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66호] [나의 회고록] 호산나 원주!
등록자 교육담당 등록일자 2019.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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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회고록
 
유신독재에 저항한 민주화 운동의 성지
‘호산나 원주!’
 
글. 김영주 무위당만인회 고문
 
 
지난 호에 박정희 독재정권의 하수인 역할을 한 비상군법회의는 1974년 8월 12일에 지학순 주교를 내란선동 및 긴급조치 위반으로 징역 15년, 자격정지 15년을 선고해 구속시켰다는 내용까지 얘기했다. 1972년에 박정희는 영구집권을 목표로 유신헌법을 통과시킨 후 위수령과 계엄령을 발동해 유신독재에 저항하는 민주인사와 대학생들을 국가 전복을 꾀하는 용공분자로 몰아 군사재판에 넘겨 중형에 처했다. 데모하는 대학에는 휴교령을 내리고 캠퍼스 안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거리 곳곳에선 시민에 대한 검문검색과 불법연행이 일상화 되면서 국민들은 질식할 것 같은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이때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었던 지학순 주교의 구속은 국민들의 분노와 저항을 불러일으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교회의 저항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출범
 
지학순 주교 구속은 원주교구뿐만 아니라 전국의 교회를 들끓게 했다. 주님교의 구속 사태에 직면한 천주교회는 조직적으로 불의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이때 결성된 것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다. 원주교구의 신현봉, 안승길, 최기식 신부는 전국의 성당을 돌며 사제들에게 협조를 호소했다. 교회와 정치는 분리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보수적인 사제들도 지 주교 행동의 정당성에 공감하기 시작했다. 지학순 주교의 석방을 촉구하고, 구속된 민주인사 석방을 위한 기도회가 전국의 성당에서 열렸고, 1974년 9월 23일 원동성당에서 열린 성직자 세미나에 전국에서 300여 명의 사제들이 참석했다. 사제들은 이틀 동안 밤을 새워 시국토론을 한 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출범시켰다. 그 다음날 신도 15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제단은 시국기도회를 열고 원동성당을 나와 가두시위에 나섰다. 원주 시위는 전국 최초로 성직자들이 주도한 가두시위였다. 가두시위는 삼엄한 경찰의 제지로 도심으로 가지 못하고 300m 앞 인동사거리에서 멈출 수밖에 없었지만, 원주에서 정의구현사제단의 민주화 시위는 전국으로 민주화운동을 확산시키는 횃불이 되었다.
 
▲원동성당에서 시국기도회를 마친 뒤 가두시위에 나선 정의구현사제단과 원주시민들(1974년)
 
1970년대 민주화를 외치는 원주의 데모에서 늘 선두에 섰던 두 사람이 있었다. 무위당 선생의 애제자인 덕수칼국수 주인 이긍래와 기독병원 앞에서 천하태평이라는 식당을 운영하는 선종원 아우였다. 그 뒤를 지금은 고인이 된, 한살림 초대 회장을 지낸 박재일 아우와 무위당 선생의 대성학교 제자 최규택이 따랐다. 덩치가 큰 이긍래와 선종원이 선두에서 구호를 외치면 그 뒤에서 원주시민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구호를 따라 외쳤다.
 
가두시위 맨 앞에는 신부들이 섰다. 신부들이 선두에 있으면 원주 시민들이 시위에 대해 신뢰하고, 경찰이 함부로 폭력을 쓰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도 깔려있었다. 성당을 출발해 300미터쯤 행진했을 때였다. 저만치 4거리에서 진압봉을 들고 도로를 막아선 경찰 시위진압대가 눈에 들어왔다. 생전 처음 데모를 해보는 선두의 신부들이 겁을 먹고 주춤거렸다. 선두가 앞으로 나가지 않자 뒤에 있던 이긍래 아우가 크게 소리를 쳤다. “든든한 하나님 빽을 갖고 있는 신부님들이 뭐가 겁나서 걸음을 멈춥니까. 신부님들, 앞으로 행진!” 소리를 지르고는 그 큰 등치로 앞에 서 있는 함세웅 신부와 사제들의 등을 사정없이 앞으로 떠밀었다. 그 바람에 선두에 있는 신부들이 밀려서 앞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연도의 시민들이 “신부님들 용감하다”며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세월이 한참 지난 뒤 어느 모임에서 함세웅 신부가 원주에서의 시위를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난생 처음으로 데모를 해보는 신부들이 시위대 맨 앞에 섰을 때는 솔직히 겁이 났어요. 원동성당 나와 거리에서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는데 얼마 못가서 경찰 병력과 마주쳤어요. 확성기에서 ‘해산 않으면 강제로 진압겠다’며 겁을 주는데 다리가 후들거리면서 더 이상 전진할 용기가 나지 않는 거예요. 그때 누군가 뒤에서 ”앞으로 행진!“하면서 등을 사정없이 떠미는 거였어요. 그러니 앞으로 나갈 수밖에요. 사제들이 시위하는 방법을 원주에서 처음 배웠어요.”
원주에서 시위를 마친 정의구현사제단은 3일 뒤인 9월 26일에 서울 명동성당에서 유신헌법의 철폐와 민주헌정 회복을 내세운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미사를 마친 뒤 사제들은 신도 2000여 명과 함께 십자가를 앞세우고 명동성당을 나와 가두시위에 나섰다. 보수적인 가톨릭교회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은 지학순 주교의 강력한 우군인 동시에 암울했던 70년대 국민들의 희망이자 민주주의의 등불이었다. 이때부터 정의구현사제단이 모이는 명동성당은 민주화운동의 집결지가 되었다.
 
 
민주화운동의 여정에 함께 한 사람들
 
원주에서 시작된 민주화 운동의 불길이 서울로 번지자 원주에 대한 유신정권의 감시와 탄압은 더욱 심해졌다. 그럴수록 원주는 더욱 단단한 민주화 세력의 구심지가 되었다. 원동성당과 가톨릭센터, 민주인사들을 품어주는 무위당 선생 댁은 그야말로 민주화운동의 아지트였다.
반독재 민주화 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게 된 배경을 무위당 선생은 이렇게 설명했다. “60년대 말에 박정희 정권은 굉장히 경직되어 있더군요. 국민들이 살아가는 데 경우에 맞지 않는 것에 대해서 정부가 전혀 대처할 능력이 없더라고요. 그렇게 되니까 이 시기에 각성을 주지 않으면 안 되겠다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사회정의를 위해 저항을 하게 된 것이죠. 그때 참여한 분들이 많습니다. 지학순 주교님을 비롯해 신부님과 수녀님, 교우님들과 원주 시민들, 모든 분들이 그런 뜻에 공감하기 때문에 다들 합세가 되어 정부에 호소를 하고, 호소만으로 안되니까 불의한 정권에 저항하게 된 것입니다.”
 
무위당 선생이 책도 읽고, 붓글씨도 쓰고, 손님도 맞는 작은 방에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고 찾아들었다. 목숨을 걸고 민주화운동을 하는 인사들과 수배되어 쫓기는 대학생들, 시대를 아파하고 고민하는 지식인은 물론 삶의 지혜를 얻고자 방문객들이 줄지어 찾아왔다. 이들은 작은 방에 둘러 앉아 엄혹한 시대를 헤쳐 나갈 방법에 대해 선생에게 묻고, 얘기를 나누면서 밤을 하얗게 지새웠다.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은 그 방에서 며칠씩 묵고 가기도했다. 무위당은 독재정권과의 싸움에 지친 사람에게 용기를, 민주주의를 위한 싸움의 방법을 물어오는 사람에게 지혜를, 삶의 좌표를 잃은 사람에겐 희망을 심어 주었다. 선생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민주화운동을 돕는데 탁월한 분이었다. 민주화운동으로 쫓기는 사람들은 일단 원주에 발을 들여놓으면 안심을 했다. 이들이 찾아오면 무위당은 지역을 안배해 숨을 곳을 마련해주었다. 은밀하게 제자를 불러 “이 분을 안전하게 모셔라” 라고 지시하면 척척 알아서 도피처를 마련해주었다.
 
“70년대와 80년대에 원주는 민주화운동으로 쫓기는 사람들의 피신처였어요. 민주화 운동을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숨을 곳이 없으면 원주로 가라’는 말이 돌 정도였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은 치악산을 모월산(母月山)이라고 부르시면서 원주 사람들은 원주를 찾아오는 사람들을 어머니가 아들 친구를 받아서 대접하듯이 잘 모시고 품어줘야 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래선지 선생님 후배나 제자들에게도 절박하고 처지가 어려운 사람들을 감싸 안는 그런 분위기 같은 게 있었어요. 원주는 민주화 운동의 해방구였다고 할 수 있어요. 그래서 ‘원주캠프’라는 말이 생겨났는데 ‘원주캠프’는 원주를 거쳐 간 사람들이 부르기 시작해서 생긴 말입니다.”(김정남 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봉산동 무위당 선생 댁은 찾아오는 사람들로 늘 북적거렸다. 좁은 집에 사람들은 항상 가득 차 있고, 없는 살림에 식사 때 찾아오는 손님들의 찬거리를 만들어야 하고, 시도 때도 없이 차를 내야 하니 부인 이인숙 여사의 고생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급할 때는 앞집에 사는 동서(둘째 동생 장화순 선생님 부인)가 달려와 도와주기도 했다. 가끔 멀리서 온 사람들이 며칠씩 묵어갈 때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사모님은 안방을 내주고 부엌바닥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서울서 대학까지 나온 부잣집 집 규수였던 사모님이 원주에 시집와서 남편과 손잡고 교육사업을 멋지게 해보려던 꿈을 접고 부엌일로 평생을 보낸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파온다. 고인이 되신 사모님의 명복을 빈다.
 
원주를 찾아오는 민주인사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으면서 박정희에게 원주는 반정부 소굴로 인식됐다. 원주의 민주화 운동에 노발대발한 박정희는 경찰과 군, 공안관계자들을 청와대로 불러 “원주에만 다녀오면 모두들 빨갱이가 된다”며 원주의 민주화 세력을 발본색원할 것을 명령했다.
 
학성동 주교관과 가톨릭센터, 봉산동 무위당 선생 댁 주변에는 기관원들의 감시가 끊이지 않았다. 70년대 후반엔 무위당 선생 댁으로 향하는 골목 입구에 선생을 감시하기 위한 파출소가 설치됐을 정도였다.
 
 
▲무위당 선생님 댁으로 향하는 골목길과 초입에 있었던 파출소
 
 
 
천주교를 감시하는 정보부 요원들은 원주교구 신부들의 동향을 일일이 체크했다. 중앙에서 파견된 정보부 요원들은 신부들과 원주그룹을 이간질 시키려는 공작을 벌였고, 원주그룹의 민주인사들을 각개격파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된 뒤 내 일거수일투족도 철저하게 감시당하고 있었다. 나는 아침에 주교관에 출근하면 퇴근할 때까지 사무실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점심도 배달시켜 먹었다. 감옥에 있는 주교님을 면회를 하고 돌아온 신현봉 신부로부터 “내가 나갈 때까지 김영주는 절대로 주교관 밖으로 한 발짝도 나서게 해선 안 된다”는 주교님의 명령을 전해 들었다.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도 “지학순 주교가 활동해온 일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김영주가 잡혀가서 고문이라도 당해 조작된 내용을 허위로 자백하게 되면 주교님에게 더 큰 죄가 덧씌워질 수 있으니 몸조심할 것”을 신신당부했다.
 
박정희 정권은 반정부 인사라고 지목된 인사들을 S급, A,B,C급으로 분류해 감시했다.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 김지하 시인은 스페셜인 S급에 해당됐다. 세 사람의 동향은 중앙정보부에서 파견된 요원들에 의해 서울로 매시간 보고되었다. 나는 A급으로 분류됐다. 정보부 요원들에게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면 지학순 주교는 물론 무위당 선생에게까지 화가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민주화운동에 대한 전략이나 논의는 말로만 하고 전화통화는 물론 단 한 줄의 글도 남기지 않도록 조심했다. 메모한 종이가 있으면 집에 몰래 갖고 가 연탄불 아궁이에 태워버렸다.
 
나를 감시한 기관원들 중에는 나와 안면을 트고 지낸 사람도 있었다. 서울서 대학생들의 시위가 있거나 민주인사들과 연결된 천주교의 움직임이 수상하다 싶을 때면 “차 한 잔 하자”며 나를 가톨릭센터 지하 다방으로 불러냈다. 나도 기관원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싶어서 그와 가끔 만나 차를 마셨다. 몇 번 만나다보니 기관원과 농담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다. 농담을 하다가 기관원이 신부들의 동향과 무위당 선생의 일과를 슬쩍 묻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내가 요즘 사무실 밖에 한 발짝도 나가지 않는 걸 당신이 잘 알고 있지 않냐? 나도 그분들 만난 지 오래됐다. 나보다 당신이 그 분들이 어떻게 지내는지 더 잘 알 것 같은데”라고 말했다. 그러면 “오늘 상부에 보고할 꺼리가 있어야 하는데...” 라면서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나는 속으로 ‘정권의 하수인이 되어 남의 뒤나 캐고 다니는 이 친구의 신세도 참으로 가련하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기관원 중에는 민주화 진영을 비밀리에 돕는, ‘비둘기’라고 불리는 조력자도 있었다. 우리를 돕는 기관원이 중앙정보부에서 원주교구의 은행 계좌를 캐고 있다는 정보를 흘려주었다. 정보부에서 원주교구의 은행거래 내역을 조사해 민주화운동의 자금으로 지출된 항목이 발견되면 핵심 인물들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엮으려고 한다는 정보였다. 지학순 주교와 나는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철두철미하게 대비했다. 원주교구의 모든 금전거래는 강원은행하고만 했다. 지역은행인 강원은행은 원주시민들의 신뢰를 받고 있는 금융기관이었다. 고맙게도 강원은행은 숱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원주교구의 입출금 내역을 단 한 건도 관계기관에 알려주지 않았다.
 
나는 정보부에서 절대로 캐낼 수 없도록 다른 비밀 장치를 마련해두었다. 경리담당 직원에게 원주교구의 회계장부와 은행의 입출금 내역이 정확하게 맞아야 한다고 늘 환기시켰다. 경리를 맡은 여직원을 사무실에서는 ‘강양’이라고 불렀는데, 후배인 이경국 전 무위당만인회장의 처제라 믿고 맡길 수 있었다. 일주일에 두 번씩 나와 강양은 책상을 마주보고 앉아서 회계장부와 통장 입출금 내역을 대조하며 꼼꼼히 점검했다. ‘강양’의 회계는 완벽했다. 회계장부를 보면 단정한 글씨로 한 글자의 오차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돼 있었다. 세월은 강물처럼 흘러 강양은 지금 예순이 넘은 할머니가 되었다.
 
원주에서 민주화 시위가 있을 때마다 늘 선두에 섰던 사람은 앞에서 얘기한 이긍래 아우였다. 이긍래는 붓글씨를 잘 써서 데모할 때 현수막 글씨 쓰는 일을 도맡아 했다. 시장에서 갑바로 된 천과 페인트를 사와 가톨릭센터 옥상에서 ‘지학순 주교와 김지하를 석방하라’고 썼다. 입을 꾹 다물고 진중한 표정으로 글씨를 써내려가던 긍래 아우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글씨를 다 쓰고 나면 긍래는 칠흑 같은 밤에 원동성당 종각이 있는 첨탑에 올라가 현수막을 걸어놓고 내려왔다. 그 당시 원주에는 3층 이상의 높은 건물이 별로 없어서 종탑에 걸려 있는 플랭카드 글씨가 멀리서도 한 눈에 들어왔다. 봉산동 철교 위를 지나가는 열차의 승객들도 글씨를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다. 아침에 종탑에 걸린 현수막을 본 정보기관 요원들이 기겁을 하며 교구청에 전화를 걸어 제발 현수막을 내려 달라고 사정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긍래 아우는 원주 민주화운동의 큰 일꾼이었다.
 
▲이긍래 아우가 원동성당 정문과 종탑에 걸어놓은 현수막
 
원주의 민주화 투쟁에 몸을 바친 사람들 중에는 천주교 평신도들이 많다. 모두 소개하기가 쉽지 않아 기억에 남는 두 분만 소개한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이기수씨 내외는 원동성당에서 민주화 철야 기도회가 열릴 때마다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기도회 현장에서 지 주교님이 “교사가 기도회에 나오면 신상에 피해를 입을 수 있으니 나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아니나 다를까 며칠 뒤 정보부에 호출된 이기수씨는 구둣발로 채이고 온갖 욕설을 들은 뒤 다시는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풀려났다. 이 선생은 3년 동안 교감 승진에서 누락되는 불이익을 당하다 가까스로 승진이 되었다. 그런데도 이분은 한 번도 후회하거나 불평이 없었다. 누군가 이 선생이 고초 당했던 일에 대해 얘기하면 “예수님이 치룬 고난에 비하면 내가 겪은 것은 아무 것도 아니지 뭐” 라며 웃었다.
 
또 한분은 주류업을 했던 이환승 사장인데 이분은 원주 시위는 말할 것도 없고 원주교구 신부들이 서울, 안동, 대구, 부산의 성당을 돌며 지학순 주교 석방을 촉구하는 원정시위를 할 때도 신부들 옆에서 구호를 외쳤다. 이환승 사장은 원주에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민주화를 외치며 용기 있게 가두시위에 나서 것에 감동을 받은 뒤부터 사제단의 시위가 있는 곳이면 지역을 가리지 않고 참가했다.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었을 때 주교님의 석방을 위해 신현봉, 양대석, 최기식 신부님이 동분서주하는 가운데, 주교님 옥바라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주교님 옥바라지에 고민하고 있을 때 도움을 준 사람이 김정남(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선생이었다. 1964년에 굴욕적인 한일회담을 반대 시위에 앞장서 감옥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김정남 선생은 그때까지 한 번도 지학순 주교를 만난 적이 없었
다. 김 선생이 지학순 주교를 만난 것은 주교님이 석방된 이후였다. 주교님 옥바라지를 어떻게 했는지에 관해서는 김정남 선생 저서 ‘이 사람을 보라’1권에 자세히 기록돼 있다.
 
‘서울 성모병원 1층 X선과 박영자(삐엘마리) 수녀의 방은 지학순 주교의 옥중수발을 준비하는 장소였다. 감옥에 가서 접견하고 책이나 물건을 영치시키는 일은 지 주교의 동생 지학삼씨가 맡았다. 지학삼 씨가 면회를 마치고 돌아오면 원주교구의 양대석, 신현봉, 최기식 신부, 이창복 선생(전 국회의원), 더러는 김지하의 어머니 정금성 여사가 모여 대책회의를 나눴다. 박 수녀님은 얼굴만큼 마음도 고와서 곰국을 보온병에 담아와 우리들에게 주었다.’ (56쪽 인용)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감옥에 있는 지학순 주교의 편지를 비밀리에 밖으로 전해준 의로운 교도관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서대문 교도소의 전병용 교도관, 그는우리의 ‘비둘기’였다. 전병용 교도관은 지 주교의 편지를 몰래 밖으로 빼내 명동성당에 있는 신부들에게 전달했다. 주교님의 편지을 읽고 나서 답장은 주로 김정남 선생이 썼다. 전병용 교도관은 비번인 날 성당에 와서 편지를 받아 당번 날 아침에 지 주교에게 전해주었다. 그는 주교님 방 앞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 “주교님, 잠시 방을 점검하겠습니다.” 그리고는 방에 들어가 이곳저곳을 점검하는 시늉을 하다가 편지를 슬쩍 성경 속에 찔러 넣고 나오곤 했다. 1987년 1월에 이부영 선생이 감옥에 있을 때 경찰의 물고문으로 숨진 박종철 군의 죽음의 진상을 휘갈겨 쓴 이부영 선생의 메모지를 감옥 밖으로 전달한 장본인도 전병용 교도관이었다. 그 다음날 편지를 전달한 것이 탄로나 큰 고초를 겪었고, 그 뒤로 전병용 선생은 민주화 진영에 합류했다.
 
1974년 8월 12일 명동성당 기도회 때 ‘지학순 주교는 어떤 분이신가’ 라는 제목의 유인물과 함께 지 주교가 철창 안에 갇혀 있는 사진이 배포되었다. 인쇄물과 사진 모두 원주에서 제작돼 명동성당에 반입된 것이다. 인쇄물은 비밀리에 민주화운동을 도운 원주의 인쇄소에서 찍은 것이고, 지학순 주교가 철창 밖으로 손을 내밀고 있는 사진은 원주교구 가톨릭청년회 2대 회장을 지냈고, 사진관을 운영하고 있던 무위당 선생의 대성학교 제자인 최규택 아우가 교묘하게 합성해 만든 것이다. 인쇄물과 사진이 만들어지게 된 경위는 이렇다.
 
“언젠가 주교님이 합장하며 기도하시는 모습을 사진으로 찍은 적이 있었어요. 브라질의 까마라 대주교가 펴낸 ‘정의의 목소리’라는 책에 대주교가 감옥에서 창살 밖으로 손을 내민 사진이 실려 있는데, 그 사진 밑에다가 지 주교님이 합장하고 있는 사진을 오려서 합성해보니 지 주교님이 철창 밖으로 손을 내미는 것 같은 분위기가 나는 거예요. 분도출판사에 인화를 부탁해 크리스마스카드로 만들었어요. 사진 아래쪽에 ‘이 땅에 정의와 평화를 주십시오’라는 문구를 넣어 전국의 신부님들에게 보냈고, 외국으로도 보냈어요.”(무위당사람들 15호 노변정담에서) 이 사진 때문에 최규택 아우는 원주 중앙정보부 분소에 끌려가 호된 곤혹을 치루기도 했다.
 
지학순 주교 구속의 부당성을 전국 교회에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어 인쇄를 맡기면 인쇄소 주인들이 “내 목 날아가는 꼴 보고 싶냐?”면서 거절했다. 그 당시 원주에는 인쇄소가 몇 개 되지 않아 원주 시내에 뿌려진 유인물을 보면 그것이 어느 인쇄소에서 나온 것인 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그렇다고 전국 교회에 배포할 수만 장의 유인물을 한 장 한 장 등사기로 밀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고민하고 있던 중에 고향 후배가 하는 인쇄소에서 낡은 인쇄기를 새 것으로 교체한다는 소식이 들렸다. 후배를 찾아가 “하루만 새 기계를 우리가 먼저 쓰면 안 되겠냐?”고 물었다. 천주교 신자인 후배는 “주교님 석방을 위해서 하는 일인데 신자인 내가 도와야지요” 하면서 흔쾌히 승낙했다. 이렇게 해서 유인물 수만 장을 찍어낼 수 있었다. 그 다음날 유인물은 비밀리에 전국의 천주교 성당으로 운반돼 미사 시간에 신자들에게 배포되었다. 이렇게 원주의 민주화운동에는 원주 시민들의 지원과 협조가 있었다. 참으로 정의롭고 고마운 시민들이 아닐 수 없다.
 
지금도 귓가에 쟁쟁한 “호산나 원주!”
 
▲ 감옥에서 석방되어 원주 시민들의 뜨거운 환영을 받는 지학순 주교님
(그 뒤로 무위당 선생의 모습이 보인다. 1975년 2월 19일)
 
원주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이 전국으로 확산되면서 정권 유지에 위기감을 느낀 박정희는 1975년 2월 17일에 지학순 주교를 구속집행정지로 석방했다. 투옥된 지 7개월만의 일이었다. 감옥에서 풀려난 지 주교는 이틀 뒤인 2월 19일에 원주로 돌아왔다. 지학순 주교가 돌아온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거리는 환영하기 위해 나온 인파로 가득 했다. 10만 명의 인구 중 1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원주역에서 원동성당에 이르는 1.5킬로미터 도로 양편에는 태극기를 손에 든 시민들이 먼 곳으로 떠났다가 돌아오는 가족을 맞는 마음으로 주교님을 기다리고 있었다.
 
인파 속에 무위당 선생도 있었다. 오후 2시 경 지학순 주교가 탄 승용차가 원주역에 도착하자 진광중고등학교 브라스밴드가 ‘고향의 봄’을 연주했다. 시민들은 감격에 겨워 일제히 환호하며 “지학순 주교님 만세!”를 외쳤다. 지 주교는 천주교만의 어른이 아닌 민주화를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이 존경하는 인물이었다. 지 주교는 차창을 열고 환영하는 인파에게 손을 흔들었다. 원성군청 앞에 이르자 도로를 메운 시민들이 차를 에워쌌다. 인파에 밀려 차가 더 이상 나갈 수 없게 되자, 주교님이 차에서 내렸다. 팔을 들어 시민들에게 답례하며 시민들과 함께 원동성당까지 걷기 시작했다. 그때였다. 군중 속에 있던 한 청년이 주교님 앞으로 나오더니 웃옷을 벗어 발밑에 깔아놓았다. 예수가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했을 때 누군가 길에 망토를 깔았다는 성경의 구절과 겹치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그분은 의로우시며 승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힘으로 온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분임에도 불구하고, 겸손하시어 어린 나귀를 타고 오신다’는 마태복음의 구절이 떠올랐다.
바로 그때 인파 속에서 누군가 이렇게 외쳤다. “호산나 원주!”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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