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70호] 한국 농촌운동에 바친 30년의 삶 -故 한마리아 선생을 추모하며
등록자 교육담당 등록일자 2020.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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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농촌운동에 바친 30년의 삶
-故 한 마리아 선생을 추모하며
 
 글. 김찬수 (사)무위당사람들 상임이사
 
 
(사진제공 - 가톨릭농민회)
 
지난 1월 8일, 천주교 대전교구청의 교육관인 대철회관에서 20여일 전에 타계한 독일 여성의 명복을 비는 추모회가 열렸다.
80여 명에 달하는 추모객들은 대부분 일흔이 훌쩍 넘은 노인들이었다. 참석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천주교 초대 안동교구장을 지낸 두봉 주교와 최기식, 문규현 신부, 온 생애를 민주화운동과 농촌운동에 바친 민주인사들과 농민운동가들, 여성의 권익을 위해 헌신해온 여성운동가 등 불의가 득세했던 엄혹한 시절에 민주와 인권, 정의를 위해 투쟁한 분들로, 수십 년의 세월의 강을 지나 백발이 성성한 노인들이 되었지만, 주름진 얼굴에선 백전노장의 당당한 기품이 형형히 빛나고 있는 어르신들이었다.
영하의 추위도 아랑곳하지 않고 전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어르신들을 추모회장으로 모이게 만든 이 여성은 누구일까? 지난 12월 13일 여든한 살의 나이로 타계한 독일 여성 한 마리아 선생(1939~2019)이다. 본명은 마리아 사일러(Maria Sailer)였지만 독일 이름보다 ‘한애라’라는 한국 이름으로 불리기를 좋아한 그에게 대한민국은 또 하나의 조국이었다.
 
한마리아 (Maria Sailer)
사진제공 : 가톨릭뉴스
한 마리아 선생은 30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농촌운동과 여성운동을 후원하였고,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이 펼쳤던 재해대책사업과 협동조합운동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독일에서 장례가 끝나고 며칠 뒤에 마리아 선생이 활동했던 한국가톨릭농민회에 알려졌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농민회에서는 장례식에 참석하지 못한 안타까움 함께 한 마리아 선생을 기억하기 위해 추모회를 마련한 것이다.
 
농촌운동을 후원한 30년의 삶
 
1939년에 독일 남부 남부 레겐스부르그 인근 하팅에서 태어난 한 마리아는 1964년에 뮌헨공대 농학과를 졸업하고 그 이듬해에 한국으로 왔다. 그가 한국에 오게 된 동기는 독일 탄광에 일하러 온 한국 광부들을 알게 되면서부터였다.
 
“대학에서 농학을 전공하면서 농촌문제에 관심이 많았어요. 졸업할 무렵에 탄광에서 일하는 한국인 광부들을 알게 되었는데 모두들 똑똑하고 성실한 분들이었어요. 광부 중에는 대학을 나온 엘리트들도 있었는데 이런 분들이 독일까지 와서 탄광에서 일하는 걸 보고 무척 놀랐어요. 속으로 한국이 무척 가난한 나라인가보다 라고 생각했지요. 그 당시에 고등학교 졸업 이상의 학력을 지닌 독일 남자들은 탄광에서 일하기를 꺼려했거든요. 그때부터 한국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텔레비전에서 한국에 관한 뉴스가 나오면 유심히 보았죠.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학생들의 데모를 뉴스에서 많이 보았던 것 같이요. 3년 계약이 끝난 광부들이 한국으로 돌아가면서 ‘마리아 같이 한국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 한국에 와서 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애기를 했는데, 저도 한국 농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게 동기가 된 거죠.”(2011년 무위당사람들 인터뷰 중에서)
 
1965년에 한 마리아는 한국 농민단체의 어려움을 해결코자 하는 왜관 베네딕도수원의 오도하스 아빠스 원장의 추천으로 한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말도 모르고 한국 농촌 상황이 어떤지도 모르는 스물일곱 살 독일 여성의 한국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에게 한국의 모두 것이 낯설었다. 사람들의 말과 얼굴빛만이 아니라 바람결과 흙내음도 독일 고향과는 사뭇 달랐다.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도 끼니를 해결하는 것조차 힘겨운 농민들의 생활을 눈으로 보면서 자신을 이 땅으로 오게 한 것은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생각했다. 가난한 농민들과 함께 살면서 농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있도록 자신의 젊음을 바치리라 결심했다.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낯설게만 느껴졌던 한국의 농촌이 정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처음 한국에 와서 경상도 구미에 있는 농촌에서 일했어요. 시골길이 좁고, 도시에는 상점보다 간판이 크고, 여성들의 치마저고리가 참 인상적이었어요. 독일에서는 식물원에서나 구경할 수 있는 은행나무를 한국에선 어디서나 구경할 수 있고, 더욱이 초가집은 너무나 아름다웠어요."(‘한국가톨릭농민회 50년사’ 중에서)
 
한마리아는 한국에 와서 편안한 길을 가지 않았다. 가난하고 힘겨운 삶을 사는 농민들과 함께 했고, 독재에 맞서 싸우는 이들을 응원했으며, 늘 외롭고 억울한 사람 곁에 있었다. 그는 한국가톨릭농민회의 전신인 가톨릭농촌청년회(JAC)에서 국제대외업무를 담당하며 국내외 운동단체와의 연대활동을 활발히 추진했다. 일과가 끝나면 자신이 만든 미취학 여성들을 위한 야학 ‘천사의 모후’에서 야간학교운동과 농민교육을 실시했다. 1968년부터 1984년까지 가톨릭농민회의 국제부장, 여성부장으로 활동할 때는 함평고구마사건(77년), 안동 오원춘사태(79년), 광주항쟁(80년), 미문화원 방화사건(82년) 등 탄압받는 운동단체의 일을 도왔다. 독재정권은 늘 그를 감시했고 추방하겠다는 위협을 서슴지 않았지만, 각종 고초를 겪으면서도 꿋꿋이 농민운동과 민주화운동을 지원했다.
“마리아 선생은 처음엔 가톨릭농촌청년회에서 자원봉사자로 일을 했습니다. 정말 헌신적으로 봉사를 하셨습니다. 나중에는 가톨릭농민회 여성부장과 국제부장을 역임하셨어요. 1975년에 가톨릭농민회에서 정부 수매 가격이 제대로 생산비를 보장하는지 알아보기 위해 실시한 쌀 생산비조사사업에도 참여하셨어요. 가톨릭농민회 초창기에 큰일을 하신 거지요. 한 마리아 선생은 군사독재시절에 농민회가 탄압을 받았던 암울한 시대에 이 땅에 농민운동을 활성화시키고 농민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노력하신 분이셨습니다. 우리들이 군부독재와 시퍼렇게 싸울 때도 우리를 후원하고 힘을 주신 분입니다. 그런 토대가 없었다면 농민회가 조직의 기초를 다지고 확산시키는데 힘이 모자라 어려웠을 겁니다.”(이길재 초대 가톨릭농민회장)
 
원주 재해대책사업을 지원하며 무위당과 친분을 쌓아
 
한 마리아가 원주와 관계를 맺게 된 것은 1973년경 독일 미세레오(Misereor)재단의 지원으로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재해대책사업을 할 때였다. 재해대책사업위원장이었던 김영주 선생은 한 마리아아에게 미세레오 재단에 보낼 보고서를 영문과 독일어로 작성해달라고 부탁했다. 이때부터 한 마리아는 1994년에 독일로 귀국할 때까지 원주와 깊은 관계를 지속하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이 주도했던 원주의 재해대책사업은 당국의 철저한 감시를 받고 있었다. 모든 서류작업은 비밀리에 진행되었다. 원주캠프로부터 독일에 보낼 보고서를 만들어달라는 부탁을 받으면 일과를 끝내고 한 밤중에 원주로 달려와 새벽까지 불을 밝히며 일했다. 밤을 새워 만든 보고서는 정보부 요원들의 감시를 피해 독일로 보내졌다. 한 마리아는 무려 18 년 동안 원주교구의 일을 비밀리에 도왔다.
“원주에서 농민운동, 광산 노동자운동을 많이 했는데 그 일을 할 때 정보기관에서 하도 못살게 굴어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어요. 그런 일들에 대한 계획을 진보성향을 대학 교수들이 몰래 도와주었습니다. 건국대 농촌문제연구소의 김병태, 이우재 교수와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의 이문영 교수 같은 분들이 계획을 짜주면 계획서를 번역해서 독일에 보내 원조를 받게 해준 분이 한 마리아 선생입니다. 원주에서 한 일의 절반 이상은 한 마리아 선생이 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김영주 무위당사람들 고문)
 
70년대에 재해대책위원회에서 농촌 상담원으로 활동하면서 가톨릭농민회 강원지구회장을 맡았던 김상범 선생(전 무위당을기리는모임 부회장)은 한 마리아를 이렇게 회고했다.
“지학순 주교님이 급하게 해외에 보낼 문서를 만들어야 하면 김영주 회장님 편으로 마리아 선생에게 도움을 요청했어요. 그러면 기차나 버스로 원주에 오셔서 밤을 새워 문서를 번역하는 작업을 해주셨어요. 원주에서 하루 이틀 묵어야 할 경우에는 주교관에서 수녀님과 함께 주무시기도 했고 원주교구청에 근무하는 여직원 집에서 지내기도 했어요. 우리 집에서도 하룻밤 묵은 적이 있어요. 마리아 선생은 평범하게 사는 집에 가서 자기도 하고 밥도 먹으면서 흉허물 없이 지내며 정을 나누었지요.”
 
 
원주를 오가면서 무위당 선생을 알게 된 한 마리아는 만나자마자 무위당 선생을 존경하게 되었다. 그가 2011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계간지 ‘무위당사람들’과의 대담에서 소개한 무위당 선생에 대한 일화 한토막이다.
“선생님을 처음 만났을 때 인상이 너무 좋으셨어요. 제가 농민운동을 하는 것을 아시고는 매우 기뻐하시면서 ‘농자성군(農者聖君)’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제가 한문을 모른다고 하니까 ‘어, 그렇겠네’ 하고 웃으시면서 ‘농부는 자연과 제일 가까이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매일 먹는 식량을 생산해주는 농부가 없다면 우리의 생명은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까 농사짓는 사람들 진짜 사랑해야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원주가톨릭센터에서 선생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는데 칠판 가득 한문을 쓰시면서 말씀하셨어요. 저는 한문을 읽을 줄 모르는데 옆에 앉아있는 박재일 회장이 눈이 안 좋아 글씨가 보이지 않는다면서 자꾸만 나에게 칠판에 쓴 한자가 뭐냐고 묻는 거예요. 저는 한문을 아예 모르지요, 박재일 회장님은 글씨가 보이지 않지요, 서로 답답해하면서 얼굴을 쳐다보며 웃었어요. 무위당 선생님의 강연을 들으면서 놀란 것은 무위당 선생님은 사회 활동에 제한을 받으셨잖아요. 그런데도 세상 돌아가는 일을 너무 잘 아시는 거예요. 세상일에 해박하시고 깊이 생각하시는 것을 보면서 놀랐어요.”
 
여성 지도자 양성과 신협운동에 앞장서
 
원주 지해대책위원회 활동을 지원하면서 한 마리아가 가졌던 가장 큰 불만은 지역사회운동의 주축이 남자들 일색이라는 점이었다.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점을 지적했다. 사회운동은 남녀가 섞여서 일을 해야 하고, 여자들의 목소리가 반영돼야 균형이 맞고 평등한 사회를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면서 여성들의 능력을 개발하기 위한 운동을 원주에서 펼쳐나갈 것을 주문하기도 했다.
김영주 고문의 말이다. “마리아 선생은 남자들이 사회운동의 지도자를 맡고 있으면 남녀평등은 요원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래선지 1970년대 중반에 원주교구에서 파독 출신 간호사들을 중심으로 벽지보건사업을 할 때는 아이디어를 제공하면서 측면에서 열렬히 지원했습니다, 여성들의 활동에 대해 독일에 전하는 보고서를 쓸 때는 아주 활력이 넘쳤습니다. 저에게 여성들의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을 많이 제안했는데,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 게 미안하고 아쉽지요.”
한 마리아는 우리나라 여성운동의 발전을 위해서도 많은 공헌을 했다.
1984년에 가톨릭농민회를 나와 1994년 독일로 돌아가기 전까지 독일 아데나워 재단의 한국 주재원으로 일하며 한국여성민우회, 여성사회교육원 등을 국제적, 재정적으로 지원했다. 우리나라 여성학의 이론을 확립하고 여러 여성단체들을 이끌어나간 여성운동의 대모 이효재(전 이화여대 교수) 선생을 비롯하여 한명숙(전 국무총리), 지은희(전 여성가족부장관) 등 한국의 여성 지도자들과 교류하면서 유럽의 여성운동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였고, 아데나워 재단과 연계하여 여성 지도자들의 유럽 연수를 주선해 한국의 여성운동가들이 견문을 넓힐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었다. 이뿐만 아니라 한 마리아는 한국의 농촌 신협운동을 지원하는 사업을 펼치기도 했다. 농촌 신협운동을 추진할 때 사무실을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마침 이경국 전 무위당만인회장이 신협중앙회 사무총장으로 있었고, 김영주 선생이 대전에 있는 신협연수원장을 맡고 있어서 두 분의 도움으로 신협연수원에 사무실을 마련할 수 있었다. 한 마리아는 1994년에 독일로 돌아갈 때까지 농촌 신협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노년에 한국을 방문했을 때 이경국 전 신협중앙회 사무총장과
대화를 나누는 한 마리아
 
한 마리아 선생과 교분을 쌓은 사람들 중에는 독신으로 살면서 한국의 농촌운동과 사회개발 운동에 헌신한 그녀가 한국에서 평생을 보낼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다. 그래선지 1994년에 마리아가 독일로 돌아가겠다는 말했을 때 많은 이들이 놀라워하며 아쉬워했다. 예순을 바라보는 나이가 된 한 마리아도 한국에서 여생을 보내기를 원했다고 한다. 하지만 고향에 홀로 계신 몸이 불편한 어머니를 모셔야만 될 형편이라 독일에 돌아가야만 했다. 독일로 돌아간 한 마리아는 고향 레겐스부르그에서 천주교 공소회장을 지내며 꾸준히 제3세계 가난한 나라의 농촌 지원 활동을 계속했다.
1999년 ‘농업인의 날’에 한 마리아는 정부로부터 한국의 농촌을 위해 애쓴 공로로 산업포장을 받았다. 수상을 위해 서울에 왔을 때 가톨릭농민회원들이 모여 축하를 겸한 환갑잔치를 했다. 2009년에 한 차례 더 왔을 때는 명동에서 칠순 잔치를 했다. 팔순을 맞은 작년에 가톨릭농민회에서 초청해 잔치를 하려고 했지만, 노환으로 건강이 좋지 않아 오기 어렵다는 소식을 받고 많은 이들이 안타까워했다. 나중에 지인을 통해 선생이 살고 있는 마을의 주민들이 천주교 공소에서 팔순잔치를 해드렸다는 얘기를 전해 듣고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잊혀져서는 안 될 한 마리아 선생의 업적
 
한 마리아 선생의 추도회가 열린 대철회관은 초기 한국가톨릭농민회관으로 사용되었던 곳으로 농촌운동에 헌신한 선생의 추억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고인의 명복을 비는 미사는 한 마리아 선생이 가톨릭농민회에서 활동하던 시기에 농촌사목과 정의평화운동에 앞장선 초대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가 집전했다.
 
미사가 끝나고 선생에 대한 회고담이 이어졌다. 가톨릭농민회 동지회 정현찬 회장은 “한마리아 선생은 우리의 스승이자 투쟁의 현장에서는 우리의 동지였다. 군사독재 정권에서 억압받던 암울한 시대에 선생은 이 땅의 농민운동을 활성화한 분, 군부독재 때 곁에서 힘이 돼 준 분, 가난하고 어려울 때 재정지원을 해 준 분”이라면서 “그분이 없었다면 한국 농민의 삶이 지금처럼 성장했을까, 선생은 떠나셨지만 늘 한국 농민의 가슴에 함께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주숙 전 한신대 교수는 “한 마리아는 가톨릭농민회를 나온 뒤인 1990년대에 여성계를 위해 큰 공로를 세웠다. 마리아 선생은 아데나워 재단에서 일하면서 한국 여성들이 독일 연수를 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덕분에 당시 진보적 운동을 하던 여성들이 연구비도 지원받으면서 독일의 사회활동, 여성계, 지방자치를 공부하며 지도자로 성장할 수 있었다 ”고 회고하면서 “한국의 농촌운동과 협동조합운동, 여성운동의 역사에서 선생의 업적이 길이 남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 마리아 선생과 농민운동 함께 한 임봉재 선생(전 한국가톨릭농민회장)이 추모시를 낭독하자 선생과 동고동락하면서 한 시절을 보냈던 어르신들의 눈가엔 이슬이 촉촉하게 맺혔다. 추모식이 끝나고 창밖엔 어둠이 짙게 내렸지만 한 마리아 선생을 추억하는 어르신들의 이야기는 그칠 줄 몰랐다.
 
나를 이 땅에 오게 한 것은 큰 뜻의 부르심이었다
가라,
가서 코리아의 농민들과 함께 살아라
(······)
 
그렇게 이 땅에서
농촌사회의 복음화와
농민의 인간다운 존엄성 회복을 외치며 떨쳐 일어나던
한국 가톨릭농민회의 아낙이 되어 함께 살아온 20녀 년,
가농의 밖에서 지켜온 10년
그 30년의 세월은 지난하였지만 보람과 감사의 길이었고
나의 뜻깊은 한 생이 되었다.
(······)
 
이제 나는 떠난다
육신의 몸을 벗고 이승의 그리운 인연들을 뒤에 두고,
 
그 마지막 길에서 돌아보는
이번 생의 내 기쁨과 보람은
코리아, 그 땅과 그 땅의 농민들과
애환을 함께 나누며 사랑할 수 있었다는 것,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나 또한 그렇게 오롯이 사랑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내 마지막 길의 발걸음을 가볍게 한다.
 
사랑한다
또 하나의 조국 나의 코리아여,
그 땅을 보듬고 생명을 가꾸는 나의 임들이여,
하나님의 생명 평화가 언제나 함께 하소서
그 나라가 여기에 길이 충만하소서
(이병철 시인의 추모시 ‘코리아, 사랑하는 이 땅의 님들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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