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74호] 기획특집 - 최기식 신부 사제서품 50주년_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1)
등록자 관리자 등록일자 2021.0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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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최 기식 신부 사제서품 50주년
 
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1)
 
 
 
1971년 9월 16일 원동성당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천주교 원주교구에 큰 경사가 있는 날, 세 젊은이가 사제서품을 받는 날이었다. 횡성 풍수원에서 태어나고 소신학교(중·고)부터 사제의 꿈을 키우며 15년 동안 기다리다가 신품성사를 받는 젊은이, 고향 풍수원에서 공식 첫 미사를 봉헌하며 감동되어 펑펑 울던 사람, 이 젊은이가 바로 최 기식 신부다. 사제서품 후 친구 안 승길 신부와 함께 학성동성당 주임으로 사목활동을 시작한 그는 2년 후 유학 발령을 받았으나 지 학순 주교의 구속 사건으로 예상치 않은 사제의 길을 걷게 된다. 단양·원동 주임 후, 교구 사목국장 겸 교육원장으로 재직 중, 1982년 4월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에 연루되어 구속, 3년형을 선고받은 후, 16개월 만에 광복절 특사로 풀려났다. 이후 교구 사회사목, 특히 사회복지활동에 30년 간 전념하다 2013년 원로 사목자로 물러나 ‘천사들의 집’에서 행구동 아파트로 자리를 옮겼다.
 
2021년은 최 기식 신부가 사제서품을 받은 지 꼭 50년이 되는 해다. <무위당사람들>은 최 기식 신부 사제서품 50주년을 맞아 2021년 봄 호 부터 기획특집으로 <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를 연재한다. 횡성 풍수원 성당을 다니며 6·25를 겪고 사제직을 꿈꾸었던 어린 시절부터 소신학교(중·고)와 대신학교 생활, 원주 학성동 성당과 단양 성당에서의 생활, 70년대 민주화운동, 1980년 광주항쟁으로 인한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오직 교회의 사명을 생각하며 고뇌했던 시절, 고 지 학순 주교와 무위당 장 일순 선생과의 인연, 교도소에서 교회의 사회참여와 사회복지의 필요성을 더욱 깊이 깨닫고 실천해 나가는 삶 등을 소개한다.
최 기식 신부의 삶은 1970년대 격랑의 한국 현대사 안에서 교회의 사회참여를 대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2년 전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부산 미문화원 사건뿐만 아니라, 1974년 지 학순 주교 구속 사건으로 인해 출범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결성, 민주화 운동, 노동·농민운동에도 깊숙하게 관여했다. 그는 지금도 사회복지의 중요성을 더욱 깊이 깨달으며 평생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고 있다.
 
“썩는 밀알이 될 수 있도록 기구해 주십시오.” 이 말은 첫 미사를 드릴 때 기도를 부탁하며 상본에 새겨 나누어준 말이다. 예수님을 따라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 사랑과 생명의 열매를 위해 예수님을 따르며 삶을 봉헌하려했던 그의 마음이 이 글귀에서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번 기획특집은 지난 2020년 4월부터 2021년 1월까지 최 기식 신부 사제관에서 황 도근 무위당사람들 부이사장과 김 찬수 무위당사람들 상임이사가 나눈 대담이 중심이다. 어린 시절과 소·대신학교 생활 이후부터는 대담 형태로 그의 글들을 참고하여 연재할 예정이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애정을 바라며, 성직자로서 자신을 드러내길 꺼림에도 불구하고 연재를 허락해 준 최 기식 신부에게 고마움을 표한다.
 
풍수원 성당과 어린시절
최신부는 천주교를 충청도에 처음으로 전도한 최 한일 최한기의 7대 후손이고 순교성인부부 최경환(프란치스꼬) .이성례(마리아)의 5대 후손이며 한국 두 번째 사제 최 양업 토마스의 첫째동생 최희정의 4대 후손이 된다. 증조부 4형제는 졸지 고아들이 되어 이리저리 흩어져 살다가 후손들이 나중에 친척들을 찾아 풍수원으로 모여들게 된다.
그의 아버지(고 최 관수·바오로)는 7살 때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와 어릴 때부터 풍수원 오상골과 밤골에 살았다.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바로 송 기순(안나)과 결혼해 자녀들을 낳으며 힘들게 살다 홍천 남면 쪽으로 이사해 오랫동안 살았다. 그리고 1938년 고향인 풍수원으로 다시 돌아온다.
. 깊숙한 산골 풍수원 수구대란 곳이 그가 태어난 고향이다. 풍수원으로 돌아와 수구대라는 곳에서 화전을 일구며 생활하게 되는데, 그곳에 아버지의 고종 육촌인 최 막달레나(신균섭 모친)가 살고 있어 그 집 옆에 단칸방 오두막을 짓고 그이를 의지하며 살게 된다. 그곳에서 1942년 3월 7일(음력 1. 28) 53세의 아버지와 46세 어머니의 8남매 중 막내로 최 기식 신부가 태어난다. 그가 태어나던 날은 셋째누나가 길을 떠나는 날(결혼)이었는데, 부엌에서 불을 지피면서 “노인네가 애만 낳고…” 하고 원망 섞인 푸념을 하며 울었다는 얘기는 집안에 전설같이 전해온다. 그 누님은 전쟁으로 남편을 빼앗기고 두 자녀를 키우면서 30년 후 친부모를 20년 이상 모시며 효도를 했다고 한다.
그가 여섯 살이 되든 해 6명 가족은 짐 보따리를 이고 지고, 소 한 마리 끌고 도둑 고개(현 도덕 고개)를 넘어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2리(증안리)로 다시 이사를 한다. 아버지와 형은 화전을 일구고, 산에서 숯을 굽고, 산골짜기 남의 논도 몇 마지기 부쳤다. 어머니도 봄이 되면 가족의 끼니를 위해 나물을 뜯고 밭일도 하며 겨울엔 길쌈도 해야 했다. 온 식구가 여름에 숯섬을 엮고, 겨울엔 새끼를 꼬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렇게 일을 해도 도지세 내고 나면 겨우 벼 7~8가마밖에 남지 않았다. 봄이 되면 그마저도 뚝 떨어지기 일쑤였다. 가난했지만 열심히 잘들 살았다. 학교를 다니고 주일이면 온 가족이 한 번도 빼놓지 않고 10~20여 리 되는 성당엘 함께 다녔다. 그에게 그 시절은 참 행복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모두를 앗아간 6·25 전쟁
“증안리에서도 양평 방향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갈운리라고 하는 마을이 있는데 그곳에 작은 학교가 있었어요. 그곳에는 2학년 과정 밖에 없어 1950년도엔 청운면 용두리에 있는 청운국민학교 3학년을 다녔지요. 3월부터 석 달 동안 다녔는데 6월이 되니까 선생님이 집에 가서 부모님과 같이 지내라고 그러는 거예요. 6·25 전쟁이 일어난 거지요. 그때 피란을 간다는 것이 새점터라고 하는, 지정면 풍수원성당 공소까지 갔었지요. 그 곳 회장님은 부모님이 잘 아는 분이라 그리로 갔던 것 같아요. 겨우 30리 정도 가서 4~5일 정도 있다 돌아왔어요. 돌아가 농사를 다시 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겁니다. 피란을 가도 다를 바 없다 싶을 것이라 믿기도 했을 거구요.”
 
8월15일은 큰 형이 군대를 가는 날이었다. 어머니가 만들어준 하얀 바지저고리를 입고 10여 명의 청년들과 함께 트럭에 올랐다. 태극기를 흔들고 노래를 부르며 가는데 마치 승리를 약속하며 경기장으로 향하는 것처럼 당당하고 화려한 모습으로 떠나가는 것을 보았다. 그것이 형과의 마지막이었다. 전쟁이 끝나고 다른 친구들은 속속 돌아오는데도 형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머니는 형을 보내놓고 10년 동안이나 혹시나 하고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먼 산을 향해 눈물을 훔치곤 했다. 결국 홍천 지역전투에서 8사단 소속으로 전사했다는 사실이 10년 후에나 확인된다. 가족의 가장 큰 슬픔이었다.
큰형과의 즐거웠던 추억들도 많이 기억한다. 새끼 꼬는 일을 하다가도 종종 장난을 걸면서 간질이곤 했던 일, 못 견뎌 하면서 웃던 일들이 기억에 오래도록 남아있다. 그 형을 따라 주일마다 성당을 갔고, 첫 영성체를 하는 날도 형이 데리고 갔다. 그날은 아침에 아무것도 먹어서는 안 되는데 산등성이를 넘으면서 진달래꽃을 따 먹는 바람에 다음 주일에서야 첫 영성체를 하게 된다. 형은 글방이나 학교에 간 적도 없는데 천자문을 다 외웠고, 편지도 한자로 쓸 정도로 똑똑했었다고 한다. 일도 열심히 해서 땅도 조금 사들여 그나마 집안을 일으킬 사람이었다. 동리 사람들도 칭찬이 자자했던 사람, 어머니는 눈을 감기 바로전까지도 기도해 주라고 하시며 잊지를 못하셨다.
전쟁은 평양으로 이사 간 둘째 누님부부와도 영원한 이별을 하게 했고 셋째 누님의 남편(매형)도 그해 겨울 동란 때 북으로 끌려간 후 생사도 모르고 영영 만날 수 없게 했다.
함께 지내던 셋째 누님도 6·25 때 죽음 목전까지 갔다 오는 끔찍한 경험을 하게 된다. 6·25가 날 때 잠깐 혼자서 피해갔다 돌아오는 길이었는데 국군에게 변을 당한 것이다. 누님은 열여덟 꽃다운 나이였고, 군인들에게 잡혀 농락당할 위기에 빠졌었다. 분위기가 몹쓸 짓을 당할 것 같이 느낀 누님은 한 가지 꾀를 내어 변을 당하지는 않았으나 총상을 입고 말았다.
 
“누님이 머리가 좋았는데 화장실에 간다고 말해놓고 화장실 들어가는 척하다 뒤로 도망을 친 거예요. 마구달리다가 군인이 쏜 총에 맞고 쓰러졌는데, 무릎부분 관절부위를 관통했어요. 그렇게 되니 군인들도 어쩌지를 못하고 그곳에서 붕대를 감아주고 치료를 했겠지요. 그래서 군인들에겐 당하지는 않았다고 해요. 그 누님은 정말 똑똑하기도 하지만 대담하고 독한 분 같아요. 그래도 그때를 이야기할 때는 늘 하느님의 은총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그 분은 6남매를 낳아 세 자녀를 성직수도자로 봉헌하게 되지요.”
 
전쟁은 그의 가정만이 아니고 온 마을 사람들을 흔들고 아픔과 상처를 남기며 지나갔다. 마을 인심도 흉흉하여 아주 가까웠던 이웃사촌도, 친척들도 서로 믿지 못하게 했고 온 동네가 살얼음 판 같았다.
전쟁은 또 사람들로 하여금 인민군보다 우리 국군을 더 미워하게끔 만들었다. 아군들이 북으로 진격하면서 집집마다 대대적으로 뒤지며 피해를 키웠기 때문이다. 인민군은 방에 들어와 점검할 때에도 아무피해 없이 지나갔지만, 아군들은 강아지에게 총을 쏘고, 소를 잡아가고, 동네 사람들에게 인민군에 부역한 사람을 고발하게 해 민심이 흉흉해졌다.
 
“아버지와도 친분이 두텁고 존경을 받던 내 친구 할아버지가 덤불 속에 가서 총 수십 발을 맞고 비참하게 쓰러져 있는 것도 봤어요. 육촌 형제간에 인민군이 왔을 때 협조했다고 말 한 것이 그를 죽게 만든 것이지요. 그걸 아군들, 우리국군들이 한 거예요. 또 산을 뒤져서 북으로 미처 올라가지 못한 사람들을 여러 명 끌고 와 묶어놓고 무릎을 꿇게 하고 머리를 때리는데 머리에서 피가 솟아올라요. 얼마 후에 그 사람들 데려다가 사살하고 무덤을 파서 묻었고요. 어린 아이가 보지 말아야 할 험한 모습도 본겁니다. 겨울이 되었을 땐(6·25 동란) 피란을 아예 안 가고 일본 사람들이 금을 캐가던 금광 굴, 제일 큰 곳으로 들어가 지내기도 했죠. 입구는 좁지만 들어가면 방 넓이만큼 넓어져요. 처음에 들어가면 또 바닥에 물이 흐르지만 좀 더 깊이 들어가면 물이 없어져요. 굴은 100여 m 들어가는데 가지 치듯이 여러 줄기가 있어요. 하나는 화장실로 사용하고, 두 줄기는 사람들이 거처로 사용하고, 불은 관솔을 이용하고 그랬어요. 나중에는 아군들이 총을 메고 들어와 인민군하고 협조한 사람들을 찾기도 했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네 죽이러 온 인민군인 줄 알고 도망가고, 탁자 밑에 들어가고 아수라장이 된 적도 있어요. 밖에 나갔다가 미처 들어오지 못해 비행기가 폭격하는 것도 보고, 요란한 소리와 함께 기관총 난사하는 모습도 목격하고, 폭격으로 집이 불타는 것도 보고 그랬죠.”
 
전쟁이 몰고 온 가난과 이웃 간의 불신, 갈등은 점점 더 깊어져 갔다. 그런 가난과 불신, 갈등은 바로 위의 형님을 쌀 도둑으로 누명 씌우고, 급기야 아버지까지 도둑으로 몰리며 매를 맞는 모습까지 보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나서는 먹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나 봐요. 바로 위의 13살 형님이 쌀 도둑으로 몰린 적이 있어요. 동네에서 우리를 많이 도와준 분이 있었는데, 우리가 많이 의지하고 지냈던 분,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를 불러다 일을 시키고 그랬던 그 분의 집에서 벼 한 가마니를 잃어버렸어요. 그 문제는 소문이 나서 그냥 넘어갔던 걸로 기억해요. 그런데 다른 집에서 또다시 잃어버린 거예요. 그러니 모두 ‘누가 습관적으로 도둑질을 하고 있구나.’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나싶어요. 도둑을 잡는데, 처음에는 운동화 발자국을 보고 나서, 사람들 운동화 사이즈를 전부 뒤지는 거예요. 우리 형은 볏가마니가 없어졌을 때 집에 있지도 않았고, 호저에 계신 누님 집에 있었다고 해요. 나중에 집에 오니까 형 신발을 보고 신발자국이 같다며 쥐 잡듯 13살 소년을 때리며 심문하는 거지요. 형은 매를 맞으면서도 아니라고 항변했고 알리바이를 댔지만 소용이 없었어요. 결국 아버지가 벼 한 가마니를 변상해주기로 하고 데려 왔어요. 그러고 나서 얼마 뒤에 벼 도둑 사건이 또 일어나면서 아버지까지 도둑으로 몰린 거예요. 우리 앞집에 꼽추인 아저씨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벼 가마니를 훔쳐다가 우리 집 앞 도랑에 숨겨 놓은 거예요. 벼나 쌀은 물속에 넣어도 나중에 말리면 되니까 괜찮아요. 숨긴 사람이 이야기한 거예요. 자기가 한 짓이 드러날 것처럼 뒤져 오니까 ‘아, 그거 최 서방네 앞 도랑에 보니까 뭐가 있더라. 최 씨가 그런 것 같다’고 말한 거지요. 동네에 천주교 신자가 한 집 있었는데, 그 집 남자가 여러 사람하고 함께 와서 어머니와 내가 보는 마당에서 아버지를 몽둥이로 사정없이 때리는 거예요. 그걸 보고 환장하겠더라고요. 우리 아버지가 그럴 사람도 아니고, 어머니는 아무 영문도 모르고 믿을 수 없으니 소리치며 나가서 울고불고, 그러다가 아버지는 경찰서로 끌려갔어요. 거기 가서도 또 매를 맞았대요. 그런데 나중에 꼽추 아저씨의 건너 집 어떤 분이 경찰서에 가서 사실을 알렸다고 해요. ‘사실은 꼽추가 거기 벼가 있다고 밝히기 전, 거기 가서 두리번거리며 살펴보는 것도 봤다’라고 말한 겁니다. 그 소리를 듣고 경찰이 꼽추를 데려다 ‘네가 그러지 않았느냐?’고 다그쳤지요. ‘네가 그러지 않았으면 거기 가서 두리번거린 이유가 도대체 뭐냐?’고 그러니까 그때서야 ‘자기가 그랬다’고 실토를 한 거예요. 그때 아버지가 풀려나왔고 형의 억울함도 풀렸지요. 문제는 동네 사람들은 그래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는 거예요. 어머니가 제일 억울해 하셨죠. 친형제처럼 지냈고 일요일 성당 갈 때도 같이 갔던 사람인데 어쩌면 그럴 수 있냐 하구요. 더구나 맞은편 가까운 집에서 그랬다니까 어머니는 죽어도 이 동네에서는 못 산다고 그랬어요. 집을 갑자기 사는 사람이 없어 반값에 팔고 다시 풍수원을 지나 유현1리 느루개란 곳으로 이사를 갔지요. 성당은 더 가까웠어요. 그때 억울한 것에 대한 분노 같은 그런 것을 경험한 것 같아요. 몇 년이 지나도록 그 분을 보면 인사도 안 하고 피해 다녔으니까요.”
 
그는 봄이 되면서 풍수원 광동국민학교에 다시 다니게 된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6km가 넘어 어린아이가 걷기에 꽤 먼 거리였다. 2시간 정도 걸려서 다녔다. 학교라고 해서 건물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었다. 성당이 학교고 학교가 성당이었다. 사제관 2층 25평 남짓한 공간에 4개 반, 움막 같은 교실하나가 밖에 있을 뿐이었다. 김 학용 본당 신부는 자기 방을 내 줄 정도로 헌신적이었고 몇 년 후 중학교까지 세울 정도로 교육열이 대단하셨다. 두 반을 한 교실에서 한 선생님이 가르친 적도 있다. 휴전이 되면서 성당을 통해 구호품들이 나누어지고 모든 아이들이 학교에 몰려오면서 평온을 찾게 되지만 가난과 질병은 여전히 꼬리를 물고 있었다.
 
“어느 날은 밥을 굶고 학교에 간 적이 있어요. 밤에 부모님이 다투는 낌새를 알기는 했는데 아침이 됐을 땐 두 분 모두 안 계시는 거예요. 아버지는 일터로 가시고 어머니는 식량을 빌리러 가신거지요. 기다리다가 아침을 굶고 그대로 학교에 간 거예요. 물만 먹고 저녁때 돌아오는데 저녁 하늘이 노란 것을 처음 느낀 것 같아요. 아침에 떠날 때는 조금 화가 났지만 돌아 올 때는 그렇지 않았어요. 들어와서 부엌에 밥 한 그릇을 바가지로 덮어놨는데 조밥이었지요. 허기가 진참이라 물에 말아 고추장 반찬으로 해치웠어요. 그러고는 부모님이 들어오기 전 바로 잠이 들어버렸나 봐요. 그날 저녁 아버지와 어머니가 기도하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지요. 많이 미안해 할 거라 생각했어요. 밥을 굶겨 어린 것을 학교에 보내야 했으니 얼마나 마음이 아팠겠어요. 35년이 지나고 나서 어머니한테 물어봤어요. 제가 잠들어 있을 때 기도하기 전 그때 어머니 마음이 어떠했었냐 하구요. 아흔이 훌쩍 넘었는데도 눈시울을 붉히더라고요.”
 
그때는 군인들이 먹다 버린 밥이나 쌀을 주워다 먹고, 죽은 소 껍질과 말 껍질까지 끓여 먹을 정도로 먹을 것이 부족하던 때였다.
6·25가 끝나고 탄피로 돈을 버는 사람들도 있었다. 포탄 피는 처음엔 애써 찾으러 다니지 않고 눈으로 보고 주울 정도로 밭에도, 산에도 널려 있었는데 그걸 사러 오는 사람들이 많아지며 돈벌이가 되었다. 기관단총 탄피뿐 아니라 포탄과 수류탄도 도처에 널려 있었다. 친구들까지 탄피를 모으다가 수류탄을 잘못 다뤄 손목이 잘리고 한 명은 눈이 멀기까지 한 것을 보았다.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농사를 짓던 동창생은 포탄으로 물고기를 잡다가 터지는 바람에 눈도 멀고 몸을 크게 다쳤는데 몇 년 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아이들은 미군들이 지나가면서 던져주는 초콜릿과 커피를 처음 먹었고, 귤껍질도 처음 봤기 때문에 그걸 주워서 먹을 수 있나 씹어보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그는 이렇게 먹을 것이 부족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어머니가 어떤 청년을 3~4개월 동안 낟가리에 숨겨놓고 먹을 것을 대 준 것을 기억한다. 그는 청년을 형이라고 불렀고 둘은 밤이면 좋은 친구가 되었다. 그가 청년에 대해 아는 것은 한동안 인민군에 예속해 있었고 북으로 갈 마음이 없어 남은 사람이라는 것이 전부다. 어디에서 왔고, 누구인지, 또 고향은 어디인지 묻지도 않았다. 어머니 부탁도 있었지만, 누구에게도 그 청년 형에 대해 이야기 하지 않았다. 어느 날 그 형은 부모님께 큰절을 하고 떠난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사랑받는 막내 아들(50대 부모님의 막내 사랑)
“자기 부모님에 관해 이야기하라고 하면 대부분 긍정적으로 하겠지요. 나는 좀 다른 것 같아요. 어머니에게 듣기로는 자식 키우는 문제에 있어서 아버지가 다른 사람들을 따라가지 못한다고 할까, 막내를 제외하고는 자식들을 한 번도 업어주지 않았다고 그래요. 나는 신부가 될 때까지 아버지 말씀을 거역하지도 않았지만, 아버지도 나에게 야단치는 일은 별로 없었는데, 우리 형한테는 나만 편애한다고 할 정도로 매일 야단을 치곤했어요. 그래서 내가 우리 형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죠. 그것은 아마도 아버지의 뜻대로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시지 않았을까 하고 짐작은 해요. 아무튼, 자식을 키우는데 있어서 아버지는 좀 달랐던 것 같아요. 내가 신학교를 갈 때도 아버지는 내심 서울로 가는 것을 원하지 않으셨다고 생각했어요. 집안일을 정말 잘 도와주었거든요. 초등학교 5, 6학년 때 학교 갔다 오면 소꼴 다 베고, 용돈을 얻기 위해 산에 올라가 장작을 만들어 팔기도 했거든요. 6·25 때 동네 사람들이 산에 몰려가 공사장처럼 장작을 만들 때 저도 어린 나이였지만 그 사람들 반몫은 했죠. 집안에서 하는 걸 보고 내심으로 아버지를 도우며 농사를 짓고 같이 있기를 바랐을 거예요. 그런데 그것을 막을 수 없지요. 그리고 소를 키울 때 작두질을 하거나, 소죽을 끓이거나, 소 풀을 베어오거나 그런 것들은 내가 아주 적극적으로 했어요. ‘저 소는 내 거다’ 하는 생각으로요. 실제로 신학교 갈 때 그 소를 팔아서 갔어요. 방학 때 내려오면 에누리 없이 두 달 동안 집에서 밭일, 논일을 도와드렸고요. 군대 갈 때까지 그랬어요. 아버지하고의 관계는 좋았지만 뜻은 달랐던 것 같아요. 다른 형제들과의 관계는 잘 모르지만, 바로 위의 형에게는 너무 가혹하셨다는 생각이 들어요.”
 
 
소꿉친구의 죽음과 믿음
풍수원 성당에서 경기도 쪽으로 6㎞ 정도 산길을 달리다 보면 증안리라는 마을이 나온다. 증안리 길에서부터 집이 보이는데 좌측 맨 끝 집이 바로 그의 집이었다. 아주 깊은 산골, 아랫마을을 빼면 세 집이 전부였던 곳이다. 그곳에서 그와 종환이라는 친구 둘이서 학교에 다녔다. 종환이가 그보다 한 살 위였는데 10리를 걸어 함께 다녔다. 꼬마 둘이 전부였기에 종환이가 없으면 그는 학교에 가기조차 어려웠다. 학교를 가지 않는 날은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며 시간 가는 줄 모르게 놀았다. 둘에게 자연은 놀이동산이자 주린 배를 채울 수도 있는 에덴이었다. 찔레순과 진달래꽃을 따 먹고 버찌(벚나무 열매)와 오디를 찾아다녔고, 밤과 대추, 개복숭아, 산딸기를 찾아내며 온 산을 뒤집고 다녔다. 쌍둥이처럼 지내던, 그런 단짝 소꿉친구가 6·25가 난 뒤 그렇게 좋아하던 뒷동산으로 영원히 가버리고 말았다.
 
“어느 여름날이었는데 아버지와 어머니가 일도 안 가시고 밥을 빨리 먹으라고 서두르시더라고요. 그리고 밥을 다 먹고 일어나는 데 어머니가 내 손을 붙잡으시더니 눈시울을 적시며 ‘분도야, 종환이가 죽었단다’ 그러는 거예요. 그때는 그 아이가 죽는 것에 대한 감정적인 뭐가 없었어요. 어머니가 나를 데리고 그 집으로 갔는데, 그곳에서는 울고불고 난리가 났지요. 동네 사람들이 가마니에 말아서 지게에 친구를 지고 나가는 거예요. 장사를 지내러 가는 건데 어머니하고 나는 뒤에서 졸졸 따라갔지요. 뒷동산에서 장사를 지냈어요. 그때 생각하면 어머니가 나를 데려갈 곳이 아니었을 텐데 ‘친구 가는 길 가서 지켜봐라’ 그런 뜻으로 데려간 것 같아요. 하여튼 장사 지내는 데까지 가서 묻는 것을 지켜봤어요. 그때는 애청이라고, 묘봉을 만들지 않고 솔가지를 덮고는 그냥 내려오는 게 전부였어요. 그다음부터 그 장면이 꿈에 나타나기도 하고, 생각이 아주 많이 났어요.”
 
8살 아이에게 ‘죽음’이란 단어는 너무 낯설었다. 친구가 아픈 것은 알고 있었다. 어른들에게 함께 놀 수 없으니 가까이 가지 말라는 이야기를 들었었다. 그 사이, 만나지 못한 그 짧은 시간에 단짝 친구가 떠난 것이었다. 사람들이 우는 모습을 보면서 죽음이 슬픈 것이란 짐작을 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개구지게 장난을 치던 친구가 가마니에 말려 묻힌다고 생각하니 섬뜩함과 무서움이 밀려온다. 어머니 등 뒤에 숨어서 친구의 마지막을 지켜봤다. 순식간에 장례가 치러졌지만, 이 일은 그에게 결코 작은 일도, 단순한 일도 아닌 그의 어린 마음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다주는 일대 사건이었으리라.
 
“종환이가 묻힌 산에 한동안 올라가지 못했어요. 진달래꽃을 함께 꺾으며 기어오르던 그 동산은 무서움을 주는 큰 괴물이 되어버린 셈이죠. 밤이 되면 나를 삼켜버릴 듯한 공포의 산이 되어 버렸어요. 학교도 거의 다니지 못했어요. 그 뒤로 죽는다는 것에 대해 많은 생각이 일어났나 봐요. 종환이가 그렇게 죽으니까 ‘나도 죽나?’ ‘나도 저렇게 땅에 묻히나?’ 이 생각이 아주 강하게 온 거지요. 나는 잘 모르겠는데 어머니나 누님이 이야기하는 건 그때 나에게 병이 생겼다는 거예요. 혼자 앉아서 중얼거렸던 것이 나도 생각이 나요. ‘죽으면 어떻게 하지?’ ‘죽으면 어떻게 하지?’하면서 걱정을 했어요. 계속 그 이야기(‘죽으면 어떻게 하지?’)를 하니까 하루저녁 어머니는 나를 앉혀 놓고 이야기 해 줍니다. 나는 먼저 ‘엄마도 죽나? 아버지도, 누나도 모두 죽나? 그럼 모두 죽지. 그럼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 하는 거였지요. 8살 어린 나이니까 모두 죽으면 정말 안 되는 거지요. 어머니는 그날 확실한 답을 주셨어요. ‘죽어도 우리는 나중에 모두 다시 만날 수 있단다’ 하는 거예요. 내가 병이 나게 생겼으니까 어머니께서 죽음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를, 천국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신거지요. 조금은 알고 있었지만, 다시 만날 수 있다는 확신 하나로 모든 병은 나은 거예요.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내용을 말씀해 주셨던 것 같아요. <죽음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위해 죽음 뒤에 또 다른 세상을 마련해두셨고, 우리가 죽으면 그곳에서 다시 만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하느님은 마지막 날에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주실 뿐 아니라 착하게 산 사람에게는 이 세상에서 다 받지 못한 행복과 기쁨, 무한한 사랑을 충만히 누릴 수 있게 해주시는 분이다. 그러니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는 사람이면 죽음을 전혀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하는 내용으로요. 그때 ‘아, 죽었어도 우린 다시 살아나 만날 수 있어’ 란 확신과 믿음이 생기고 부활한 거죠. 어머니는 정말 지혜로운 교사였다 여겨져요.
우리 어머니가 지혜로운 교사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에피소드가 하나 또 있어요. 내가 형하고 잘 안 싸우는데, 형제들이 가끔 다툴 때가 있잖아요. 한번은 어머니가 뜰에 함께 계셨고 듣는 데서 형한테 ‘이 시팔’ 하고 욕을 처음으로 했어요. 왜 그런 말을 했는지 기억은 없는데 그때 처음으로 어머니께서 몽둥이를 들었어요. 한 대 얻어맞고 쫓겨 갔지요.그럴 분이 아니었거든요. 나에게는 한 번도 매를 들거나 따귀를 때리거나 하시지 않았으니까요. 그때 얼마나 혼이 났던지 그 다음부터는 한 번도 그런 욕을 한 적이 없어요. 다른 친구들은 그걸 입버릇처럼 하고 있더라고요. 그렇지만 나는 군에 갈 때까지도 절대로 안 했지요. 소신학교를 갔는데 아이들이 그 비슷한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그게 뭐냐면 ‘식겁했다’는 말 있잖아요. 처음 듣는 소리였거든요. 식겁했다는 게 저 나는 ‘시팔’ 같은 욕으로 생각하고 있었어요. 나중에 보니까 나쁜 말은 아니었는데도 말이죠. 어머니가 그런 거 보면 신앙 면에서나 도덕적으로나 착하면서 나에게는 참 지혜로운 교사였다고 생각하는 거죠.”
 
 
어머니와 오징어국
학교에서 집으로 돌아가려면 도둑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그곳은 낭떠러지가 2~300m 되는 굉장히 가파른 곳이 있었다. 차들도 내리 달리기에는 위험한 길이다. 아이들은 자동차 길로 안 다니고 골짜기로 개울을 따라 걸어 다녔다. 어느 날 학교를 갔다 오는데 큰 트럭이 굴러 떨어져 있었다. 강릉에서 오징어를 싣고 서울로 가는 차였다. 오징어가 개울바닥에 모두 떨어져서 흩어져 있는데 아무도 없었고, 그걸 지키는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처음 본 오징어가 고기인지, 먹는 것인지도 모른 채 다른 아이들이 집어가기에 그도 대여섯 마리를 꿰어서 집에 들고 갔다.
 
“집에 가니 어머니가 어디서 난 거냐고 물어볼 거 아닙니까. 어머니는 오징어를 알고 있었고요. 어디서 났냐고 물으니 ‘차가 굴렀는데 그냥 이게 떨어져 있어서 주워 왔다’고 그랬지요. 대답을 하자마자 얼마나 혼이 났는지 몰라요. 지금이라도 당장 갖다 놓으라는 식으로 엄청나게 야단을 치는 거지요. 다시 가려면 한참을 가야 하는데 어떻게 가요. 아무 소리도 못 하고 있는데 어머니께서 그날 저녁에 그 오징어로 국을 끓여 준겁니다. 다음 날이라도 갖다 놓으라고 그럴 줄 알았는데, 그 자체로 용서가 된 거지요. 그런데 그 국 맛이 정말 형편없었어요. 냄새가 고약해서 정말 못 먹겠더라고요.”
 
어머니는 잘못된 일인 줄 알고 야단을 치면서도 가난과 굶주림은 견디기 힘 들었는지 그날 저녁 아들과 함께 공범이 된 셈이었다.
 
 
소신학교 시험에 떨어져.(성신 중·고등학교)
풍수원 성당은 그에게 꿈과 믿음을 키우며 자라게 한 곳이다. 신앙과 배움이 한 곳에서 이루어진 셈이다. 학교 일과가 끝나면 회초리를 맞으며 교리문답을 외워야 했고, 주일 아침이면 미사복사를 하기위해서 뜻도 모르는 라틴어경문을 선생님 앞에서 먼저 외워봐야 했다.
풍수원 성당은 한국에서 아주 오래된 성당중 하나다. 지금의 춘천교구와 원주교구, 경기도 일부까지 포함해 관할하는 강원도에서는 첫 번째로 설립된 성당이다. 또 1888년 이미 본당으로 승격되어 신부님이 거주하신 곳이자 대원군 박해 이전부터 신자들이 모여 살던 신앙촌이다. 1905년 성당 건물이 완공되었고, 지금은 유적지가 되어 신자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을뿐더러 문화재로 보존되고 있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그의 부모는 막내아들이 신부가 되는 것에 대해 감히 생각조차도 하지 못했을 터, 경제적으로나 여러 능력으로 봐도 아들을 신부로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못 했을 것이다. 그저 막내가 열심히 성당에도 다니고 똘똘하다 여기니 본당 신부님의 처분이 전부였을 것이다.
 
“지금은 풍수원이 신앙촌이라고 볼 수는 없어요. 그 당시에는 거의 80~90%가 신자였었죠. 그리고 외부에서 들어온 사람들도 신자가 안 되면 동네에서 살기 힘들었어요. 6·25 이후 북에서 내려온 분들이나 누구나 할 것 없이 참 열심이었어요. 그때 나에게 본당 신부님은 더 없는 우상이었고, 꿈의 대상이었어요. 신부님은 학교에서 교장이고 성당에도 지역에서도 최고로 높은 어른이었으니 어린 마음에 그분보다 더 높은 분은 더 훌륭한 분은 없다고 생각했었죠. 신앙심 깊은 어머니도 신부님은 대통령보다 높은 사람, 세상에서 가장 높고 위대한 사람이라 이야기 했어요. 그래서 대부분 아이들은 신부가 되기를 꿈꾸게 되는 것 같아요. 거기다 풍수원 같은 깊은 산골에서 다른 곳에 중학교 진학을 한다는 것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죠. 사는 것도 어려운 데다 교통수단도 없고, 중학교가려면 40리 되는 거린데 걸어 다닐 수 있는 아이들 없지요. 가난해서 학비 감당도 어렵고요. 그러니 풍수원에서 똑똑한 친구들은 수녀원 가고 신학교 가고 그랬던 거죠. 나도 거기에 당첨이 된 거예요.”
 
소신학교 시험을 치르기 위해 서울로 가는 것은 그에게 첫 여행이고 최장거리 여행이었다. 그는 시험을 치르기 전날 횡성본당 외국인 안신부 지프차에 올라 새벽 일찍 풍수원을 출발 춘천으로 간다. 춘천에 주교님께 ‘신학교 시험 보러 갑니다.’라고 인사를 드려야하기 때문이었다. 지금이야 가깝지만, 그때만 해도 풍수원에서 춘천까지 가려면 3~4시간이 걸렸고, 다시 춘천에서 기차를 타고 다시 서울로 가는 길은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것만큼 멀고 지루한 길이었다.
 
“오후에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가는데, 서울에 도착하니 한밤중이에요. 번쩍번쩍하는 전깃불도 처음 보게 되고, 전철도 처음 탔어요. 그때 우리 누님이 같이 갔는데, 누님은 서울 친척들하고 얼마 동안 생활을 했었거든요. 그 누님은 호저면 영산에 살고 있었는데 내가 태어난 날 시집을 간 분이죠. 6·25 겪으면서 남편 잃어버리고 아이들 두 명 키우면서 있을 땐데, 나에게도 나중에는 어머니 같은 분이셨어요. 어쨌든 그분이 서울을 조금 아니까 나를 데리고 간 거죠. 처음 해보는 여행에 너무 힘이 들었는지 시험이 있던 날 시험장에 가는 것조차 힘들 정도로 심한 몸살을 앓게 돼요. 힘겹게 시험장에 갔는데 시험지를 받고 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답안을 쓸 힘도 없더라고요. 답안지를 거의 백지로 내다시피 냈으니 합격을 기대할 수는 없었지요. 그렇게 몸살이 난 것이 내 인생에 네 번 정도 되는 것 같아요. 내가 몸살이 나면 반은 죽다 살아요. 그날도 심한 그 몸살이었던 것 같아요. 약을 먹어서 어지럽다 하고 생각했는데 시험지를 받아보면 뿌옇게 보이는 거죠. 내가 제일 잘하는 게 산수인데 풀지를 못했어요. 다른 것보다도 산수시험 못 본 것이 그렇게 억울하더라고요. 그래서 ‘떨어졌다. 나는 이제 안됐다.’ 시험 치고 들어오면서 그런 생각이 났어요. 발표하는 날 보러 가지도 않았으니까요. 우리 반에서 이 태승이란 친구하고 둘이 갔는데 그 친구는 원래 머리 좋고 공부 잘하는 친구였어요. 소신학교 때도 계속 1등을 했죠. 그 아이는 붙었고 나는 떨어졌는데 내가 엄청나게 충격을 받았나 봐요. 내가 공부 못한다는 생각은 안 했거든요. 그 아이한테 열등의식을 느낀 것 보다는 떨어지고 나니까 너무 비참했던 것 같아요. 나이가 60이 넘어서도 가끔 시험에 떨어지는 꿈을 꾸더라고요.”
 
소신학교 시험에서 떨어지고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아무 소리도 없었다. 마을에선 몸살 때문에 시험을 망쳤다고 말해도 믿어줄 사람도 없을 뿐 아니라, 낙방생으로서 겪는 부끄러움과 꺾인 자존심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다행인지 본당 신부님의 격려와 어머니의 위로를 힘으로 열심히 공부했고 다음 해 2대1의 경쟁을 넘어 무사히 입학했다.
 
“본당 신부님은 나에게 위로가 아닌 격려를 해주셨어요. ‘너는 붙을 수 있었는데 아파서 그랬다. 그렇게 생각하자. 그리고 1년만 더 학교 다녀라.’ 그랬던 것 같아요. 신부님이 다른 선생님들한테도 ‘이 아이 기 좀 살려주라’고 그랬나 봐요. 들어가면서 바로 급장을 시키는 거예요. 그때는 선생님이 하라고 하면 하는 거니까요. 급장을 하면서 전교생 앞에서 체조도 하고, 교장 선생님 앞에서 차렷! 경례! 구호도 붙이면서 기가 살았나 봐요. 6학년을 다시 다니는데 한두 달 지나고 나서는 열등의식이나 이런 것도 없어졌어요. 그다음 시험 보러 갈 때는 누님이 너무 고생하고 실망을 해서 절대 안 간다고 해서 시험 보러 가는 친구를 따라갔어요. 그때는 합격한다고 생각했어요. 지난해 보았던 시험도 도움이 됐고요. 교리시험 등 모두 아는 것이니까 시험은 어렵지 않게 봤죠. 그때 거의 90명이 왔는데, 그중에서 50명을 뽑았어요. 서울 근처는 물론 경상도, 제주도, 전라도.. 전국에서 왔어요. 온 학생들이 나중에 알고 보니 중학교 1학년을 다니던 아이들도 많더라고요. 우리 같은 경우에는 중학교 갈 데가 없어 재수를 했지만, 그 아이들은 다른 데 가서 중학교 1학년을 다니다가 들어온 거예요. 그런 학생이 한 10명 정도 되더라고요.”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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