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67호] 나의 회고록 '민주주의의 고비마다 희생하고 헌신해온 원주' - 1980년대 원주의 민주화운동
등록자 교육담당 등록일자 2019.0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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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회고록:
민주주의의 고비마다 희생하고 헌신해온 원주
-1980년대 원주의 민주화운동
글 김영주 무위당만인회 고문
 
 
1980년의 원주와 무위당 선생
 
1979년 10월 26일 독재자 박정희가 자신의 오른팔인 중앙정보부 부장 김재규에 의해 살해당하는 10·26사건이 발생했다. 이로써 유신체제가 종언을 고하고 긴급조치로 활동을 하지 못하던 민주인사들이 복권되었다. 국민들 사이에는 민주적 선거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을 맞이한 것이다. 국민들은 이 땅에 민주주의가 만개할 것이라는 부푼 기대를 가지고 있었지만, 5월 초에 무위당 선생은 무슨 예감이 드셨는지 근심스러운 표정으로 말씀했다. “이 땅에 진정한 민주주의가 도래하려면 앞으로 30년은 더 기다려야 할 거다. 이승만, 박정희 독재 정권이 뿌린 씨앗을 거둬내기란 그리 쉽지 않을 게다. 그래서 독재가 민중의 최대 적인 거야.” 선생의 예측은 적중했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는 최규하 정부를 압박하면서 집권 시나리오를 진행했다. 군부의 정권 장악 음모를 눈치 챈 민주화 운동진영과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 시작했다. 5월 14일과 15일 서울지역 대학생들은 계엄 상황임에도 민주화 일정 제시와 전두환의 퇴진 등을 요구하면서 시내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신군부는 5월 17일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했다.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시키면서 정치인과 재야인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했다. 대학에는 휴교령이 내려졌고, 전국의 각 대학과 주요 도시에는 공수 특전단을 비롯한 군부대가 투입되었다. 전두환 신군부는 5월 17일 단행된 조치에 항거해 일어난 광주 5·18민주화운동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광주에서 수많은 시민들이 군인에 의해 목숨을 잃어 가는 동안에 신군부의 철저한 언론통제로 대다수 국민들은 한반도 남쪽에서 엄청난 비극이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UPI, AFP 등 외신들이 공수부대의 만행을 규탄하는 보도를 쏟아내고 있는데도 한국의 언론은 고립된 광주에서 벌어지는 참상을 극소수 불순분자와 폭도들이 일으킨 소요사태로 보도할 뿐이었다.
 
  
  광주민주화운동을 자세히 보도한 외신과 달리 국내언론은 침묵하거나
  사태를 축소, 왜곡하는 보도를 했다.
 
 
무위당 선생은 민주화 세력을 돕고 있는 정부 내의 인사로부터 광주에서 엄청난 학살이 벌어지고 있다는 소식을 들고는 경악했다. 광주의 참상을 전해들은 원주그룹의 민주인사들이 선생을 찾아와 분개하면서 원주에서도 궐기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말했다. 무위당은 전두환의 무자비한 폭압성은 박정희와는 다르다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원주에서 궐기하다가는 정권 탈취에 혈안이 된 군인의 무력으로 원주가 쑥대밭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광주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신군부에서 반정부 성향이 짙은 도시 하나를 표적으로 삼고 있다는 소문이 돌았는데 원주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소문이 들려오기도 했다. 무위당은 잘못하다간 이 작은 도시가 너무 큰 희생을 치룰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원주에서 절대로 그런 일이 벌어져서는 안된다. 숨죽이고 있어라. 너희들 한 사람, 한 사람이 참 중요하다.”
무위당은 울분에 차있는 재야 민주인사들에게 이번만큼은 엎드려 있으라고 당부했다. 제자들에게 불의와 소인배들이 득세하는 시대에 세상과 뜻이 맞지 않을 때는 스스로 몸을 감춘다는 움츠림의 지혜를 의미인 ‘천산둔(天山遯)’을 써서 주기도 했다.
“광주의 참상에 가슴 아파하시면서 선생님은 '기어라'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어요. 그 말씀을 나름대로 생각해보면 그냥 숙이라는 것이라기보다는, ‘살아야 되지 않겠느냐? 너희들이 살아야 하지 않겠느냐?’ 그런 의미였지요. 그냥 뭐 사람을 마구 잡아가고 죽이는 판이었으니까요. ‘불의의 시대를 넘어서자. 네 목숨 하나 없으면 그 뭐하냐?’ 라고 하시면서 '기어야 한다'고 당부하셨어요.”(이계열 전 진광고등학교장) 
 광주에서 참혹한 학살이 벌어지고 있는 동안 신군부는 민주인사들을 무차별적으로 체포해 투옥시켰다. 무위당 선생의 신변도 위태로웠다. 주변에서 잠시 피신해 있는 것이 좋겠다고 권유했다. 처음에는 막내 동생인 장예순씨(전 원주MBC 총무국장) 집에 피신해 있다가 거기도 위험하다 싶어 고향 후배인 최규장씨 집으로 옮겼다. 무위당은 한 달 정도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니면서 숨어 지내는데 나중에 어느 술자리에서 그 당시를 '낭인 생활'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민주화운동 세력 중에는 “기어라”라는 말씀에 불만을 갖고 무위당을 비판하는 이들도 있었다. 불의한 정권은 투쟁을 해서 타도해야 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운동권의 입장에서는 “싸우지도 않고 기기만 하면 어떻게 하냐”면서 무위당을 회색분자라며 비판했다. 그래도 선생은 조금도 괘념치 않았다. 전두환이 광주를 무력으로 진압하고  집권했을 무렵 집으로 찾아온 사람들에게 신문의 전두환의 얼굴을 가리키며 “저 이가 위험한 사람이야 우리가 저 사람을 위해 기도하고 사랑해 줘야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자 “동족을 죽인 살인마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 하면서 노골적으로 항의하는 이들도 있었다. 세월이 지나 무위당을 비판했던 사람들 중에는 무위당 선생이 그때 왜 ‘기어라’고 하셨는지 이제야 알 것 같다고 말하는 이들이 있다. “울분이 안 풀려도 아끼는 사람들이 살아남아야 나중에 다시 어떤 일이든 도모할 수 있지 않냐. 그러므로 이런 참혹한 상황에서도 살아남아야 한다”는 뜻이었음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고 말하면서 부끄러워하기도 했다.
“광주민주화항쟁이 끝나고 우리들의 가슴속에 분노가 꽉 차 있을 때 가끔 장일순 선생님이 우리들을 원주로 불러주셨어요. 형사도 안기부원도 없는 치악산 계곡으로 우리들을 데리고 가셔서 난닝구만 입고 물에 발 담그고 앉아 정답게 얘기하시면서 술을 먹여주셨어요. 우리들이 절망, 패배, 두려움을 느끼지 않도록 격려해주시면서 용기를 북돋아 주신 거죠.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우리들은 참 복을 받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부영 선생의 무위당학교 강연에서)
 

광주항쟁 이후 무위당은 울분에 차있는 민주인사들을 원주로 불러
용기와 격려를 해주었다.(안경 쓴 이가 이부영 전 국회의원)  
 
 
광주항쟁 이후 무위당은 야에 정치 얘기는 입 밖에도 꺼내지 않았다. 권력이란 허무한 것이고, 이런 엄혹한 시기에 정치를 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제자들이 선생을 찾아와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하면 노기를 띠며 야단쳤다.
 
 
최기식 신부 구속 사건과 원주의 시련

1982년 봄 천주교 원주교구는 1974년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었을 때에 버금가는 엄청난 시련을 겪게 되었다.
1982년 4월 5일, 원주교구 사목국장 겸 교육원장을 맡고 있었던 최기식 신부가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에 관련되어 구속됨으로써 원주교구의 수난이 다시 시작되었고 이 사건은 온 국민을 충격에 빠지게 했다.
1982년 3월 18일, 부산 중구 대청동에 있었던 미국 문화원에서 방화(放火) 사건이 발생했다. 나중에 이 사건의 주동자가 고신대(高神大) 학생인 문부식, 김은숙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방화의 동기는 광주민주화항쟁을 유혈 진압한 전두환 신군부를 비호하는 미국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의하기 위해서였다.
광주 민주화운동을 겪으면서 국민들 사이에서는 미국이 과연 이 나라 민주주의의 지원자인가에 대해 깊은 회의를 갖기 시작했다. 한국군에 대한 작전통제권을 쥐고 있는 미국의 승인 없이 군대를 동원해 광주민주항쟁을 진압하기는 불가능했기 때문이었다. 운동권에서는 전두환 신군부가 광주항쟁을 무력으로 진압하는 것을 미국이 묵인 했으리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광주항쟁 직후 주한미군 사령관 위컴이 로스앤젤로스 타임스지와의 회견에서 “한국민의 국민성은 들쥐와 같아서 누가 지도자가 되든지 그 지도자를 따라갈 것이며, 한국민에게는 민주주의가 적합하지 않다”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운동권 내부에서는 미국에 대해 어떤 방식으로든 응징과 경고를 하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분위기가 고조됐다. 학생들은 전두환에 저항하고 광주를 진압하는 것을 승인한 미국에 항의하는 방법으로 미문화원을 방화한 것이었다. 사실 미문화원 방화는 1981년 광주에서 먼저 있었다. 가톨릭농민회원 정순철이 광주 미문화원에 불을 질렀는데 비디오실 내부 20평 정도가 불에 탔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모든 언론이 함구하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이 미국 문제가 쟁점으로 떠오르는 것을 꺼려해 보도를 통제했기 때문이었다.
독재정권을 용인하는 미국에 확실한 경각심을 줘야 한다고 생각한 학생들은 좀 더 큰 거사를 계획했다. 1982년 3월 18일 문부식, 김은숙, 김화석, 박정미 등이 부산미문화원에 잠입하여 신나를 뿌리고 빙화한 뒤 “미국은 더 이상 대한민국을 속국으로 만들지 말고 이 땅에서 물러가라”는 내용의 유인물을 살포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불이 순식간에 번져 미문화원에서 책을 보던 동아대생이 사망하는 불행한 사태가 일어났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1982년 3월 18일)
 
이 사건을 계기로 정부는 어마어마한 공안정국을 만들어냈고, 방화에 가담한 학생들을 용공, 좌경 불순분자로 전국에 지명 수배를 내렸다. 방화 주동자인 문부식과 김은숙은 원주로 가면 피신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3월 28일 수배망을 피해 원주로 왔다. 원주까지 숨어들어온 이들의 몰골은 처참했다. 학생들은 지학순 주교를 만나 자신들의 문제를 의논하고 싶어 했지만 지 주교는 해외 출장 중이어서 최기식 신부를 만났다. 최 신부는 일단 이들을 숨겨주고 대책을 세우기로 했다. 그런데 이미 천주교 원주교육원에는 최기식 신부의 보호 속에 1년 전에 원주로 숨어들어와 은신하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학생들이 원주에 오기 전에 무려 22개월 동안 원주교육원에서 숨어 지낸 사람은 다름 아닌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수배 중이던 김현장이었다. 김현장 역시 수배에 쫒기다가 마지막으로 숨어든 곳이 원주였다. 당시에 광주항쟁은 너무 엄청난 사건이라 어느 곳에서도 선뜻 김현장 받아들이질 못했다. 오로지 원주만이 독재 정권에 쫓기다가 마지막으로 갈 곳 없는 이들의 피신처였다. 김현장은 미문화원방화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었지만 정부가 이 사건의 배후 조종자로 대대적인 수배령을 내린 상태였다.
 
김현장을 최기식 신부가 있는 교육원으로 데리고 온 사람은 원주교구 사회개발부 직원이면서 전국가톨릭농민회 부회장을 맡고 있었던 정인재(전 무위당사람들 이사장) 아우였다. 정인재는 대전 가톨릭농민회관에 회의하러 갔다가 김현장을 알게 되었다, 회의를 마치고 저녁을 먹는데 못 보던 사람이 있었다. 옆에 있던 간부에게 “저 사람 누구냐?”고 물으니까 나중에 얘기해주겠다면서 말을 끊었다. 저녁을 먹고 난 뒤 간부들이 아까 본 그 사람이 광주사태로 수배되어 피해 다니는 김현장이라고 말하면서 대전 수도원에 은신해 있다가 지금은 가톨릭농민회원 집에 숨어 지내고 있는데 그곳이 더 이상 안전하지가 않다며 지학순 주교와 함께 민주화운동에 앞장선 신현봉 신부가 있는 단양성당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단양성당은 담장이 허술해서 쉽게 발각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정인재 아우는 차라리 지학순 주교님이 있는 원주로 데리고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가톨릭농민회 간부 한 사람이 소개장을 써 주었다.
 
 
다음날 김현장과 버스를 타고 청주까지 와서 원주행 버스로 갈아탔다. 오는 길에 몇몇 검문소를 용케 통과했다. 원주로 들어오는 귀래에서 마지막 검문을 했는데 차창으로 검문소가 보이자 김현장이 얼른 운전기사 옆에 있는 좌석으로 가서 앉았다. 경찰과 군인이 올라와 검문하는데 뒤쪽만 보고 검문을 하고는 차에서 내렸다. 정인재 아우는 이때 김현장이 기지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느꼈다고 한다. 원주에 도착해 봉산동 천주교교육관으로 데리고 갔다. 원장인 최기식 신부에게 그간의 사정을 얘기하고 가톨릭농민회에서 써준 소개장을 건넸다. 소개장을 다 읽고 난 최 신부는 “알았으니  뒤 김현장을 두고 가라”고 말했다. 최기식 신부는 고통 받는 광주 사람들을 위해 무언가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김현장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날부터 김현장은 교육관 지하 보일러실에 있는 골방에 숨어 지냈다.

 "정인재 씨가 어느 날 사람 하나를 데리고 온 거예요, 이 사람이 누구냐고 물어봤더니 광주민주화운동 때 '전두환 살인마, 전두환 살육 작전' 이라는 유인물을 썼다는 거예요. 보일러실 담당을 하면서 서무도 보고 있었던 문길환씨에게 이 사람을 돌보고 주변 단속을 잘 하라고 당부했어요. 지학순 주교님에게 보고하고 주교님은 모르는 것으로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김현장은 2년 동안 교육원에 숨어 지내면서 우리들과 밥도 같이 먹고 탁구도 치면서 운동도 하고 그러다가 누가 오면 얼른 골방으로 들어가 숨었어요." (2011년 ‘원주 지역의 협동운동과 민주화운동’ 최기식 신부 구술자료 중에서)
얼마 후 김현장은 최기식 신부의 세례를 받고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그의 대부를 선 사람이 이창복(전 국회의원)이다, 원주 봉산동 교육원에서 김현장은 1년 10개월, 문부식과 김은숙은 14일 동안 숨어 지냈다.   
 
어느 날 문부식과 김은숙이 최기식 신부를 찾아와 둘이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최 신부는 기가 막혔다. "결혼이라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말이 되냐? “라면서 역정을 냈다. 그러나 젊은 남녀의 사랑을 어찌 막을 수 있겠는가. ”너희들 마음이 그렇다면 약혼식이라도 해라"고 말하고 교육원에서 공부모임을 만들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던 김영애를 시켜 반지를 사오게 했다. 그런데 그날이 원주 시내의 모든 금은방이 쉬는 날이라 빈손으로 돌아왔다. 전남대 화공학과 출신인 김현장이 누가 끼고 있던 은반지를 가공해서 은가락지 두 개를 만들었다. 문부식과 김은숙은 반지를 하나씩 나누어 끼고, 교육원 소성당에서 최 신부의 주례로 비밀예식을 했다.
원주교구의 고민은 당시 사회를 엄청난 충격에 빠뜨린 미문화원 방화사건의 주모자인 문부식과 김은숙을 무한정 교육원에 숨겨줄 수만은 없었다. 최 신부는 이들에게 자수를 권하면서 당시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 인권위원장이었던 서울 한강성당 주임 함세웅 신부를 찾아가 미문화원사건 학생들이 원주에 와 있다고 설명하고 자진출두 방법 등에 대해 의논했다.
 
“최기식 신부님이 찾아와 젊은 학생들이 자진 출두할 의사가 있다면서 저에게 당국과 중재해 달라고 부탁하는 거였어요. 다음날 가톨릭 정의평화위원회원인 이돈명, 유석현 변호사와 재야 민주화운동가인 김정남 선생을 만나 대책을 의논했어요. 세 분 모두 이 사건은 검찰 공안부나 안기부에서 담당할 텐데 안기부도 어차피 청와대의 지휘를 받으니까 청와대쪽을 통해서 자진 출두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게 좋겠다는 의견을 주었어요. 김현장은 미문화원 방화 사건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으니 자수 대상에서 빼고 김현장이 교육원에 숨어 있는 것은 끝까지 비밀로 하자고 한 거죠. 참 묘하게도 당시 안기부장인 유학성씨와 대통령 정무수석비석관 허삼수씨가 우리 성당 신자였어요. 정권 실세인 허삼수씨를 통해 접근하면 대화가 쉽게 될 수 있고 학생들의 형량도 줄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고, 전화를 하고 아침 일찍 집으로 찾아갔어요. 허삼수씨는 식사 중이었는데 그 얘기를 하니까 식사를 못하더라고요. 저는 몇 가지 조건을 제시했어요. 첫째, 학생들의 ‘자수’라는 표현보다는 ‘자진출두’라는 용어를 사용해줄 것. 둘째, 어떤 경우든 비인간적인 고문을 해서는 안 되며 셋째, 법이 보장하는 절차에 따라 조사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켜줄 것. 그리고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게 상황을 알려줘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함세웅 신부 2014년 무위당학교 강연에서) 
 
정부 입장에서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미국과 관련돼 있는 정권의 아주 큰 혹이었는데 혹을 뗄 수 있는 물꼬를 틀 수 있게 되었다고 판단했던 것 같았다. 함 신부는 정부 관계자로부터 “학생들을 설득시켜줘서 고맙다는 연락을 받기도 했다. 최기식 신부는 문부식과 김은숙이 자진출두하기 전날 이들을 불러서 김현장이 교육원에 숨어 있는 것은 비밀로 해야 한다고 말했다. 다음날인 4월 1일 두 사람은 자진출두 형식으로 자수를 했다. 그런데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안기부에서 방화 주동자들을 신문하는 과정에서 김현장이 교육원에 숨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노련하고 고문까지 불사하지 않는 수사관들 앞에서 비밀을 지켜내기란 쉽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수사관들이 최기식 신부를 찾아와 김현장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더 이상 김현장을 보호해줄 수 없는 상황에 처한 최 신부는 김현장도 자진출두 형식으로 인도하기로 했다. 그런데 미문화원 방화사건 주범들을 자수시켜줘서 고맙다는 인사까지 했던 당국의 태도가 이번엔 완전히 돌변했다. 정권 내의 강경파들은 김현장이 문부식과 김은숙에게 미문화원 방화를 지시하고 의식화 학습을 지도한 배후조종자라면서 “자수나 자진출두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다. 무조건 검거해야 한다. 김현장을 체포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노발대발할 거다”라며 강경하게 나왔다. 4월 2일 김현장은 자진출두 형식으로 자수를 했지만,정부에서는 방화사건의 배후조종혐의로 체포다고 발표했다.
그 다음 타겟은 최기식 신부였다. 정부는 가톨릭원주교육원을 반국가 단체의 소굴이며 좌경 사상을 세뇌시키는 교육장으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
 
이 사건이 있기 전에 나는 원주 교구 퇴직을 앞두고 휴가를 얻어 서울 집에서 쉬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매스컴에서는 원주교구를 거의 좌경불순세력의 온상으로 매도하면서 최 신부를 타락한 탈선 사제로 몰아붙였다. 퇴직을 앞두고 있지만 너무 걱정이 돼서 부랴부랴 주교관으로 달려갔다. 며칠째 건물 주변은 경찰이 에워싸고 있었다. 지학순 주교 집무실은 기자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주교님은 소파에 앉아 한숨만 내쉬고 있었고, 교구청 직원들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주교님 방에 들어가자마자 총무부장 이름을 부르며 일부러 크게 소리를 쳤다. “야, 주교님 방이 이 꼴이 뭐냐? 당장 기자 놈들 모두 내쫒지 못해!” 처음 보는 사람이 다짜고짜 호통을 치자 기자들이 ‘저 사람 누구지?’ 하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주교님 방에 있는 기자들 대부분이 원주 주재 기자들이 아니고 서울서 특파된 기자들이라 나를 알 턱이 없었다. “너희들 당장 나가지 못해!” 하고 소리치자 직원들이 기자들을 밖으로 밀쳐내기 시작했다. 
 
힘에 밀려 기자 몇 명이 밖으로 나갔지만 그래도 엉거주춤한 자세로 버티는 기자들이 서넛 있었다. “당신 어느 언론사 기자야?” 하고 소리치자 “00신문사 기자요.” 라고 대꾸했다. “어제 내가 그 신문 보니까 미 문화원 사건에 대해 순 거짓말만 써놨던데 부끄럽지 않냐? 당장 나가!” 내가 신문에 보도된 기사에 대해 호통을 치니까 남아 있던 기자들도 자신들이 쓴 기사에 켕기는 게 있었는지 슬금슬금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휴, 이제야 좀 숨을 쉬겠네.” 주교님이 소파에서 일어나 웃으면서 말했다. 방이 정돈된 후 주교님이 최기식 신부를 불렀다. “신부님은 조금도 걱정하지 마시오. 신부가 뭡니까. 비록 죄인이라도 고통 받는 어린 양이 도움을 청하면 도와주는 것이 신부의 역할 아니겠어요. 나는 최 신부님이 사제로서의 해야 할 일을 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감옥에 다녀온 경험이 있는 주교님이 최 신부님에게 당부했다. “신부님은 잡혀가서 조사를 받으면 생년월일, 본적, 주소, 직업 이 다섯 가지만 말하고 다른 말은 일체 하지 마세오. 그래야 학생들을 살릴 수 있어요. 신부로서 고통 받는 어린 양을 감싸 안아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라는 말만 하세요.” 주교님은 명령하듯 말했다.
 
최기식 신부는 “저에게서 이 고통의 잔이 거두어지면 좋겠지만, 모든 것을 하나님 뜻에 맡기고 저는 고통 받는 젊은이들과 함께 하는 썩은 밀알이 되는 것을 최상의 도리라고 생각하겠습니다”라며 담담하게 말했다.
 

국가보안법 및 범인은닉 혐의로 연행되는 최기식 신부(1982년 4월 5일)
 
4월 5일 최기식 신부는 국가보안법 위반 및 범인은닉 혐의로 치안본부로 연행되었고, 이창복, 문길환, 김영애도 서울로 압송되었다. 이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수사를 받고 4월 8일 부산 구치소로 이송되었다. 최기식 신부가 구속된 날은 부활절 주간이기도 했다. 부산 미문화원 사건과 관련해 총 16명이 구속 기소되었다.
최기식 신부가 구속되자 정부는 정권의 사주를 받은 언론을 통해 가톨릭교회를 불온 집단의 온상으로 집중포화를 때리기 시작했다. 독재정권의 눈엣가시였던 천주교를 손볼 절호의 기회라고 보고 대대적인 공세에 나선 것이다. 원주 교구를 용공단체의 소굴인 양 몰아갔고, 어용 언론들은 교회도 치외법권 지대가 아니라며 연일 공세에 가담했다. 심지어 정권 실세가 “지학순 주교는 빨갱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사태는 이제 천주교와 정권의 전면전 양상으로 발전했다. 4월 15일 천주교 주교회의에서는 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담화문 내용의 일부이다,
 
 
이번 방화사건과 관련하여 교회를 찾아와 그 보호를 받고 있던 사람들을 본인들의 뜻에 따라 당국에 자수를 주선해 준 최기식 신부의 행위는 사제로서 최선의 길이었음을 우리 교회는 확신하는 바입니다. 광주사태로 말미암아 쫓기고 있는 사람들을 보호해 준 사제들의 양심을 전적으로 존중하는 바입니다. 공익이나 제3자에게 또 다른 피해가 확실시되지 않는다고 양심적으로 판단되는 경우, 신앙인은 도움을 간청하는 범법 혐의자를 고발할 수는 없습니다. 더구나 광주사태는 그 진상과 원인 또는 책임의 소재가 공정하게 밝혀진 바 없으므로, 사제들은 자신의 사제적인 양심에 따라 보호를 요청해 온 혐의자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중략)
최기식 신부가 겪고 있는 고통을, 우리는 모든 사제와 수도자 그리고 온 교회가 직면해 있는 이 시대의 고통과 위험으로 겸허하게 받아들이고자 합니다.
이 기회에 우리는 정부 당국이 참된 국민적 화합을 위해서 광주사태 및 학원 사태 관련자들의 전면적 사면과 아울러 정치적 이유로 구속된 모든 양심수인들에게도 관용을 베풀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주기 바라는 바입니다.
 
 
최기식 신부의 행동이 예수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확신한 천주교는 유신 이후 다시 한 번 정권과 치열한 투쟁에 돌입했다. 천주교 정의평화위원회에서는 이돈명, 홍성우, 황인철 등 최강의 인권변호사 팀을 구성해 법정투쟁을 전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변호사 중에서 제일 막내로 활동했다. 사건을 재판한 담당 판사 중에는 훗날 대법관과 국무총리를 지낸 이회창이 있었다.
변호사들은 “미문화원 방화는 아름다운 방법은 아니지만 불법 정권이면서 광주학살의 주범들의 악행을 만방에 알리기 위해서 불가피하게 선택한 방법이다. 방화 과정에서 한 학생이 목숨을 잃은 것은 의도하지 않은 일이었으며 희생된 학생과 그 가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뜻을 전하며 명복을 빈다. 최기식 신부가 학생들을 숨겨준 것은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곤 누구든지 교회에 들어와 도움을 청하면 쫓아낼 수 없다는 교회법에 따른 것이다. 최기식 신부는 학생들이 자진출두하도록 설득했고, 이에 대해 정부에서도 고마워했다. 학생들의 주장 속에 내포된 선함을 재판부가 인정해 달라”고 변호하면서 이것은 넓은 의미에서 저항권, 정당방위권에 해당된다고 주장했다.   
그해 8월 10일 재판부는 11차례 공판 끝에 최기식 신부가 김현장이 광주사태의 주범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2년 동안 원주교육원에 은신시켜 주고 편의를 제공했으며, 이는 목회활동 이전에 국법에 위배되므로 처벌을 면할 길이 없다고 밝히면서 최 신부에게 국가보안법위반 및 범인 은닉죄 등을 적용해 징역 3년을 선고했다. 김현장과 문부식은 사형, 김은숙 등 5명에게는 15년 형을 선고했다.
 
천주교에서는 최기식 신부의 석방과 문부식 피고인을 위한 가톨릭 구명운동을 전개했다. 결국 교회의 저항과 전국적인 대정부투쟁에 힘입어 전두환 정권은 최기식 신부를 수감 생활 1년 3개월만인 1983년 8월 12일에 광복절 특사로 석방했고, 김현장과 문부식을 무기징역으로, 다시 20년으로 감형되었다가 1988년 12월에 석방시켰다. 전두환 정권은 자신들의 아킬레스건인 광주문제를 자꾸 거론해야 이로울 것이 없다는 판단과 독재정권에 대한 국내외의 비판 속에서 한국 천주교회와 공방을 벌이는 일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부산 미문화원 방화 사건은 한국전쟁 이후 대한민국의 은인으로만 생각해온 미국에도 항의와 반대, 할 말을 할 수 있게 하는 단초를 연 사건이었다. 또한 이 사건은 한국 민주주의 역사의 고비에서 희생하고 헌신해온 원주, 불의의 대항하다 쫒기는 사람들이 찾아가면 너른 품으로 받아주는 원주를 세상 사람들이 다시 한 번 주목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1971년에 사제서품을 받은 최기식 신부는 42년간 종교지도자에 머물러 있지 않고 원주 민주화운동과 사회복지 활동을 통해 원주 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최 신부는 출옥 후 사회복지사업에 관심을 갖고, 각종 복지시설 건립과 운영에 심혈을 기울여 오늘의 원주교구 사회복지사업의 초석을 놓았다. 천주교 원주교구 천사들의집 원장과 사회복지회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2013년에 퇴임한 후 현재는 한국희망재단 이사장과 지학순평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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