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69호] 나의 회고록 '생명·협동운동으로 꽃 피운 무위당 정신 - 김영주 편 최종회'
등록자 교육담당 등록일자 20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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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회고록
 
- 김영주 편 최종회 -
생명·협동운동으로 꽃 피운 무위당 정신
 
글 김영주 무위당만인회 고문
 
 
재해대책 사업 종료 이후의 변화
 
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에 저항하며 민주화운동을 후원하고 이끌어온 무위당은 민주 대 반민주, 보수와 진보로 나뉘어 이념이 다르면 서로를 적대시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아 극렬하게 투쟁하는 방식으로는 사회문제가 해결될 수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극한 이념 갈등은 자칫하면 사회 안정과 국가 안위를 명분으로 독재를 일삼는 정권에게 그들의 체재를 더욱 강화시키는 빌미를 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박정희 정권이 말기에 접어든 1977년경부터 무위당은 종래의 투쟁적인 민주화운동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이즈음부터 운동의 방향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무위당은 모임에 나오면 “이제부터는 민중의 자유권과 생존권을 위해 권력과 싸우고 공평하게 나눠먹자고 투쟁하는 단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민주화도 중요하지만 앞으로는 경쟁으로 치닫는 산업사회의 모순을 극복하는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특히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이 말을 들으면서 속으로 ‘선생님이 우리들에게 운동의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고 지시하는 말씀이구나’라고 생각했다. 이즈음 무위당은 강연장에서 ‘지구’, ‘땅’, ‘생명’, ‘살림’이라는 용어를 많이 사용하면서 산업화로 병들어 가는 지구를 살리려면 땅부터 살려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1970년대 수많은 농민들이 다수확 생산을 독려하는 정부의 농업정책에 의해 농약과 화학비료의 남용으로 쓰러져가고, 토양이 황폐화되면서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을 목도한 무위당은 자본주의 사회든 공산주의 사회든 자연의 약탈과 파괴에 눈을 감고 있는데 그렇게 가서는 지구의 파멸밖에 남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위당은 자유권과 생존권을 기반으로 인간과 자연이 공생하는 운동을 ‘생명’이라고 명명하고 1970년대 후반부터 세상을 떠나기까지 이 운동을 추구했는데 이것이 ‘생명운동’이다.
 
70년대 말 협동조합 교육 모임에서 무위당이 한 말이다.
“반독재운동을 계속하다 보니까 종전의 맑스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그것 가지고는 문제의 해결은 물론이고 악순환이 계속되겠더란 말이야. 농약, 비료를 마구 뿌리고 도시산업화를 꾀하는 것을 보니 이 강토 전체가 황폐화되겠더라고. 환경도 살고 우리도 살자는 방향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습니다.”
 
무위당이 생명운동으로 방향 전환을 모색하던 시기인 70년대 말은 그동안 진행해온 천주교 원주교구의 재해대책사업이 완료되는 시점이기도 했다. 이 시기는 재해대책사업에 참여했던 무위당 휘하의 원주캠프 활동가와 조직원들에게도 앞으로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해야 되는 때이기도 했다.
 
그동안 원주교구에서 진행해온 모든 사업들은 외국의 지원금으로 운영되어 왔고, 재해대책 사업 상담원들의 인건비를 지원금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 전두환 정권이 서울올림픽 개최권을 따내고 한국의 발전상이 전 세계에 알려지면서 외국의 지원단체들은 원주교구에 대해 스스로 자립할 것을 요구했다. 사업비의 상당부분에 원주교구의 재원을 투입해야 할 시기가 온 것이다.
 
하지만 그때까지도 원주교구의 재정을 고려할 때 공익적인 사회사업을 외부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추진하기란 불가능했다. 이런 가운데 원주교구의 사회개발사업을 두 차례나 지원했던 네덜란드 원조단체 세베모가 세 번째 지원을 중단하면서 교구의 사업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동안 천주교 원주교구에도 변화가 있었다. 1970년 초만 해도 9명에 불과했던 한국인 사제(방인사제)가 70년 말에는 외국인 사제보다 많아지면서 교회의 선교적 측면을 강조하는 방인사제 사이에서 평신도 중심의 재해대책사업에 대해 비판적 인식이 커지기 시작했다. 신부들 중에는 “교회가 외국에서 돈을 받아왔는데, 왜 저들이 마음대로 쓰게 하느냐”는 반감을 갖는 신부도 있었다.
 
물론 지학순 주교의 생각은 신부들과는 달랐다. 해외원조는 교회를 보고 보내준 것은 맞지만, 재해대책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라고 보내준 것이기 때문에 재해대책의 운영과 활동은 독립적이어야 하고, 그 목적에 맞게 조직을 구성해 자금을 집행하는 것이 합당하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사제들은 교구 내의 모든 사업은 교회가 중심이 되어 진행되어야 하며, 재해대책사업도 사제들이 담당하고 있는 교회나 벽지에 있는 공소 지역을 우선적으로 배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78년에 일부 사제들은 공소사목부 창설을 주도했다. 공소사목부는 재해대책사업위원회에서 하고 있었던 한우사업 일부를 맡아서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원활하게 진행되지 못해 1년 만에 재해대책위로 다시 이관되는 혼선을 빚기도 했다.
 
70년대 말에 이르자 재해대책위원회가 했던 일을 신부들이 중심이 되어 해야 한다는 주장이 표면화되기 시작하면서 원주그룹의 고민이 더욱 깊어졌다. 원주그룹 내에서도 더 이상 신부들과 갈등하는 것은 지역사회를 위해서 바람직하지 않다는 의견이 대두되었다. 나도 이렇게 가다가는 신부들과 원주그룹 사이에 갈등의 골이 깊어질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나서서 이제부터는 신부들과 함께 사업을 해보자고 제안했다.
이를 위해 먼저 수재민 지원 사업이 종료되는 시점에서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해체하기로 결정했다. 1979년 9월에 재해대책사업위원회는 중앙위원회를 열어 남한강사업과 한우지원사업, 원주원성사업에 대한 종합보고를 통해 재해대책사업의 성과와 한계를 진단하는 세미나를 갖고 7년간의 재해대책사업을 종료했다. 그해 11월 재해대책위원회는 신부들이 주도하는 사회개발위원회로 바뀌게 되었다.
 
지학순 주교는 사회개발위원장에 이흥근 신부를 임명하였으며 나의 직책은 사회개발위원회 사무국장으로 변경되었다. 원주교구에서는 사개위 활동에 사제들의 입장이 최대한 반영되도록 조직을 개편했다. 이로써 조직의 다수를 원주교구 내 신부들이 점하게 되었다. 이는 재해대책사업위원회를 주도했던 무위당 휘하의 원주그룹이 한 발 물러나고, 결과적으로 재해대책위원회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했던 나를 비롯한 이경국, 김상범, 김헌일 등 원주그룹 핵심 멤버들의 사임과 재해대책사업에 참여했던 외지인들이 탈원주(脫原州)를 하게 되는 요인이 되었다.
 
그 뒤로 사회개발위원회는 몇 차례 진통을 거쳐 원주교구 사회사업국 사회개발부로 재개편하는 일련의 과정을 겪게 되었다. 이것은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이 원주그룹과 사제 간의 인식차이와 갈등을 극복하고자 고심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사회개발위원회 시절 행사장에서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과 함께
 
1980년대 들어 전두환 정권은 무위당 휘하의 원주그룹과 원주교구 사제들 사이를 이간질 시키려는 비열한 공작을 벌였다. 중앙정보부와 경찰, 보안사가 연합해서 무위당과 원주캠프에 불만을 갖고 있는 사람들에게 “장일순 그 빨갱이 같은 사람이 교회를 붉게 물들이고, 원조 받은 교회 돈을 자기 맘대로 쓰고 있는데, 왜 저들을 내버려두냐. 교회는 열심히 기도만 하면 되지 세속의 영역인 사회문제에까지 깊숙이 개입할 필요가 있냐”하면서 치졸하고도 다양한 방법으로 이간질 공작을 시도했다.
 
전두환 정권의 폭압성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무위당은 정권의 방해 공작으로 원주그룹과 원주교구가 서로를 불신해 지역사회가 분열돼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1983년 무렵 정부의 공작은 극에 달했다. 나의 고민도 깊어졌다. 어느 가을 날 저녁 원주교구청 사무실 창가에서 어둠이 내리는 거리를 바라보면서 이런 생각을 했다. ‘이젠 내가 떠날 때가 됐구나. 17년 동안 일을 했으니 이 정도면 할 만큼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 나는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을 만나 원주교구청 일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지학순 주교는 극구 만류했지만,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알고 있었던 무위당은 “영주 아우가 그만큼 고생했으니 괜찮은 후임자를 찾으면 쉬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는 후임으로 박재일을 추천했는데 두 분 모두 동의했다. 당시 박재일은 농촌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도시의 소비자들이 직거래할 수 있는 협동조합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내 후임으로 일을 해달라는 주교님의 청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며칠 후 지학순 주교에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박재일에게 업무를 인수인계한 뒤 17년 동안 일을 해온 원주교구청을 떠났다. 박재일은 사회개발부에서 농촌소비조합 확장사업에 매진하다가 원주교구가 사회복지사업에 집중하는 방향으로 조직을 개편하면서 3년 뒤인 1986년 1월에 물러났다. 이후 순차적으로 이경국, 김상범이 사임하였다. 오랜 시간 재해대책사업위원회에서 시작해 사회개발위원회까지 헌신을 다해 일한 상담원들이 일자리를 잃고 저마다 호구책을 마련하기 위해 애쓴다는 소식을 전해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팠다.
 
지금도 내가 아쉽게 생각하는 것은 그 당시 상황이 어려웠더라도 활동가 중 누군가는 원주에 남아서 원주교구에서 해온 사회개혁운동을 지속적으로 했어야 했는데 모두들 손을 떼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이는 두고두고 안타까운 일로 남아있다. 이런 점에서 지학순 주교의 사회개혁 정신을 이어받아 원주교구 사회복지국의 책임을 맡아서 퇴임할 때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헌신한 최기식 신부께 감사를 드린다.
 
투쟁 일변도의 민주화운동에서 생명운동으로 전환
 
1970년대 후반에 무위당은 수재민 지원 사업이 완료된 이후 원주그룹이 나가야 할 방향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무위당은 감옥에서 나와 원주교구청 기획위원으로 활동하던 김지하에게 ‘생명사상 세미나’를 기획하게 하였다. 이때부터 원주그룹은 생명사상에 대한 공부모임을 시작했다. 나와 김지하, 박재일, 이경국, 김상범 등이 공부모임의 핵심 멤버였다.
 
이 공부모임에서는 향후 원주그룹이 교회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나아가야 할 때 운동의 방향을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에 대한 토론이 치열하게 이루어졌다. 토론은 1년 이상 계속 되었는데, 이때마다 ‘생명운동’이 주요 의제로 올라왔다. 가끔 토론에 참석한 무위당은 생태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 중심의 유물주의적 지구관의 인식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강조했다. 생명운동의 확산을 운동권의 투쟁적인 프로텐스탄트 방식이 아닌 협동적 방식으로, 현실의 생활태도를 바꾸는 방식으로 방향을 잡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논의가 거듭되면서 막연하고 추상적이었던 생명운동의 방향성이 점점 구체화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일부에선 생명운동이 그간 우리가 전개해왔던 운동의 패턴으로 보면 너무 느슨한 것 아니냐는 비판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특히 민주화운동 진영에서는 협동운동, 생명운동으로의 전환은 개량주의 측면이 있다면서 이런 게 무슨 운동이냐며 질타하기도 했다. 생명·협동운동은 기존의 운동에 비해서 맥이 빠진다는 의견도 있었다.
 
외부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원주그룹은 생명운동으로의 방향 전환이 필요한 시기라는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운동이 장기적으로 민중의 생활을 변화시키려면 데모하고 농성하고 저항하는 과격한 방식으로는 더 이상 안된다. 특히 지금까지의 운동이 공평하게 나눠먹자는 것에만 관심을 두고 정작 자연의 약탈과 파괴에는 무관심했다”는 각성과 함께 생명운동으로 방향을 전환이 필요하다는데 공감했다.
 
 
원주그룹은 재해대책사업부터 민주화운동까지, 지금까지 해온 운동의 성과와 한계를 진단하고, 향후 대책을 모색하는 논의 과정을 거쳐 1982년에 이른바 ‘원주보고서’라고 불리는 ‘생명의 세계관 확립과 협동적 생존의 확장’이라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보고서는 김지하가 여러 달의 회의 결과를 토대로 작성한 것으로 무위당의 검토를 거쳐 발표했다.
 
 
원주보고서는 개요, 5개 항목의 본문, 12개 항목의 주해, 10개의 각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고서의 핵심은 생명의 세계관의 관점에서 산업문명의 폐해와 인류문명의 위기를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는 방안으로 생명운동을 제시하면서 생명론의 내용과 운동의 의미를 기술하고 있다.
보고서는 피폐해진 민중의 삶과 인간성 상실, 인간과 범생명의 물질화, 대량생산 및 대량소비시대의 숭배 등이 횡행하는 근대산업문명으로 인해 죽음의 먹구름이 온 세계를 뒤덮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들의 배후에는 생명경시와 생명파괴, 반생명관의 세계관이 터를 잡고 있다고 강조했다.
 
이를 극복하고 새로운 사회적 확장을 위해 ‘생명’을 핵심적인 화두로 삼았고 이를 뒷받침할 사상으로 동학의 해월 최시형이 말한 삼경(三敬), 즉 경천(敬天), 경인(敬人), 경물(敬物)에 기반한 ‘생명의 세계관을 확립’하여 <생명·협동운동을 통한 생존의 확장>으로 운동의 전환을 표명한 것이다. 이 보고서는 이후 생명사상 세미나와 동학에 관한 연구, 그리고 독일과 일본의 협동조합 연수, 한살림 공부모임을 통해 1989년에 <한살림선언>으로 심화되고 체계화되었다
 
한살림선언(1989년)
 
무위당은 ‘생명의 세계관’이란 어떤 체제를 단순히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근대 산업문명에 내재해 있는 반생명적인 경향을 반대하면서 우리 삶에 숨어있는 생명의 씨앗을 되살리면서 이를 기반으로 평화를 가져오는 변혁운동이자 자비와 사랑의 운동이라고 역설했다.
 
무위당이 생명사상으로 운동의 방향을 전환한 것에 대해 운동권 내에서는 무위당이 민주화운동을 포기하고 변절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특히 ‘전두환도 사랑하라’는 무위당의 말에 재야 운동권에서는 비판이 쏟아지기도 했다.
 
1980년 중반에 가톨릭센터에서 있었던 ‘생명’을 주제로 한 무위당의 강연이 끝나고 질문시간에 민주화 시위로 수배돼 원주에서 숨어 지내고 있던 서울대 학생이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지금 상황에서 유기농운동, 생명운동은 넌센스라고 생각합니다. 부조리한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민주화운동을 해야 합니다. 유기농을 하면서 민주화운동과 사회운동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학생의 말을 다 듣고 난 무위당이 이렇게 말했다.
 
“민주화운동도 중요하지만 생활운동, 생명운동 이 시대에는 절실하다. 1%의 시민이 힘을 모아 이 운동을 하면 세상을 바꿀 수 있어요. 1%라는 것이 굉장히 커다란 숫자입니다. 부디 이 자리에 계신 여러분들이 생명운동을 실천해주시기 바랍니다.”
 
무위당에 대한 운동권의 비판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점차 수그러들었다. 운동권 내에서도 진보와 보수, 민주와 반민주로 나뉘어 서로 적대시하는 투쟁방식으로는 이념 갈등만 깊어지고, 경쟁과 불평등이 커지는 산업사회의 모순을 타개할 수 없다는 생각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무위당의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운동권 인사들과 지식인들이 무위당의 생명철학을 배우기 위해 원주를 찾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이 시기에 가수 조용필은 김지하 시인과 교류하면서 원주를 자주 찾았다. 조용필은 광주학살의 진상을 전해 듣고는 그 분노를 노래에 담고 싶어 했다. 특히 원주그룹의 생명운동에 공감하여 1982년 5월에 <생명> (전옥숙 작사, 조용필 작곡)이란 제목의 노래를 만들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 곡은 군부정권의 공연윤리위원회 검열을 통과하지 못하고 몇 군데 가사가 삭제, 수정되면서 조용필이 세상에 알리려고 했던 사회적 메시지가 제대로 표현되지 못한 채 상징과 은유로만 채워진 노래가 되고 말았다.
 
원주소비조합과 한살림의 태동
 
1980년대 중반에 이르러 무위당은 생명사상을 체계화하는 방법으로 협동조합운동을 민중의 저변 생활 속으로 승화시키기 위한 행동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다. 1985년 6월에 전국에서 처음으로 소비자협동조합인 ‘원주소비조합을 발족시켰다. 당시 원주소비조합의 조합원 가입 번호를 보면 1번 김영주, 2번 박재일, 3번 박양혁 순이었다. 박재일은 창립총회에서 초대 이사장으로 선출되었고, 부이사장은 신문자, 이사에는 장만자, 김숙자, 이긍래, 이경국, 박준길 등이 뽑혔다.
 
원주소비자협동조합은 원주가톨릭센터 건물의 빈 지하 공간을 무상으로 빌려서 47명의 조합원들이 사전 주문한 유기농산물을 직거래하는 형태로 시작했다. 원주소비조합은 도시 소비자와 농촌 생산자간의 협동조합 조직체가 전국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이는 원주에서 태동한 생명운동이 한살림을 통해 전국적으로 퍼져나가는 발판이 되었다.
 
이 시기에 박재일은 원주교구 사회개발부의 이름으로 독일 미제레올 선교회에 “농산물직거래 및 농산물직판장 운영사업‘이라는 프로젝트를 신청했는데, 미제레올은 프로젝트에 필요한 경비의 75퍼센트를 지원하겠다고 통보해왔다. 박재일은 미제레올로부터 첫 번째 지원금이 들어오자 1986년 12월 6일 서울 동대문구 제기동에 ‘한살림농산’이라는 이름의 20평 남짓한 쌀가게를 열었다.
 
이것이 현재 70만 명의 조합원으로 성장한 ‘한살림’의 시작이었다. 겉으로 보면 한살림농산은 그저 여느 동네의 쌀가게와 다를 바 없었다. 그러나 개소식의 풍경은 평범하지 않았다. 원주에서 달려와 누구보다 기뻐하며 축하해준 이는 무위당이었다. 최기식 신부는 가게 구석구석에 성수를 뿌리며 축성을 해주었다. 해직교수였던 리영희를 비롯하여 가톨릭농민회 관계자, 노동운동가들이 모여 개업을 축하해주었다. 바야흐로 한살림운동의 서막이 열린 것이다.
 
 
서울 제기동 한살림농산 앞에서 박재일 선생(右)
 
무위당은 한살림운동의 안착을 위해 생명사상을 정립할 ‘한살림연구회’를 결성하였고, 한살림 운영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서울 인사동 화랑에서 서화전시회를 열기도 하였다. 한살림연구회는 매달 회합을 통해 현재의 시대상황을 철저히 진단하고 성찰하면서 그 대안과 실천방향을 세우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모두 11차례의 학습모임과 4차례의 토론회를 거쳐 동학사상, 두레공동체 전통, 일본의 생협운동, 스페인 몬드라곤 공동체 등 다양한 내용을 검토하고 토론하여 1989년 10월 29에 <한살림선언>을 발표하였다.
 
<한살림선언>은 생명운동의 필요성과 지향성을 세상을 향해 천명한 것으로 무위당, 박재일, 김지하가 정리하고 최혜성이 대표 집필해 대전 신협연수원에서 열린 한살림모임 창립총회에서 채택하였다. 원주의 오랜 민중운동과 협동운동, 1970~80년대 사회운동과 민주화운동의 역사가 곧 <한살림선언>의 탄생 배경이 되었다. 올해가 <한살림선언>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34년 전 원주소비조합에서 시작된 한살림은 현재 170만 조합원이 참여하는 거대 조직으로 발전하였다. 나는 지금도 <한살림선언>을 발표하던 그날, 상기된 표정으로 한살림모임 창립총회에 참석한, 전국의 생명운동가 60여 명의 얼굴이 눈에 선하다.
 
연재를 마치며...
 
1983년에 나는 천주교 원주교구에서 퇴직한 이후 경기도 안산으로 거처를 옮겨 쉬고 있다가 3년 뒤인 1986년에 대전에 있는 신협원수원의 원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5년 동안 원장으로, 7년 동안 전문대학과정 교수로 임하면서 인생 후반기를 협동조합 교육에 열정을 쏟았다. ‘협동운동은 민주주의의 교육장’이라고 강조한 무위당 선생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면서, 집무실에 선생이 써주신 ‘사람 나고 돈 났지, 돈 나고 사람이 났냐’는 글을 걸어두고 ‘연수원을 협동조합운동가들을 배출하는 산실’로 만들고자 노력했다. 돌이켜보면 전국의 신협운동가들과 호흡을 같이 하며 서민금융운동을 통해 국민에게 봉사했던 시절이 내 인생의 행복한 날이었다.
 
신협연수원장실에 있었던 무위당 작품(현재 무위당기념관 소장)
 
나는 원장실에만 머물러있지 않고 협동조합운동에 관한 교육서를 만들어 연수생들에게 열심히 강의를 했다. 강의 말미에는 언제나 ‘협동조합운동은 사람을 모시는 운동, 사람을 사람답게 대접하는 운동, 민주주의 운동‘임을 잊지 말라고 당부했다. 연수원 직원이 10년 동안 내 강의를 들은 사람들의 수를 기록으로 남겼는데, 16만 2천명이나 되었다. 나는 전국의 신용협동조합 관련 인사들의 해외연수도 활발히 추진했다. 일본, 홍콩, 대만, 독일 등지로 외국의 협동조합 사례를 공부하기 위해 연수단을 보낸 횟수가 총 47회, 참가인원은 1200명에 달했다. 연수원장으로 10년 근무한 뒤 1996년에 정년을 맞아 퇴임했다.
 
퇴직 후 집에서 쉬고 있었는데 무위당 선생 7주기인 2001년에 원주의 후배들이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모임’을 만들려고 하니 참석해달라는 연락을 해왔다. 무위당 선생이 “내 이름으로 아무것도 하지마라”는 유훈에 따라 제자들과 후학들은 선생님 기일행사 때 모여 묘소를 참배한 뒤 근처 음식점에서 막국수와 소주를 나눠마시고 헤어지는 것이 추모식의 전부였다. 그때까지 한 일이라면 선생님 유작전을 한번 열어서 선생의 생명사상의 참뜻을 새기는 자리를 만들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의 추모식을 찾는 사람들의 수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7주기에는 200명이 넘는 추모객들이 무위당의 묘소를 찾았다. 7주기 추도식이 끝나고 많은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이제는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공식 모임을 만들어서 선양사업을 제대로 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래서 2001년에 ‘무위당을 기리는 모임’이 만들어졌고 초대 회장을 내가 맡게 되었다. 몇 년 뒤 이 모임은 좁쌀만인계로 이름을 바꿨다가 2010년 4월에 ‘사단법인 무위당사람들’로 이름을 바꿔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무위당 서화전시회에서 후배들과 함께
 
 
‘나의 회고록’을 마치며
 
세월이 빨라 내가 회고록을 쓰기 시작한지 벌써 2년 반이나 되었다. 스스로의 인생을 돌아보는 글을 쓴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물론 나라고 할 이야기가 없지는 않지만 어느 정도 수준까지 풀어야할지 고민이 되었다. 주변에서 다 알 정도로 글 솜씨가 부족한 탓에 난처하기 그지 없었다. 편집위원회에서는 내가 첫 단추를 끼워야 다음 분들이 홀가분하게 참여할 수 있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글을 쓰기로 했다. 오랜 시간 동안 고민 끝에 글을 썼는데도 도무지 두서가 맞지 않는데다 빼놓은 일이 너무 많았다. 첫 편 이후 내용 연결이 잘 되지 않고 글에 등장하는 분들 성함까지 혼동이 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마감 시간에 쫓기는 신세가 되자 마음이 무척 괴로웠다.
 
 
나와 함께 어려울 때 일한 분들에게 감사해야지. 지학순 주교님의 거룩한 뜻과 따뜻한 성품을 잘 알려야지. 무위당의 고통과 가족들의 어려움을 알려야지. 남모르게 우리 일을 도와주고도 아무 내색하지 않은 고마운 분들을 알려야지. 젊은 몸 하나만 가지고 원주에 와서 농민, 광부, 빈민촌 사람들과 함께 일한 청년들에게 감사를 전해야지. 순박하게 농사만 짓던 분들이 동네 분들과 손잡고 협동운동 활동에 참여해 애쓰시던 모습을 알려야지. 이런 다짐을 채 반도 실현하지 못하고 시간이 갔다. 이제는 나 스스로 부족함을 토로하며 참 부끄럽고 민망하기 그지 없다. 이런 시점에서 ‘나의 회고록’을 마감 하니 몸 둘 바 모르겠다. 능력이 부족하고 마음이 좁은 저를 이해해주길 바랄 뿐이다. 혹시 내용이 잘못된 점이 있더라도 웃어 넘겨주시고 ‘아하, 그런 일도 있었구나’ 하는 정도로 봐주시면 감사하겠다.
 
 
항상 미안한 것은 무위당 선생의 부인이신 이인숙 여사를 비롯해 나와 같이 일하신 모든 분의 가정이 격랑을 겪었다. 큰 어려움 속에서도 자녀들을 남부끄럽지 않게 돌보시고 동지들이 안심하고 일해가시도록 뒷받침 해주신데 대해 늘 죄송하고 감사한 마음뿐이다.
 
모든 일을 보듬어주시고 따뜻하게 보살펴주신 지학순 주교님과 무위당 선생님께 감사드리며 이 분들이 나를 지도해주신 덕분에 행복한 순간이 많았다. 힘은 들지언정 부담감 없이 일해왔다. 나와 함께 고통과 슬픔을 이겨낸 동지들도 있었다. 마침내 행복한 인생을 살아왔음을 깨닫게 됨에 대해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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