달러 줬다”고 말했다. 필리핀 신부들이 깜짝 놀라면서 10만 달러면 라디오 방송국 2개를 만들 수 있는 돈이라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지 주교는 뭔가 속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귀국하자마자 원주MBC에다 돈을 어떻게 썼는지 회계장부를 보자고 요구했다. 무소불위의 정권을 등에 업은 5·16장학회에서는 강원도 촌놈들이 감히 어디다 대드냐면서 서류 한 장 내놓지 않고 무시했다. 불의를 참지 못하는 성격인 지학순 주교는 서울 MBC 본사에 가서 사장 면담을 신청했다. 비서실에서는 몇 시간씩 응접실에 앉혀놓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사장을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나중에 원주교구에서 외부에 원주 MBC 회계감사를 맡겼는데 조사해보니 최소한 3백만원 이상의 돈이 7개월 동안 방송과 관련 없는 곳에 유용되었음이 밝혀졌다. 그뿐만이 아니라 원주MBC가 원주교구에서 투자한 돈으로만 설립되었다는 것이 드러났다. 서울 MBC 본사에서 투자했다는 자본금 60%는 허수였음이 들통났다. 원주교구청은 즉각 청와대에 진정서를 넣었다. 며칠 지나서 박정희가 측근을 시켜 지 주교에게 답신을 보냈는데 5·16장학회에서는 한 푼도 해먹은 게 없다는 거였다. 더욱 가관인 것은 5·16장학회의 협박성 발언이었다. 원주교구에서 계속 따지고 항의하면 천주교 지분을 다른 종교단체에 팔아버리겠으며 방송국을 설립하기 위해 지학순 주교가 외국에서 원조 받은 10만 불은 정부에 신고된 것이 아님으로 지 주교를 외환관리법 위반으로 구속시킬 수도 있다고 했다.
 
 
천주교 원주교구 민주화운동의 횃불을 들다
 
1971년 10월 5일 오후 7시 30분, 원주교구 주교좌 성당인 원동성당에서 스무 명 남짓한 사제들과 평신도 1천 5백여 명이 모여 원주MBC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열었다. 지 주교가 부정부패 일소를 위한 특별미사를 집전하기 위해 성당 안으로 들어갔을 때 성탄절보다도 더 많은 신자들이 성당을 메우고 있었다.     
1부 미사에서 지 주교는 “우리가 이렇게 당할 때 일반 국민에 대한 권력의 횡포는 얼마나 심하겠는가. 이제부터는 근본적인 문제를 갖고 싸워야 한다”고 강론을 했다.
미사가 끝난 후 부정부패 규탄 궐기대회를 열었다. 국회와 정부에 보내는 결의문이 낭독되었다. 성명서에는 “권력만 믿고 부정부패를 일삼는 악과 불의의 표본인 5·16장학회와 이들을 비호하는 권력은 정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아야 한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미사가 끝난 뒤 “부정부패 뿌리 뽑아 사회정의 이룩하자‘는 플랭카드를 들고 원동성당을 나와 가두시위에 나섰다. 지학순 주교와 사제들이 앞장서고 평신도 천 5백여 명이 그 뒤를 따랐다. 이 땅에 정의가 살아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행진이었다. 그러나 권력의 하수인들이 생각하기에 강원도 원주라는 촌에서, 그것도 세상일에 초연한 성직자들이 신도들을 이끌고 데모를 한다는 것은 무모하면서도 철모르는 행동으로 여겨질 뿐이었다. 그때까지 감히 어느 누구도 박정희의 공포정치에 대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박정희가 집권한 뒤 천주교가 데모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천주교 원주교구 사제단의 부정부패 규탄 가두시위(1971년)
 
 
시위대가 원동성당을 출발해 KBS 원주방송국 4거리까지 진출했을 때 경찰이 막아섰다. 원주경찰서장이 지 주교 앞으로 오더니 “주교님 저를 밟고 가십시오”라고 하면서 주교 앞에 엎드렸다. 경찰서장이 “나를 밟고 가라’고 하니 주교님과 데모를 처음 해본 시위대가 당황했다. “비켜라!”, “절대 안된다”면서 옥신각신하다가 시위대는 성당 안으로 돌아왔다. 지 주교가 물러서서 가만히 생각해보니까 이렇게 경찰 사정을 봐줘선 일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경찰이 물러간 뒤에 다시 나와서 로타리까지 진출했다.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엉성하기 짝이 없는 시위였다. 생전 처음 데모를 하는 신부들 뒤에서 데모를 주도한 사람들은 원주에 와 있던 김지하, 박재일 등 서울대 문리대에서 데모를 해봤던 친구들이었다. 경찰이 다시 출동해 행진을 막자 시위대는 그 자리에서 농성을 하면서 “부정부패 추방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원주교구의 부정부패규탄시위는 언론에 전혀 보도되지 않아 국민들은 그런 일이 있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천주교 신자들과 대학생들의 입을 통해 원주에서 큰 시위가 있었다는 것이 전국에 알려졌다. 이때부터 원주는 민주화의 도시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지학순 주교는 부정부패규탄대회의 여세를 몰아 사회적 발언을 확대해나갔다. 71년 성탄절에 사목교서를 발표하여 소수 특권층의 부정부패와 인간의 양심과 도덕을 짓밟는 정권의 폭력성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1973년 새해에 발표한 사목교서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에서 “올해 우리 교구의 활동 목표를 사회정의 실천으로 설정하고 나는 사회정의 실현을 의해 불의한 세력과 싸우는데 신명을 바치겠다”고 말했다. 지학순 주교가 시국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된 데는 무위당 선생은 귀중한 조언이 있었다.
 
무위당 휘하의 민주화 운동 그룹 원주캠프
 
천주교 원주교구에는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을 존경하는 유능한 젊은이들이 많이 모여들었다. ‘70년대 원주’, ‘80년대 광주’라고 할 정도로 70년대 초반 원주에는 ‘원주캠프’라고 불린 무위당 선생 휘하의 막강한 재야 인맥이 형성되었다. 원주가 재야 민주세력의 구심점이 된 연유에는 대학 졸업 후 부모님이 있는 원주로 내려와 원주 가톨릭센터 기획위원으로 일하면서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의 일을 도우며 서울의 민주인사들과 교류를 하고 있었던 김지하 시인의 역할이 컸다. 김 시인은 원주 학성동 산언덕에 있는 주교관과 이웃해 살면서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의 사랑과 보살핌을 받았다.
 
무위당 선생과 김지하 시인
 
원주 가톨릭센터가 준공된 이후 원주교구 차원에서는 교구를 대표해서 성명서라든지 문서를 제대로 쓸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주교님은 그 일을 김지하 시인에게 맡겼다. 원주교구는 김 시인에게 기획위원이란 직책과 함께 월급도 주었다. 1982년 37쪽 분량의 원주교구 사회개발위원회 지침서인 ‘삶의 새로운 이해와 협동적 삶의 실천’이란 명문장은 김지하의 주도로 만들어진 글이다. 70년대 초에 김지하가 구속돼 재판을 받았을 때 재판장이 직업을 묻자 “천주교 원주교구 기획위원”이라고 대답했다. 김지하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민주투사로 전 세계에 알려져 있었는데 그가 가톨릭 소속 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사르트르를 비롯한 세계적인 문인들이 “한국 정부는 민주주의뿐만 아니라 종교도 탄압한다”고 비판했다. 이렇다보니 원주교구를 감시하는 정보부 요원들은 죽을 맛이었다. 중앙정보부 원주분소에 있는 요원이 나를 찾아와 “제발 김지하가 원주교구 기획위원이라는 말을 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부탁을 할 정도였다. 그러면 나는 호통을 치며 “자신이 소속된 직장의 직함을 얘기하는 것이 뭐가 잘못됐냐?”고 말했다. 원주교구의 내 사무실에는 김지하 외에도 김헌일이라는 서울 상대 출신의 걸출한 청년이 함께 일했다. 김헌일은 대학 재학 시절에 한국의 무역 실무 관한 책을 냈고 영어에 능통해 외국 서적과 영어 자료를 한글로 번역해 주교님과 무위당 선생에게 제공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전표열 아우는 국문학을 전공한 문학도로 원주교구 교육원에서 근무하면서 필력이 뛰어나 원주 MBC에서 방송한 ‘오늘의 명상’이라는 가톨릭 선교방송 원고를 쓰는 일을 맡아서 했다. 1972년 남한강 유역 대홍수 피해 복구와 구호사업을 위해 설립한 재해대책사업위원회와 70년대 말에 만든 사회개발위원회에는 뛰어난 역량을 지닌 인재들이 많이 몰려들었다. 서울 유명대학의 교수들도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의 요청이라면 거절하지 않고 달려와 강연을 하고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협동조합에 관해서는 이우재 선생과 건국대 김병태 교수, 노동문제에 대해서는 노동문제연구소의 김금수, 곽창렬, 이상호 선생 등이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원주교구에서는 의식 있는 지식인들과 성직자들을 원주로 초대해 시국 문제에 대해 토론했는데 그때 원주를 찾은 인사로 김찬국 연세대 교수와 이문영 고려대 교수, 박형규 목사 등이 있다.
 
민청학련 사건과 독재에 대한 선전포고
 
1974년 4월 3일 밤 10시에 박정희는  대통령긴급조치 제4호를 발표했다. 긴급조치 4호는 일체의 민주화운동을 제압을 할 수 있는 광범위하고 강력한 조치로 민주인사들을 최고 사형에 처할 수 있는 공포정치의 하나였다. 유신정권은 민청학련이라는 조직을 지어내어 반독재 투쟁을 주도하던 학생운동 지도자와 종교계, 학계 인사들을 국가 반란과 공산혁명을 획책했다는 혐의를 씌워 대거 구속했다. 유신정권은 민청학련의 활동 자금이 북한에서 유입된 공작금으로 몰아갔다. 김지하, 이철, 유인태 등 무위당과 교류하던 대학생들과 민주인사들이 재판에서 사형 선고 받았다. 
 


민청학련 사건을 보도한 신문기사
 
법정의 민주인사들
 
이제야 비로소 말하지만 민청학련 사건이 있기 전에 박 정권이 일망타진으로 삼은 것은 무위당 선생을 주축으로 한 원주캠프였다. 박정희 독재정권은 원주를 인혁당 같은 방식으로 엮어 원주의 민주화 진영 세력을 뿌리째 뽑아버리려고 했다. 정보부에서 지목한 인물은 지학순, 장일순, 김지하 이창복, 나 이렇게 다섯 명이었다. 그런데 이 정보가 밖으로 새어나와 무위당 선생의 귀에 들어왔다. 정보부의 공작이 실패한데는 무위당 선생의 공이 컸다. 박정희 정권이 원주의 민주화 세력을 초토화시킬 음모를 꾸미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무위당 선생은 정권과 밀착되어 있는 원주 지역의 토호들을 만나 정보를 흘렸다. 원주 지역 유지들은 대부분 여당인 공화당에 관련된 사람들이었는데 무위당 선생의 얘기를 들은 토호들은 경악했다. 잘못하다간 원주가 쑥대밭이 될 거라는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원주의 유지들이 정권 핵심 인사를 만나 적극적으로 우리들을 변호했다. “지학순 주교는 빨갱이가 아니다. 그는 공산당이 싫어서 월남한 사람이고 <경향잡지>에 2년 동안 ‘내가 겪은 공산주의’라는 제목의 글을 연재하기도 했다. 이 글에는 북한에 돌아가 고향에서 사목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는데 이렇게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지학순 주교에게 어쩌자고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씌우려고 하느냐?”며 항의했다. 지역 유지들은 무위당 선생에 대해서도 “그 분은 원주 시민들이 존경하는 인물로 절대로 빨갱이가 아니다”라고 변호했다.
“장일순은 공산당이 가장 싫어하는 지주의 아들이다. 그 집안은 교육에 관심이 많아서 원주초등학교 세울 때 장일순의 조부가 땅을 기증했다. 또 장일순은 사재를 털어 대성학교를 세운 사람이다. 장일순을 당신네 정권이 감옥에 가둔 적도 있지 않냐? 당신들이 이 사람들을 잡아가면 원주 시민들이 들고일어날 거다”며 정권을 설득했다. 무위당 선생과 지학순 주교를 앞장서서 변호한 분이 옥로양조장 대표이며 공화당 강원도당 부책임인 이지연 씨였다. 박정희 정권의 원주 공작이 수포로 돌아간 데는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이 지역에서 존경받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1974년 민청학련 사건으로 민주인사들과 대학생들이 대거 체포되었을 때 무위당은 시태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음을 직감했다. 법정에서 학생들에게 사형을 언도한 폭압정권이 이번엔 정말로 사형을 시킬지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위당은 옥에 갇힌 학생과 민주인사들을 생각하며 밤마다 통곡을 했다. 이젠 죄없는 이들을 살리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한다고 결심했다. 밤새 고민한 끝에 무위당은 지학순 주교가 나서줘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때 지 주교는 원주에 없었다. 지학순 주교는 대만에서 열린 아시아주교회의와 필리핀에서 열린 매스컴위원회 회의에 참석하고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독일에 갔을 때 신문보도를 통해 민청학련 사건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무위당은 지 주교가 일본에 도착했을 때 사람을 보내 “민청학련 관계자들에게 씌워진 공산주의라는 누명을 주교님이 벗겨주시는데 나서주셔야 겠습니다”는 전갈을 전했다. 지 주교는 외신 기자회견을 갖고 자신이 김지하를 비롯한 민주인사들에게 자금을 댔다고 말함으로써 민주화운동 자금을 북한의 공작금으로 몰아가는 공안당국의 흑색선전에 맞섰다. 지 주교는 “학생들에게 돈을 준 것은 나다. 그러나 그것은 민주화를 위한 활동자금이었지 공산주의 단체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기자회견을 한 다음날 지 주교님이 귀국하는 즉시 체포될 거라는 정보가 흘러들어왔다. 내가 아침 일찍 주교님에게 국제 전화를 걸어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귀국하시지 않는 게 좋겠다”고 말했다. 당시 국내 민주화 진영에서는 지주교님의 귀국에 대해 찬·반 의견으로 나뉘어 있었다. 주교님이 귀국을 잠시 보류하고 상황을 지켜보자는 의견과 주교님이 귀국해서 사실을 밝혀야만 김지하를 비롯한 민청학련 관련자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의견으로 갈려 있었다. 주교님은 체포되는 일이 있어도 귀국하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1974년 7월 6일 김포공항에 도착한 주교님은 중앙정보부 요원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주교님의 연행 소식을 전해들은 원주교구는 발칵 뒤집혔다. 원주교구청에서는 교구장의 불법 연행 사실을 전국의 교회에 알리고, 주교단 상임위원회를 소집하기로 전문을 띄웠다. 주교님이 연행된 이틀 뒤인 7월 8일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김수환 추기경을 찾아와 주교님의 거처를 알려주었고, 추기경은 지 주교를 면담했다. 그날 오후 6시에 김 추기경은 박정희와 독대했고, 지 주교는 밤 8시경에 남산 중앙정보부에서 풀려나왔다. 지 주교의 주거는 명동 성바오로 수녀원으로 제한되었다. 몸이 많이 쇠약해진 주교님은 며칠 후 후암동에 있는 동생 지학삼씨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기관원의 감시가 하도 심해 다시 명동 성모병원으로 옮겼다. 감옥에 있는 김지하 시인의 어머니 정금성 여사와 구속된 민주인사 가족들이 병원으로 찾아왔다. 주교님은 “고통을 받는 이들과 같은 십자가를 등에 지고 가겠다”면서 구속자 가족을 위로해주었다. 비상 군법회의는 7월 23일 오전까지 법정으로 출두하라는 소환장을 보냈다. 지 주교는 변호사를 불러 유신헌법과 대통령 긴급조치를 비판하는 선언문을 작성하고 23일 오전에 계단을 통해 몰래 병실을 빠져나와 병원현관에서 김수한 추기경과 윤공희 대주교가 지켜보는 가운데 기자들 앞에서 “본인의 양심과 하나님의 정의가 허용치 않아 비상군법회의 소환에 불응한다”는 ‘양심선언’을 했다.

 
김수환 추기경(가운데)이 참석한 가운데 양심선언하고 내외신 기자회견하는 지학순 주교
 
양심선언에서 지 주교는 “비상군법회의의 어떠한 절차가 공포되더라도 그것은 본인이 스스로 출두한 것이 아니라 폭력으로 끌려간 것임을 미리 밝혀둔다”면서 “유신헌법은 민주헌정을 파괴하고 폭력과 공갈과 국민투표라는 사기극에 의해 조작된 것이기 때문에 무효이고 진리에 반대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자회견을 마친 지 주교는 명동성당으로 자리를 옮겨 미사를 집전했다. 미사가 끝난 뒤 주교님은 곧바로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었다. 뒤이어 원주교구 신부들도 연행됐다. 7월 16일 박 정권은 지 주교를 내란선동 및 긴급조치 1·4호 위반 혐의로 정식 기소했고, 8월 12일에 열린 비상군법회의 3차 공판에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 받고 법정 구속 되었다. 지학순 주교를 구속은
전국의 교회를 들끓게 했고 교회는 조직적으로 불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지학순 주교의 투쟁은 한국 가톨릭의 전환점이 됐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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