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68호] 나의 회고록
등록자 교육담당 등록일자 20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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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회고록
가톨릭을 기반으로 한 무위당의 사회개혁운동
 
글. 김영주 무위당만인회 고문
 
 
“삥땅은 죄가 아니다”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은 60년대 말부터 원주를 중심으로 사회개혁운동을 전개하면서 민중의 생존권과 생명권에 대한 문제인식을 본격적으로 갖게 되었다. 생존권 문제에서 시작하여 70년대 후반 ‘생명운동’으로 확장되는 계기가 된 사건이 소위 ‘삥땅사건’이다. 삥땅사건은 노동자의 임금을 단순히 먹고사는 생존권의 차원을 넘어 생명권의 문제로 심화시킨 사건이기도 했다.
 
1970년 4월 28일, 서울 YMCA 강당에서 노동문제연구소 주관으로 ‘삥땅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심포지엄은 안젤라라고 알려진 어린 시내버스 여차장의 호소에 대해 지학순 주교가 응답하는 자리였다. 예전에는 시내버스에 버스 차장이라고 불리는 어린 여성들이 함께 타서 승객들에게 요금을 받고 정류장에 설 때마다 승하차 안내를 했다.
 
그런데 버스 차장들이 회사로부터 받는 임금이 매우 낮았다. 이들은 대부분 가난한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와 버스 안내원으로 일하면서 어려운 집안 살림에 보탬을 주고 있었다. 워낙 적은 임금으로 생활을 하고 아끼고 아낀 돈을 고향 집에 보내다 보니 생계를 잇기가 어려웠다. 이렇다보니 간혹 요금의 일부를 빼돌리는 일이 발생하곤 했는데 이것을 ‘삥땅’이라고 불렀다. 버스 회사에서는 삥땅을 적발하겠다며 여성의 몸 구석구석을 수색하는 인권침해가 아무렇지도 않게 벌어지곤 했다.
 
1970년 봄에 여차장 안젤라는 한국노사문제연구소를 찾아와 생활이 너무 어려워 삥땅을 할 수밖에 없는 처지라면서 가톨릭 신자인 그녀에게 삥땅이 종교적으로 죄가 되는 것인지 묻고 그 해결책을 구했다.
 
“저는 버스 차장 일을 하면서 어머니의 병 치료비와 동생 학비 때문에 하루 300환(구 화폐단위)씩 삥땅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가톨릭 신자입니다, 요즘 양심의 가책을 받아 성당에 나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제가 저지른 삥땅이 죄가 되는지 묻고 싶습니다.”
노사문제연구소의 박청산 소장은 이 질문을 받고 난감했다. 일단 버스회사의 돈을 훔친 것이니 죄가 되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생계가 어려운 여차장의 입장을 고려하면 꼭 집어 죄가 된다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노동문제 전문가들에게 자문을 구해도 어느 누구도 명쾌한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고민을 하고 있던 중에 노동문제 전문가 한 사람이 “이 문제의 해답을 줄 사람은 딱 한 사람, 원주의 지학순 주교밖에 없다”고 말했다. 그래서 지 주교를 심포지엄에 초대하게 되었다. 지 주교는 강당을 메운 청중을 향해 “종교인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경우 삥땅은 죄가 안 됩니다. 하루 18시간씩 혹사당하면서 고작 4,800 원밖에 월급을 받지 못하는 어린 소녀들이 살기 위해서 하는 삥땅은 사회적으로 보호받지 못하는 권리를 그들 나름대로 찾으려고 하는 당연한 권리주장이므로 종교적인 면에서 결코 죄가 되지 않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오히려 노동자의 정당한 임금과 권리를 부인하는 기업주와 사회 체계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버스 회사 사장님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삥땅 하지 않고 월급만으로 살아갑니까? 버스회사를 감독하는 서울시장에게 묻겠습니다. 당신은 삥땅한 적이 없습니까? 시장, 군수, 장관 여러분 당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물어보십시오. 나는 삥땅한 적이 없는가? 어린 차장이 하루 300환의 삥땅을 하는 것은 불합리한 노동에 대한 저항이자 생존권을 위한 정당한 권리라고 봐야 합니다. 따라서 삥땅은 죄악이 아닙니다.”
 
삥땅은 죄가 아니라고 말한 것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1961년 교황 요한 23세가 제 2차 바틴칸공의회에서 교회의 사명을 언급하면서 “무산자에게는 참을성을 설교하고 유산자에게는 너그러움을 찬양하는 일에 머물러서는 안되며, 문제를 얼버무리지 말고 그 원인을 똑바로 규명하여 해결점을 정확히 제시해야 한다”고 말한 것과 맥을 같이하고 있었다.
 
1970년대 극한 노동과 저임금으로 고통 받은 버스 안내원과 삥땅 심포지움 자료
 
삥땅 심포지엄은 세상에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언론에서는 심포지엄의 내용을 크게 보도하면서 민중의 생존권 문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MBC 방송에서는 ‘삥땅은 죄가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지학순 주교와 대담 방송을 하기도 했다.
 
삥땅사건이 있고 난 후 그해 11월 전태일 열사 분신사건, 도시빈민들의 생존권 문제를 환기 시킨 광주대단지 사건 등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노동자의 권리와 민중의 기본적 생존권에 대한 의식이 사회 전반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를 지켜본 무위당은 자유권과 생존권이 같이 있을 때만 인간의 존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무위당은 이것을 ‘생명’이라고 선언했고 1970년대 중반 이후 무위당 휘하의 원주그룹의 운동은 ‘생명론에 입각한 협동적 생존의 확장’의 방향으로 전환을 모색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다.
 
생존권 문제가 사회적으로 큰 반향을 일으킨 또 하나의 사건은 1975년에 가톨릭농민회에서 실시한 쌀 생산비조사사업이었다. 그해 재해대책사업위원인 박재일 아우가 가톨릭농민회 전국 부회장에 선출되었는데, 그는 부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가톨릭농민회원들을 대상으로 정부로부터 받는 수매 가격이 생산비를 보장하고 있는지 조사하는 일을 시작했다. 당시 정부에서는 식량증산을 위해 농민들에게 강제로 일반 벼 대신 다수확 품종으로 입증되었다는 통일벼를 심게 했다. 모내기철이 되면 공무원들이 농촌에 파견돼 일반벼 모판을 전부 수거해 갈 정도로 통일벼 심기를 강요했다.
 
가톨릭농민회에서는 전국의 26개 농가를 대상으로 일반벼와 통일벼 재배농가를 나누어 조사를 진행했다. 조사원들의 사전교육은 원주 가톨릭센터에서 진행되었다.
 
조사원들은 한 해 동안 벼농사에 들어가는 비용을 매월 조사해 추수가 끝난 뒤 합계해 쌀 생산비를 발표했다. 쌀 한가마니 80킬로그램 기준으로 통일벼의 경우 2만 4335원, 일반 벼는 2만 7639원이 나왔다. 여기에 농민들의 적정 이윤을 더하면 최소 통일벼는 2만 8727원, 일반 벼는 3만 2614원이 적정 생산비라는 계산이 나왔다. 그런데 정부의 수매가는 1만 9500원이었다. 농민들이 농사를 지을수록 손해가 나는 이유를 명확하게 밝혀낸 것이었다.
 
쌀 생산비 조사사업은 농민들이 자신들의 권익을 보장받기 위해 협동하고 단결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주었다. 이후 농민들은 정부에 쌀 수매가 인상을 요구하며 가톨릭농민회를 중심으로 생존권 보호를 위해 단결하기 시작했다.
 
무위당과 한살림 회장을 지낸 박재일 선생
 
버스 안내양의 삥땅이 노동자의 생존권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만 한 권리였다면, 쌀값의 적정 생산비 보장을 요구하는 목소리 역시 농민들의 생존권과 생명권을 존중하라는 요구임에 다름이 아니었다.
 
1976년 2월에 가톨릭농민회 강원지구연합회를 만들었는데 초대회장에 무위당 선생의 대성고등학교 제자이며 재해대책위원회 상담원으로 활동한 김상범이 맡았다.
 
“내가 재해대책에서 일을 할 때는 주로 농촌파트였어요. 가톨릭농민회와 연대하여 쌀이나 고추, 고구마 같은 농산물가격 보장 문제라든가, 유기농 문제라든가, 그 다음에 농민들의 권익문제라든가, 농업협동조합의 민주화 문제 등 관련이 많았어요. 우리가 하는 일이 가톨릭농민회와 연관되는 일이 많으니까 원주교구를 중심으로 가톨릭농민회 강원지구연합회를 만들 게 된 것이죠”
 
남한강 대홍수와 재해대책사업위원회 설립
 
1972년 남한강 수해로 물에 잠긴 가옥들
 
1972년 8월 남한강 유역의 집중폭우로 원주교구 산하 탄광 지대와 제천, 단양지역 등 남한강 유역의 13개 시군이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8월 18일과 19일 이틀 사이에만 450밀리리터의 물 폭탄이 쏟아져 원주교구 관할 대부분의 농촌 마을이 물에 잠겼다. 당시 수해 피해는 사망자 66명, 부상자 330명, 수재민 수는 14만 5천명에 달했다. 침수된 건물만 5만이 넘어 재산피해만 133억 원으로 집계됐다.
 
수해를 당한 농촌지역에서는 농경지 4984정보가 유실 또는 매몰되었다. 쌀을 보관하는 농협창고에 물이 가득 차 긴급하게 물에 불은 쌀을 가래떡으로 만들어 수재민들에게 나눠주기까지 했다.
 
폭우가 물러가자마자 나는 지학순 주교님을 모시고 원주 교구 수재현장을 둘러보았다. 수마가 할퀴고 간 재해 현장은 처참했고 시, 군 공무원들도 복구를 위해 무엇부터 손을 대야 할지 엄두를 내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지 주교는 교구차원에서 수해복구사업을 추진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재해대책사업위원회’였다.
 
지학순 주교는 긴급구호 활동을 전개하여 식량과 의류, 천막 등 1천만 원에 달하는 물품을 수해지역에 보냈고, 대규모 수해복구사업을 위해 세계 각국의 가톨릭 구호기관에 지원을 호소했다. 그해 11월 26일에 지 주교는 서독을 방문해 서독 주교단 주선으로 미제레오와 유럽 카리티스와 대규모 구호자금 지원에 대해 협의를 가졌다. 당시 독일에는 종교세라는 세금이 있어서 천주교나 기독교 신자가 종교세를 내면 각 종교단체는 이 중 일부를 저개발국가의 선교 지원활동으로 썼다.
 
그런데 독일 주교 중에는 국민을 탄압하는 독재국가 한국에 구호자금을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주교가 있었다. 그러자 회의 도중에 지 주교가 벌떡 일어나 “지금 당신이 한국의 정치를 운운하면서 나한테 도와주겠다, 못 도와주겠다 돈 얘기를 하는데, 그 돈이 당신 돈이냐? 그 돈은 독일 국민들이 좋은 곳에 써달라고 세금으로 낸 것이다. 종교적으로 애기하면 그건 하느님의 돈 아니냐? 그런데 한국의 국내 정치 때문에 돈 주는 게 아깝다고 하니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말하고 회의장 밖으로 나와 버렸다.
 
그리고는 독일의 유력 일간지 기자들을 만나 “독일 국민들이 선한 마음으로 종교세를 내서 어렵고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하고 저개발 국가 원조에 쓰도록 했는데, 그 돈의 일부를 홍수 피해로 고통 받는 한국의 수재민들이 자립해서 일어설 수 있도록 원조해주면 좋겠다”는 인터뷰를 하고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독일 신문에 지 주교의 인터뷰 가사가 실렸고, 고통 받는 한국의 수재민들을 도와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원주교구에서는 독일 신문에 그런 기사가 실렸다는 것은 나중에 알게 되었다. 1972년 12월 말에 미제레오와 카리타스는 이전까지 소규모로 진행된 구호자금 지원 관행을 깨고 291만 마르크(약 3억 6천만 원)이라는 당시로서는 단양군 1년 예산에 맞먹는 긴급구호자금을 원주교구에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지학순 주교는 무위당을 불러 이 돈을 어떻게 써야할 지 의논하였다. 무위당은 "그 돈으로 물고기를 사서 주면 한 끼를 맛나게 먹고 말겠지만, 물고기를 잡는 법을 가르쳐 준다면 스스로 물고기를 잡아서 내내 맛난 식사를 할 수 있지 않을런지요” 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무조건적인 구호가 아니라 스스로 자립하겠다는 노력의 대가로 지원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시에는 홍수 피해를 당한 지역에 밀가루와 옷가지 등 식량과 물품을 무상지원 하는 것이 일반적인 구호 방식이었지만, ‘배고픈 사람에게 생선을 주는 대신, 생선 잡는 방법을 가르쳐줘야 한다’는 전해오는 말씀에 공감하면서 재해대책사업을 통해 이를 실천해보기로 결심했다. 한국전쟁 이후 교회가 밀가루와 옥수수 등의 구호물자를 나눠주면서 신자들을 끌어 모았던 방식의 구호활동은 하지 않기로 원칙을 세웠다.
 
“교회는 이해관계로 장바닥 같은 성전이 아니며 신앙을 강요하거나 돈과 그것을 바꾸는 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지학순 주교의 생각이기도 했다. 두 사람은 수해를 당한 사람이 스스로 해야 할 일을 찾게 만든 뒤 그 대가로 쌀이나 일당을 주는 방식으로 사업을 전개하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첫째, 여름에 수해가 났기 때문에 식량지원을 최우선으로 한다.
둘째, 수해로 소실된 농토를 복구하여 농사를 지을 수 있게 한다.
셋째, 농민의 소득원을 개발한다.
 
1973년 1월 지학순 주교는 종교, 행정기관, 교육계, 언론계 대표 등을 망라해 남한강 유역의 수해복구사업을 추진할 재해대책위원회 중앙위원회와 집행위원회를 만들었다. 중앙위원회 위원장은 지학순 주교가 맡았고 위원으로는 원주교구 소속 신부와 평신도 대표, 피해지역인 강원도와 충청북도 행정기관의 실장급 공무원들을 참여시켰다.
 
1월 22일에 지 주교는 재해복구사업을 집행할 집행위원회를 구성했는데 위원장에 나를 임명했고, 원주교구 사목회가 힘을 실어주었고, 무위당 선생의 휘하에서 협동조합운동을 해온 원주교구 청년회 출신의 젊은이들을 현장에서 사업을 진행할 실무요원인 상담원으로 임명했다. 상담원은 농촌사회운동 경험이 있고, 원주교구의 사업을 이해하고, 봉사 및 희생정신이 투철한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훗날 민주화운동과 협동조합운동의 상징이 된 ‘원주그룹’(‘원주캠프’라고도 부름)의 주축이 되었다.
 
농촌사업은 박재일, 이한규, 김상범, 정인재, 이우근, 홍고광이 담당했고, 한우지원사업에는 장상순, 광산사업에는 이경국, 교육사업에 김헌일이 선발되었다. 중앙위원회 위원장인 지학순 주교는 내가 주재하는 집행위원회에서 결의된 사항을 보고하면 이를 추인하였으며 각 사업장에 파견된 상담원들이 일을 추진하는 방식으로 체계를 세웠다.
 
천주교 원주교구 재해대책사업위원회(1973년)
 
재해대책 사업의 실무요원들의 명칭을 상담원이라고 한 이유는 농촌마을에 있는 부락지도자 또는 지도원 등의 명칭이 관주도하에서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자세로 오해받을 수 있는 용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재해대책사업위원회에서는 농민과 동고동락 하며 농민을 가르치기보다 의논의 대상으로 다가가기 위해 실무요원을 상담원이라고 불렀다.
 
상담원의 역할은 마을이 안고 있는 문제를 종합 분석하고, 마을 주민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며, 마을 지도자를 육성하는 일이었다. 재해대책위원회는 마을지도자 교육에 중점을 두었다. 무위당은 각 지역에 파견된 상담원들에게 마을의 문제를 조사하고 난 뒤 맨 끄트머리에 반드시 “당신이 위급한 상황에 처하면 이 동네 누구와 상의합니까?”라는 질문을 하게 했다.
 
그러면 주민들 입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이름이 있는데 이 사람이 실질적인 마을 지도자라고 생각했다. 상담원들은 이름이 많이 나온 사람의 집을 찾아가 “이번에 마을을 위한 이러이러한 교육이 있는데 선생님이 와주셨으면 좋겠다. 선생님이 오셔야 이 마을에서 말이 통할 게 아니냐”고 설득한 뒤 마을 대표들을 원주교육원에서 2박3일 교육을 시키면서 재해대책사업에 적극 동참하는 마을 지도자로 육성하였다.
 
마을 대표들은 한 달에 한 번 정도 원주에 모여 그간 진행된 활동 상황이나 결과 등을 서로 보고하고점검했다. 이때 무위당 선생은 그 모임에 나가 농민들의 얘기를 경청하고 격려했다.
 
부락 단위로 협동 조직이 구성되었고, 주민들이 서로 협동하면서 조화롭고 인간적인 공동체를 만들어 가기 위해 노력했다. 마을의 모든 일들이 회의를 통해서 결정됨으로써 민주적이고 협동적인 마을로 변해갔다. 마을 간에도 연대해 지역 협동 운동이 생겨났고, 신협, 농촌협의회, 광산협의회 등 광범위한 협동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마을에 신뢰가 쌓이니까, 자금이 모이고, 차츰 인근 마을에서도 같이하자고 나서고, 자연스럽게 마을 연대가 이뤄졌다.
 
이때 주요 강사로는 마을 지도자 교육에 장일순, 농업문제에 농촌문제 연구소의 이우재, 부락개발 사업에 건국대 김병태 교수, 회계교육은 무위당의 동생인 장상순이 담당했다. 이 외에도 현장 경험이 풍부한 홍고광, 김헌일, 김상범, 박재일, 이경국, 정인재 등이 강사로 참여했다.
당시에 재해대책위원회 자문위원으로 대학과 연구소에 있는 전문가들이 대거 참여했다.
 
무위당은 우리끼리 독단적으로 일을 해서는 안된다면서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참여시키고, 특히 전문적인 사람들이 지도를 해주는 그런 체계를 갖추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재해대책사업위원회가 꾸려지기 전부터 원주그룹에서는 건국대 농촌문제연구소와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 한국가톨릭농민회 등에서 전문가를 초빙해 강좌를 가진 것이 전문가를 영입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건국대학교에서 농업경제를 가르치는 김병태 교수를 찾아가 자문위원으로 참여해달라고 부탁했다. 김병태교수는 농촌문제연구소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전 마사회장을 했던 이우재씨도 그 연구소에 있어서 김 교수와 함께 적극적으로 우리 사업을 도와주었다. 김병태 교수는 재해대책위원회가 만들어지자마자 자신이 소장으로 있는 연구소 연구원들과 함께 여주부터 남한강을 따라 거슬러 올라가며 수해지역 피해 실태를 조사한 뒤 이를 보고서로 만들어 재해복구 기초 자료로 활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광산문제는 고려대 노동문제연구소장인 이문영 교수가 지도를 해주었다. 전문가들의 도움으로 재해대책사업은 체계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무위당은 마을 주민들과 접촉할 기회가 많은 상담원들에게 수해로 피해를 본 농민들을 하늘처럼 모실 것을 강조하면서 ‘농자성군(農者聖君)’이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상담원의 역할은 새마을 지도자처럼 농민을 지도하고 가르치는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함께 머리를 맞대고 토론하고 상담하는 동료로 인식해야 한다고 말했다.
 
상담원들의 활동은 강원도는 물론 충청북도와 경기도 지방으로까지 확대 되었다. 상담원들은 열흘 이상 여러 마을을 도는 일과가 계속 되었다. 상담원들이 출장을 나가있는 동안 집에 있는 가족을 돌보는 일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온전히 부인들의 몫이었다. 상담원들은 출장에서 돌아와도 바로 집으로 가지 못하고 가톨릭센터에 모여 결과를 보고하고 평가를 받는 회의와 교육이 며칠씩 계속되었다.
 
“한 달에 열흘에서 보름은 출장이었어요. 출장에서 돌아오면 밤새 교육하고 회의하는 게 일상이니 집에서 내 별명이 하숙생이었지요. 아내가 없었으면 가정이 유지되기 어려웠을 거예요.” (한살림 초대회장 박재일)
 
재해대책사업위원회의 신용협동조합 운동
 
가톨릭원주교구의 재해대책사업위원회 활동은 수해를 입은 3개도 13개 시군에서 87개 읍면을 대상으로 1973년부터 1979년 말까지 계속되었다. 재해대책위원회는 피해가 심한 수해지구 21개 부락을 선정해 긴급 구호식량 보조사업, 전답복구 등 생산기반 조성사업, 부락개발사업, 지역사회 개발사업으로 구분해 단계적으로 구호사업을 전개해나갔다. 이 가운데 중요한 비중을 갖고 추진한 사업이 협동조합을 통한 부락개발사업이었다.
 
피해지역 주민들에게 협동조합을 만들게 해 돈이나 소를 지원한 뒤 2년 뒤에 돌려받는 방식으로 운영했다. 소를 지원하는 경우 어린 소를 받아 키우게 한 뒤 그 소가 자라 아기를 낳으면 소는 키운 사람이 갖고 낳은 아기 송아지로 갚게 했다. 그러면 그 송아지를 다른 사람에게 빌려주어 똑같은 방식으로 상환하게 했다. 이것은 피해를 당한 주민들이 자립해 일어서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당시 원주 원성지역의 농촌 마을 상담원으로 활동했던 무위당사람들 전 이사장인 정인재의 말이다.
 
“재해대책사업을 하면서 자금을 지원해줄 때는 무상 지원이 아니고 2년 거치 3년 분할 상환하는 조건으로 자금을 지원했어요. 꼭 협동조직을 통해서 하고 개인에게는 절대로 자금을 지원하지 않았죠. 자발적으로 구성원들끼리 우리는 무슨 작목반을 어떻게 운영할 것이고, 자금은 무엇을 위해 얼마가 필요하니까 대부신청을 할 것이고, 이런 것들을 상담원이 함께 도와줘서 회의하고 규약을 만들었어요. 규약을 만들고 회의를 통해서 결정된 사항만 집행하고 회의록에 꼭 남기도록 했죠. 당시만 해도 이장이 마을주민 도장을 갖고 있었어요. 그래서 면사무소에서 어떤 내용에 “도장 받아와라”하면 이장이 다 찍던 때였죠. 그때 우리는 회의록에 스스로 도장 찍고 날인하게 했어요. 결론은 이 자금은 꼭 협동조합을 통해서만 주고 공짜 없이, 노동의 대가로 준다는 원칙에 의해 사업을 집행했습니다.”

재해대책사업위원회는 농촌에 한우를 지원하고 이듬해에 아기를 낳으면 송아지를 받아 다른 농가에 보급했다. 재해대책사업위원회는 1973년 남한강 수해복구사업과 한우지원사업, 광산지역 사업을 통해 수해를 입은 농민과 광부를 위한 긴급구호사업을 추진하는 한편, 농촌과 탄광마을에 신용협동조합 설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당시 농촌이나 광산촌에 사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어 하는 것은 고리채였다. 은행 문턱이 워낙 높다보니 가난한 서민들은 높은 이자를 주어야만 돈을 빌릴 수 있는 고리채의 유혹에 빠져 나중에는 이자를 감당하지 못해 가산을 탕진하는 경우가 속출했다. 사채나 고리채만 전문으로 하는 금융회사가 원주 중앙동에 지사를 둘 정도였다.
 
무위당 선생은 “협동조합은 민주주의를 배우는 훈련장”이라고 말하면서 고리채에 고통 받는 가난한 서민들이 자립해서 서로 돕는 신용협동조합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신용협동조합은 서민들이 십시일반 푼돈을 저축한 돈을 자금으로 만들어서 꼭 필요한 사람에게 빌려주어 그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돕는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예금한 사람에겐 은행보다 더 높은 금리를 주고, 돈이 필요한 사람에겐 은행보다 더 쉽게 빌려 쓸 수 있게 했다.
 
농촌에서 가장 인기 있는 사업은 한우사업이었다. 소를 키우는 방법은 농민 모두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 온 가족 다 합심해서 할 수 있는 사업일 뿐만 아니라 계산도 크게 어렵지 않았다. 특히 키우던 소가 병에 걸려 죽는 것이 축산업의 큰 진입장벽이었던 그 시절, 원주 한우사업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었다. 무위당 선생의 아우인 장상순이 상담원으로 배치되었고 그와 더불어 수의사인 최규창 군이 농가에서 연락만 보내면 즉시 오토바이로 농가를 찾아 진찰하고 적합한 처치를 지시해 모두 안심할 수 있었다.
 
최규창 군은 원래 원주시의 축정계장으로 근무하던 공무원이었다. 그런데 1974년 지학순 주교님이 긴급조치법 위반으로 군법회의에서 12년 언도를 받고 감옥에 가게 되자 당시 교회의 회장이었던 최규창 군은 언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기에 미리 직장에 사표를 냈다. 교회 활동에 지장이 없도록 준비한 것이다. 이후 가축병원의 수의사로 일하고 있던 차였다. 이 분은 나의 예상대로 2백 여 세대의 한우사육농가를 순회하고 비상시 왕진 진료하는 철저한 활동으로 한우사업을 궤도에 올려놓았다. 이런 열성과 정성을 바탕으로 농민들의 신뢰는 나날이 크게 두터워졌다.
 
“농민들이 교육을 통해 신협의 원리를 알게 되니까 마을 주민들이 작목반 회비나 대동계 이런 돈을 모으고 조합원들이 출자해서 신협을 만들었어요. 진광학원의 협동교육연구소에서 임원교육, 실무자 교육을 했어요. 그러면서 부락민들의 의식을 깨우친 거죠. 전처럼 이장이 동네 주민들 도장을 갖고 있던 것들이 바뀌어 갔고요, 면사무소에서 보기를 주민들이 전에는 말을 잘 들었는데 이후에는 자꾸만 묻고 따지기 시작한다면서 불편해하더라고요.”(정인재 전 무위당사람들 이사장)
 
탄광촌에서 광부들의 의식을 일깨우다
 
당시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마을이나 탄광촌에서는 생활필수품이 여러 단계의 유통 과정을 거치다 보니 소비가격이 3배 이상 비쌌다. 이 문제를 해결해준 것이 마을 사람들이 공동구매해서 필요한 물건을 싼 값에 사서 쓸 수 있는 소비자협동조합이었다. 그 결과 많은 농촌과 광산촌에 산용협동조합, 소비자협동조합이 만들어졌다. 특히 광산에서 고리대금으로 인한 피해는 사회문제로 지적되기도 했는데, 재해대책위원회는 고리채로 시달리는 탄광촌에 구판장을 만들어 자체적으로 협동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는 기반을 만들어 주었다.
 
무위당 선생의 명을 받고 태백 광산에 파견돼 10년 넘게 광산 신용협동조합운동에 헌신한 이경국 무위당만인회 고문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했다. “원주 시내에서 건축자재 장사를 잘하고 있는 저를 무위당 선생님이 주교관으로 와달라고 부르셔서 가보니까 지 주교님과 함께 계셨어요. 무위당 선생님이 경국아, 너 사람 낚는 어부 한번 해봐라. 광산에 가서 광부들 모시고 일 좀 해다오. 제가 누구 명인데 거절하겠어요. 한 달 뒤 저는 장사를 접고 보따리 하나 짊어지고 광산으로 갔어요. 그때 태백탄전에 20만 명의 광부들이 있었습니다. 3년 동안 광부들을 설득해서 협동조합 교육을 시키고, 신용협동조합을 15군데 만들고, 광산의 물가가 너무 비싸서 생필품을 싼 값에 공급할 수 있는 소비조합 15군데를 만들었어요. 광산촌에 지학순 주교님이 노동회관을 크게 지어주셔서 소비자협동조합 사무실을 거기다 두고 1층에는 광부들이 사용할 생필품을 잔뜩 쌓아놓고 공급하는 일을 15년 협동조합운동을 했습니다.”
 
탄광촌에서 신협활동에 헌신한 협동운동의 선구자들
 
당시 광산촌 노동조합 중에는 회사와 유착관계에 있는 어용노동조합이 많았다. 이경국은 장성, 태백, 도계, 고한 지역의 탄광촌을 다니면서 조합원들의 의식을 바꿔놓고 민주적으로 지도자를 뽑고, 노동금고를 만드는 등 신용협동조합운동이 광산에 뿌리내리는데 헌신했다.
 
광부들은 교육을 통해서 자기들이 사 먹고 사 입는 것, 생필품들이 여러 유통조직을 통해 마을까지 도착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유통단계를 줄이는 방법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소비조합의 원리에 의해서 마을주민들이 조합에 가입해 공동구매사업을 시작했다. 그 전에는 다섯 단계를 거쳐서 마을까지 왔다면 세 단계로 줄이는 방법을 찾은 것이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광산 소비자협동조합이다.
 
우리는 신협을 만든 경험이 있으니까 그 경험을 토대로 소비조합을 만드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소비조합을 하면서 물건 값을 줄였는데 나중에는 지역의 소비조합들이 서로 연대하는 광산소비조합협의회와 농촌소비조합협의회로 발전했다.
 
이때에도 무위당 선생이 중점을 둔 것은 교육활동이었다. 재해대책 상담원들은 한 달에 한 번씩 원주 개운동에 있는 가톨릭원주교구교육원에 모여 협동조합운동을 적극적으로 추진할 수 있는 교육을 받았다. 신협운동이 본격적으로 추진된 1975년부터는 신협임원교육과 실무자 회계교육, 조합원 및 광산 부녀자 교육이 활발히 추진되었다.
 
무위당 선생은 협동을 주제로 한 교육을 할 때마다 “우리가 연대의 관계 속에서 유기적인 관계 속에 있으면서, 헤어질 수 없는 관계 속에 있으면서, 화합과 협동의 논리라는 시각으로 봐야만 우리가 존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광산지역 지도자들인 노동조합 간부들도 차츰 달라졌다. 우리의 의도가 광부들의 생계와 노동분야 전체에 큰 변화를 주는데 있음을 알게된 것이다. 이를 통해 광산지역의 처참한 노동복지를 정상궤도에 올릴 수 있다는 확신이 생기자 이경국 광산부장과 손잡고 단결해 나가자는데 일치해서 활동하게 됐다. 그 성과는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컸다. 전국광산노동조합위원장에 당선되고 한국노총위원장까지 당선시켰다.
 
경제적으로도 광부들의 실질소득과 사회환경 변화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광산지역이 ‘막장’이 아닌 최소한 인간생활이 보장받는 사회로 바꿀 수 있다는 신념 속에 희망을 갖는 광부들의 생활을 볼 수가 있었다. 나는 지금도 그 때 이경국 부장과 손잡고 고생하면서 광산 노동자의 복지를 위해 힘써가던 지도자들을 잊을 수가 없다. 애국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 서로 손잡고 일하던 거룩한 분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인사를 드린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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