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78호] 기획특집 - 최기식 신부 사제서품 50주년_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4)
등록자 관리자 등록일자 2022.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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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최기식 신부 사제서품 50주년
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4)
글. 편집위원회
 
 
 

지난 호 (76호) 이야기
그는 그렇게 신자들과 행복하고 보람된 시간을 보내고, 2년 만에 두 주간 첫 휴가를 간다. 뿌듯한 마음에 쉬고 싶은 생각이 더 컸다. 주교님에게 수녀님들과 함께 성당을 비우고 휴가를 가겠다고 말한다. 성당에 신부도 없고 수녀도 없는 것도 체험해야 한다고. 신부 귀한 것도 알아야 한다고, 공소예절을 하면서 회장이 영성체를 해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하니까 괜찮다고 허락을 받아낸다. 그리고, 서울에서 동창도 만나고, 부산에서 친척 누나 수녀님을 만나, 회도 먹으며 이틀 정도를 보냈을 때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비보를 받는다. 그를 찾느라 하루가 걸렸다 한다. 밤차를 타고 부산에서 출발 아침 10시경 학성동 성당에 도착하니, 아버지는 마당에 서 계셨다.
 
 
김찬수 지난 호에서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원주로 급하게 오셨잖아요. 어떻게 된 일인가요? 당시에 학성동 성당에 부모님을 모시고 계셨던 거지요?
 
최기식 그래요. 학성동 성당 주임으로 2년을 보냈으니 사제생활에 자신감도 들었고 성당 식구들한테도 인정을 받는가 싶을 때였지요. 엄마 같은 누님이 사제관에서 식생활을 맡아서 도와주고 수녀님, 사도회 회장님, 모두 한 식구 같이 해주셨지요. 그래서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1973년 여름엔 부모님을 누님과 함께 2, 3개월 성당에서 모시기로 했던 거예요. 잠시라도 효자가 돼 보고 싶었던 거지요. 그런데 휴가 중에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니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급하게 밤기차를 타고 와 원주에 와서 보니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가 쓰러지신 거예요. 원주에서 백 리 길을 걸어 풍수원성당 공소 금대리 딸네 집에 갔다가 병이 나신 거지요. 무작정 원주로 나와 사제관 내방에 눕혀 놓았는데 언어는 물론 전신 마비인 거 있지요. 뇌졸중 (중풍)이요. 어쩌겠어요. 병원보다 한방이 낫다고 하여 3, 4일 정신없이 한의원을 찾아다녔어요. 어떻게든 빨리 회복시켜 보려고 했지요. 정말 정신없는 며칠이었다 싶었어요.
그러는 와중에 무심코 책상에 쌓인 우편물을 정리하다가 또 놀랍니다. 누런 봉투에 인사이동 발령통지가 있었어요. 날짜가 며칠이 벌써 지났고, 5일 후엔 본당을 비우고, 독일 유학을 떠날 준비를 하라는 것인데, 이런 날벼락, 당황스러운 일이 어디 있어요. 꿈에도 생각해 본 일이 아니었거든요. 부모님을 내가 보살피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될 상황, 보살필 사람도 없다고 생각했었어요. 한 번 가면 7, 8년 동안 못 올 것으로 보면, 병든 부모님 생매장하고 가는 것이나 다름없잖아요. 주교님이 저에게 한마디 의사를 물어보지도 않고 결정한 일, 너무 황당하다 싶기도 하고 답답해서 주교관에 올라가 주교님 방문을 두드렸어요. 하지만 어떤 말씀을 드려도 번복할 분도 아니고 그럴 일도 아니었지요. ‘모든 것을 교회에 맡기고 떠나가는 거야!’ 순종하라는 그분의 답이었어요. 안승길 친구 신부를 언급해 봤지만 대꾸도 않고 나가라고 했고요. 그래서 병드신 어머니를 시골 형님 댁으로 모셔놓고 본당을 떠나야 했지요. 서울 한국순교 복자 수녀원에 숙소를 정하고 독일 문화원에서 독일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거예요. 그땐 정말 마음이 너무 아팠고 힘들었어요.
 
김찬수 유학 발령과 관련해서는 나중에 이야기 나누고요. 여쭤볼 게 있는데요, 처음 신부님 되셨을 때 어머님이 혹시 무슨 말씀 안 하셨어요?
 
최기식 어머니 이야기라면 참 소설처럼 길고 재미있을 텐데. 어머니는 열 살에 고아가 되어 친척 집에 머물다가 열네 살에 중매로 스무 살 아버지와 결혼을 했고, 8남매를 낳으셨고, 나는 그중 막내아들인데 마흔여섯 되셨을 때 나를 낳으셨어요. 배운 것 없고 빈곤과 온갖 고통의 질곡을, 오로지 가족을 위해 기도하며 사신 분이어요. 76세가 되며 주님 은총으로 아들이 신부가 되었는데, 무슨 이야기를 해요? 처음으로 행복해하고 감격하고, 기쁨과 보람으로 여겼을 것인데요. 최고의 어머니, 최고의 교사였지만 ‘앞으로 이렇게 살아라! 이런 사제가 되어라. 뭐 그런 말씀 하신 적이 없고요. 정말 삶으로 말씀하시는 분이라고 봅니다. 내겐 정말 성모님 같은 분이셨어요.
 
김찬수 신부님이 학성동 성당에 계실 때 교회의 사회참여 활동, 민주화 운동 등 원주 교회의 당시 분위기에 대해 듣고 싶은데요. 학성동 성당에 부임하신 첫째 주일 저녁에 어떤 분들이 사제관 방을 빌려달라고 한 적이 있었다면서요?
 
최기식 맞아요. 첫 번 맞는 주일날, 저녁 미사가 끝나고 난 후, 사도 회장이었겠죠. 사제관 방을 빌려달라 하는데 무슨 얘기인지는 모르겠더라고요. 왜 사제관 방인지 이유도 뜻도 모르고 그러자고 했지요. 10여 명이 넘게 작은 온돌방에 빽빽이 앉아 있었지요. 함께해도 좋다고 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그게 바로 부정부패 규탄대회(문화방송) 모의 작전이었던 거지요.
 
김찬수 그래서 원동 성당에서 있었던 ‘부정부패 규탄대회’에 참석하셨잖아요. 그때 있었던 농성, 시위, 분위기 어떻게 생각하셨어요? 왜 교회가 그렇게까지 해야 하는 생각에 동의하며 함께 하셨나요?
 
최기식 아니요. 원주 온 지 일주일도 안 되었기에 누가 설명해 줬어도 완전히 이해 못 했을 거예요. 주교님이 한다고 하니까 간 것이고 시국도 제대로 읽지 못하는 아직도 중학생 수준이었다 하면 맞을 거예요. 그래도 공의회 가르침을 따르는 데서 오는 것이란 이해는 있었다고 봐요. 그런 사회적 운동에 별 조예도 관심도 없지 않았나 싶고요. 그 후 학성동에 있는 동안 그런 운동에 참여한 적은 없었으니까요. 그런 큰 행사도 없었고요.
 
김찬수 학성동 성당에서의 2년 동안 활동하실 때 비슷한 어떤 활동이 전혀 없었다는 건가요? 학성동 시절은 아주 재미있고 활발하게 지나셨다고 했는데, 여러 가지 다른 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최기식 2년 동안 시위에 참여하거나 정치적 혹은 사회적 어떤 운동에 참여할 기회도 활동할 여유도 없었다고 봐요. 다만 교구 차원에서 ‘중·고 가톨릭 학생 연합회’, ‘가톨릭 청년 연합회’ 지도신부를 맡아 열심히 해보려 했지요. 원주시 중심으로 교사들을 통해 학생들에게 편지를 보내고 한 달에 한 번 가톨릭센터에서 영화, 강연, 미사를 하곤 했는데 300여 명씩 모였어요. 청년 연합회도 각 본당에 청년회를 구성하며 청년 연수도 몇 번 했고요. 1973년 여름 수해가 크게 났을 때, 80여 명이 2박 3일 청년 연수가 있었잖아요. 연수는 끝났는데 홍수로 모든 길이 끊겨요. 그래서 태백, 정선, 삼척 등 모든 지역 청년들이 걸어서 갔다고 했어요. 이때 있었던 대홍수가 원주교구 내 지역 농민들에게도, 광산촌 노동자들에게도 협동운동. 사회개발 운동하는데 큰 계기가 됐다고 보지요. 원주교구 차원에선 그것밖에 생각나는 것이 없어요. 그 외 농민운동이나 노동자들을 위한 어떤 활동들은 5, 6년 후가 되어서야 나는 관련을 하게 돼요.
 
김찬수 졸업할 당시에 그러면 사회참여나 사회활동에 대한 준비는 전혀 되어있지 않았다고 봐야 되겠네요? 지 주교님은 원주에 오시자마자 낙원여관에 사무실을 정하고 1966년 신협 운동부터 시작해 많은 활동을 하셨는데요.
 
최기식 처음 숙소 겸 사무실이 가톨릭센터 자리 뒤에 있었다고 해요. 처음 그 여관에서 신부들 모두 모인 자리에서 ‘나는 공의회 정신대로 사목을 할 것이다’하고 밝혔다고 해요. 시민들 가장 낮은 곳에서 사목활동을 시작하신 거로 보지요. 그리고 내게는 사실 그런 사회적 운동이나 어떤 활동이 보이지도 않았고 어떤 생각도 없었으니 준비가 돼 있다고 볼 수는 없지요. 다만 사제가 되면서 꿈은 분명했어요. 세상 영화나 어떤 권위와 특권의식 같은 것은 버리고 열심히 기도하고 최선을 다해 예수님 닮은 사랑의 생명으로 교회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생각이요. 성인 신부 같은 꿈이지요. 졸업 직전 ‘어떤 모습의 사제로 살 것인가’ 하는 제목으로 친구들과 이야기 나눈 적도 있었어요. 거의 비슷했어요. 거룩하고 신자들이 보기에 고고하고 아름다운, 희생적 사제 같은 거지요. 성모상 앞에서 수단을 입고 로사리오 기도하는 사제 상을 말하는 친구도 있었지요. 나도 신부가 되고 그렇게 열심히 살고 활동하려 했어요. 미사 전례도 열심히 하고 강론도 잘 준비하고 그룹 피정도, 쉬는 교우들 방문도 열심히 하며, 교회 공동체 성장에 열을 올리지요. 본당 운영, 전교 활동 전혀 어렵지 않게 진행됐어요. 내가 알고 있는 옛날 교회 공동체 하곤 전혀 다른 모습을 봐요. 이미 내가 학성동에 왔을 때, 평신도와 신부, 수녀가 함께 모여 회의를 하고, 본당의 운영계획이나 발전 기획을 함께 짜면서 해나가고 있었어요. 전임 신부님은 골롬반 외국 신부였는데, 그때만 해도 신부가 직원 한두 명과 전담 봉사자(전례, 성가, 신심단체 등) 몇 명을 두고 교회를 운영하는 모습이었지요. 미국의 성당 운영은 지금도 그래요. 그런데 내가 왔을 때 모습은 전혀 다른 거지요. 모두가 주교님 오시고 변화돼가는 모습이었다 싶어요. 공의회 바람이라고 이해는 했지요. 교구 사목회(1969.12)도 부녀회도 막 시작할 때였고요. 4~5년 동안 당시에 있었던 일들, 교구청 상서국 신설, 신용조합 도입, 학교, 병원 설립, 교구청(주교관), 가톨릭센터 건립, 방송국 유치, 10개의 본당을 더 늘리면서 어떻게 그 많은 일이 가능했을까? 주교의 능력과 신부들의 협력이라 말할 수도 있으나 평신도들의 힘이 절대적이었다는 것엔 다른 여지가 없지요. 공의회 정신 그 가르침을 완전 이해하고 실천한 것이라고도 보고요.
 
김찬수 신부님이 학성동 성당에 계실 때 원주교구 전체의 지역 분위기는 어땠어요?
 
최기식 전혀 모르는 곳에 처음 와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 교구 분위기를 알기에는 시간도 부족했다고 생각돼요. 본당 일에만 매이지 않았나 싶고요. 확실한 것은 원주시에 성당은 세 개뿐, 몇 개 기관이 있었는데 젊은 사람들 활동이 정말 대단히 활발하다는 것을 느꼈지요. 3박 4일 동안 하는 꾸르실료 교육을 내가 받고(1972년) 더욱 그랬어요. 김영주 씨가 회장을 하고 이경국, 최규창, 김상범, 김정하, 김인성, 신동익 등 10여 명이 지도 임원이 되고 40여 명이 교육을 받아요. 지도신부도 있고 성직자 강의가 몇 개 있어도 평신도 중심이라 봤지요. 큰 감동을 받았고요, 정말 지도하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존경스러운 마음도 들더라고요. 그래서 본당 피정에도, 청년 학생 교육에도 이분들을 불러서 했어요. 그래서 미니 꾸르실료를 한다는 말까지 들었지요. 그 전엔 평신도가 신앙 강좌를 한다는 것을 생각도 못 했어요. 평신도 활동이 학생 때 춘천교구에서 본 것에 비하면 상상을 넘는 분위기로 생각했지요.
 
 
공동체묵상(MBW) 전국연수회(1975.8.21~29.)
 
 
김찬수 꾸르실료란 연수가 공의회 정신을 깨우쳐 주는 교육인가요?
 
최기식 아니요,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 몇십 년 전 스페인에서 있었던 신앙 운동이었다고 해요. 공의회 정신과 연관된 교육은 공동체묵상(M.B.W) 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데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운동’으로 불렀어요. 1975년도에 이학근 신부님이 처음 서울서 받았고 1976년에 나도 서울서 전국지도자 공동체 묵상회에 참여했지요. 원주교구에선 1979년에 처음 시작했는데, 기초코스와 교회코스(새로운 교회상) 까지 여러 차례 해 왔으나 꾸르실료 교육처럼 확실히 교구 안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것이 너무도 아쉬워요.
 
김찬수 그 때 그러면 무위당(장일순) 선생님이 강의하시는 것은 못 들어 보셨나요? 꾸르실료나 다른 어떤 피정 비슷한 데서요? 무위당 선생님은 교구 평신도 사목 회장을 했다고 들었는데요.
 
최기식 몇 번 들어본 기억은 있지요. 그땐 어떤 분인지 잘 몰랐어요. 예전부터 알고 있던 분들은 풍수원 출신 신균섭 교장과 최승섭 회장, 강의를 잘 해주던 이경국, 김정하, 최규택, 김인성 같은 분들이었지요. 제일 가까운 사람은 학성동 성당에 최규창 회장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때 최규창 회장은 너무도 고마웠던 거예요. 그분이 본당을 활성화 시켰어요. 형님같이 나나 수녀님들도 돌보며 교회 공동체를 위해 정말 모범적이고 희생적이었어요. 성당에 나와서 허드렛일부터 임원들 관리, 방문 봉사 활동도 모두 함께하셨어요. 수의사로서 시청 공무원이었는데 부정부패규탄 시위 때 마이크를 잡았대요. 주교님이 ‘이런 곳에 참여하면 어떻게 할려고 그래?’ 하니까 ‘그거 그만두면 되지요’ 하고 사표까지 냈다는 분이지요. 그런데요, 그때 원주에서 강의도 하고, 교구 여러 기관에 일하면서 행사들을 주관하던 많은 분이 3~4년 전에(1968년) 세례 받은 신문교우(新門敎友)라는 거예요.(김영주, 김인성, 이경국, 이우근, 김상범, 박재일, 정인재 등.) 나는 그분들을 모두 구 교우로 여겼잖아요. 10년 후에야 알았으니 내가 몰라도 어떻게 그리도 모르고 지났나 싶어요. 놀라운 일 중 하나예요. 무위당 선생님 영향으로 교회 안에 들어와 세례 받고 열심히 있었다는 거지요. 그 당시엔 그걸 몰랐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면서 믿고 싶지 않았던 것은, 원주교구 초대교구장 지 주교가 하는 모든 사업과, 사회 참여에 관한 많은 활동이 장일순 선생을 만남에서 시작되고 추진됐다는 것. 그때 나는 그런 짐작도 생각도 할 수 없었어요. 신앙 교리에 대해서는 주교가 선생이고, 정치 사회문제, 세상 사업 문제에는 그분이 선생이라고 해도 그래요. 두 분이 함께했다는 것이 내 눈에는 보이지도 않았던 거고요. 진행되는 사회 사목, 많은 활동의 내용을 듣지도 않았고, 관심도 없었나 봐요. 모두가(학교, 병원, 가톨릭센터 등) 기존에 있던 것이고 기존 신자들과 주교님이 열심히 일하시는 거구나 하는 정도였지요. 한참 원주 지역 안에서 교회 쇄신운동과 사회참여 운동이 진행되고 있던 때였는데도 말입니다.
 
김찬수 지 주교님이 처음에 장일순 선생을 어떻게 만나게 됐는지 아세요? 참으로 궁금합니다.
 
최기식 전혀 모르지요. 그냥 추리해도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주교님이 원주교구 첫 교구장으로 임명되어왔을 때 누가 있었겠어요. 로마로 가서 유학을 함께 했던 이영섭 신부, 비슷한 연배 최창규 신부, 양대석 신부, 그리고 몇몇 골롬반 외국 신부님들이었겠지요. 당연히 신부님들을 믿고 의지하며 시작하고자 하셨겠지요. 최창규, 양대석 신부님, 이분들을 통해 자연스럽게 신자들을 만나지 않았을까요. 장일순 선생을 포함해 신학교 생활을 함께했던 신균섭(신현만 신부 부친)선생, 풍수원 출신 최승섭 교장 등 많은 분을 만나셨겠지요. 그러나 장일순 선생을 꽉 잡고 일할 것을 결심한 것은 그분이 신실한 신자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거라 봐요. 진보적 정치인, 교도소를 드나들던 저항운동가, 학교를 세우면서 지역에 교육 문화에 힘쓰던 인물, 지역 유명인사로 알려져 있었으니 특별히 소개도 받았겠지요. 그러나 ‘꼭 이분이어야겠다’ 한 것은 개별로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면서부터가 아닐까요? 교회의 쇄신이나 사회 변화에 대한 시국 정세 이야기까지 나누면서 장 선생님의 인품, 철학, 사상, 그분 역량에 반했을 거예요. 당신 옆에서 당신의 브레인이 돼주고 손발이 돼주기를 처음은 기대했는지도 모르지요. 그러나 무위당 선생은 일은 함께 시작하지만 직접 하는 분이 아니었나 봐요. ‘내 손발이 돼주어 함께 일하고 돕는 사람이 필요한데.’ 하고 주교님이 이야기하면 ‘제가 한번 찾아보지요.’ 하고 답하지 않았을까요. 어떤 일, 어떤 도움, 어떤 자격의 사람,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난 후에 말이지요. 그러면서 무위당 선생은 신부님들과 교회자치, 평신도 신앙 운동도 한 것이라 믿어요. 제일 먼저 최창규 신부님과 함께 꾸르실료도 도입하여 원주 1차 자치회 회장을 했다고 했으니까요.
 
김찬수 그래서 김영주 씨가 소개된 거군요. 세례도 안 받은 상태였다고 하던데요.
 
최기식 그거지요. 신부님들과 주교님 사이가 벌어지기 시작한 이유가 그것 때문이라 들어요. 교구장으로 취임한 후 일 년도 안 되었는데 교구청 사무국에 기획실장 비서실장 하면서, 더구나 신자도 아닌 사람을 등용해요. 상식으로 신부들뿐 아니라 신자들이 봐도 이해될 일이 아니지요. 기자 출신에 시험으로 고급 공무원으로 승승장구, 춘천시에서 서울중앙공보실로 발탁이 되어 출세의 문이 열린 사람이었다는데, 지 주교에게 반해서? 무위당 설득력? 이분이 원주를 선택하는 것에는 본인에게도 어떤 깊은 뜻이 있었겠지요. 그렇다 해도 신부님들 편에서 이해가 안 되고 주교님 이해를 못 하지요.
사회사목(신협. 학교, 병원, 문화센터, 복지, 사회참여 운동 등)은 성직자들보다 신자이든 비신자이든 능력 있고 뜻만 맞으면 함께 하겠다는, 신부들을 통해서 하지 않고 직접 당신이 그들과 함께 일을 하겠다는 것. 주교님 독특한 성격이고 욕심으로 보는 이들도 있지만, 공의회 정신을 살겠다는 굳은 신념에서 오는 것일까? 생각하지요. 그래서 나는 김영주 씨도 두 분과 함께 20년을 넘도록 원주 민주화 운동, 협동운동 야전사령관으로 사신 것 아닌가 생각해요.
 
김찬수 그 당시 김영주 선생님 말씀을 들었는데 김지하 씨는 어땠어요? 김지하 씨도 자주 보셨나요?
 
최기식 주일이면 성당에 나왔죠. 그때는 똑똑하고 학생운동 했다는 것만 알았지요. 오적五賊. 비어蜚語를 썼다든지 그런 건 모르고 관심도 없었어요. 유명하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제대로 알게 된 건 3년 후 주교님이 구속되고 나서예요. 그분과 연관되어 주교님이 감옥에 가고 함께 영어의 몸들이 된 후지요. 그분의 글도 그때 읽게 되고 세례를 도계에서 이영섭 신부님에게 받았다는 것도 그 이후에 알게 되었어요. 1971년 나와 같은 해에 원주에 온 것도 그땐 몰랐어요. 더군다나 주교님 도와서 원주교구청 기획실 직원으로 있다는 것도 모르고요, 주교님이 주교관이 있는 땅에 집을 마련해 주어 그 부모님과 함께 지내고 있는 것만 알 정도였어요. 수해대책위원회(1979년 사회개발)가 생기며 일도 안 하면서 월급을 준다는 얘기는 내가 떠날 때 즈음 들었고요. 성당에서도 김영주 씨하고 늘 함께 있는 것을 봤지요. 주교님이 한번은 나를 불러서 갔더니 천렵(川獵)을 데리고 간 적이 있어요. 국형사 계곡인지 금대리 계곡인지 모르겠어요. 그때 장일순, 김영주, 김지하, 4~5명으로 기억하는데 시국 이야기를 하면서 만취 상태가 됐어요. ‘야 이 죽일 놈 000 새끼야!’ 하고 고래고래 목이 터지게 소리치던 생각이 나요. 1972년 여름이니까, 박정희가 유신헌법 만들고 언론, 교수, 법조인, 학생들이 저항할 때, 국민저항이 극에 달할 때, 계엄령 바로 이전이 아닌가 싶어요. 부정부패 척결운동, 민주화 운동, 군사독재 타도 운동 중이었나 생각했어요. 그로부터 꼭 2년 뒤 주교님과 김지하 시인 두 분은 함께 옥에 갇히지요.
그리고 가끔 주교관에서 저녁에 오라고 할 때가 있어요. 가보면 리영희 교수 이야기를 듣고 있었어요. 10여 명 가운데 이분들은 빠지지 않지요. 주교님도 같이 공부를 하는 거지요. 김지하는 그런 쪽에 김영주 씨와 함께 있었다 기억해요.
 
김찬수 아까도 잠깐 말씀하셨지만, 그 무렵 바티칸 공의회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것 같은데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 이야기 좀 해주세요.
 
최기식 주교님이 일본어로 된 공의회 문헌을 구해서 무위당 선생에게 전달하며 공부하게 했다고 들었어요. 충분히 서로의 여러 면에 지식을 나누고 했겠지요. 나도 학교에서는 사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1~1965) 과정이나 결과, 그 가르침 내용에 대해서 제대로 배웠다고 볼 수가 없어요. 관련된 강의를 몇 번 듣기는 했어도, ‘공의회 정신은 이런 거니까 이렇게 사목을 해야 한다.’ 하는 거 아니거든요. 내가 군 복무를 마치고 복교해서 공부할 때는(1967년~1971년) 공의회가 끝나고 그 내용을 해석하고 정리하며 실천 방법, 방향을 두고 의견들을 달리할 수 있을 때라고 봐요. 급진보와 수구는 늘 그렇잖아요. 예를 들어 전례 토착화를 말하는 사람들은 한국에서도 포도주가 아니고 막걸리로 미사를 해야 한다든지, 수도자들도 세상에 나가 함께하기 위해 경우에 따라선 수도복을 벗고 사복을 해야 한다든지, 뭐 그런 예들도 많았지요. 미국 가톨릭에서도 변화되는 세상에 교회가 적응하며 살려면 사제들도 기혼제도 필요하다며 400~500명이 옷을 벗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어요. 뭔가 공의회 내용을 잘못 이해하고, 다르게 주장하는 학자나 지도자들이 있었다는 거고요. 진짜 알맹이는 제대로 못 배우고 어정쩡한 비무장 군인처럼 사제가 되어 나오지 않았나 생각하지요. 지금까지도 교회 안에 지도자들도 보수 진보하며 팽팽하게 보이는 거 아닙니까.
 
김찬수 공의회 정신은 교회의 가르침을 말하는 것인가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서 우선 이야기 좀 해주시죠.
 
최기식 공의회라 하면 세대변화에 따라서 교회 책임자들이 하는 공식 회의라고 말할 수 있지요. 주교들만이 아니고 최고의 신학자들 수도회 장상들도 초대되고요. 주로 믿는 교리, 윤리, 전례, 법규 등을 정리하고 교회의 가르침으로 공표하지요. 325년 니케아 공의회 (콘스탄티누스 대제 1세)를 제하고는 교황이 소집하게 돼요. 믿을 교리, 계명, 성사, 전례, 모두를 재정비하지요. 이단을 규정 단죄하기도 하고 복음 전달 방법, 교회 구조 제도까지 재구성하기도 하고요. 이단을 규정 단죄하고 분열과 전쟁까지 감행했던 교회가 참회하며 쇄신으로 돌아서기도 하고, 신적 권위를 이용 세상 부귀 권세와 밀착됐던 교회가 영적 회개와 내적쇄신을 강조하고 박차를 가하지요.
트리덴트(1545~1563년) 공의회가 대표적이라 봐요. 중세기 가톨릭 역사에 대해서는 잘 알잖아요. 부정적인 면이 너무 많지요. 반발하고 일어나는 사람들, 개신교가 시작될 때 어떻게 교회가 처신 했는지요. 수많은 파문과 정죄로 폭력의 주인공이 됐다는 거지요. 그러면서 50년간 공의회가 계속했다고 해요. 반성과 쇄신하는 거지요.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구별되는 완전한 종교사회, 완전한 신앙생활을 정하고 꿈꾸는 겁니다. 천주교 안에 만이 구원이 있고 진리 성령은 교회밖에 없다고. 그러면서 400년이 흘러요. 세상도(정치, 과학, 문명...) 함께 변하지요. 식민지 전쟁, 세계전쟁, 약탈, 살상 등 세상의 변화에도 가톨릭교회는 긴 시간 자기 안에 갇혀서 문을 닫고 살았다는 얘기예요. 지구상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어도 교회하고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 하고 말이에요. 우리도 어릴 땐 그런 교회 율법, 그런 환경 속에 살았다고 봐야지요. 미사를 모국어로 하고 백성들을 향해 제대를 돌려놓을 때 교회가 바뀌는 것이구나 우리는 생각했어요. 아주 단순했죠. 중학교 학생 때니까….
1959년, 세계핵전쟁 위기 앞에 요한 23세 교황은 가톨릭 뿐 아니라 선의의 모든 사람을 향해 <지상의 평화> 회칙을 반포하며 바티칸공의회를 공표하게 되지요. 세계의 급속한 변화에 따른 교회의 적응과 쇄신을 위한 기조를 설정하고 공의회를 선언해요. 1961년 공의회를 열고 1963년에 그분은 돌아가셔요. 다시 바오로 6세가 1963년부터 이어서 공의회를 속개하고 1965년 공의회가 끝나게 되지요. 바오로 6세가 공의회를 완전히 성공으로 이끌었고 쇄신운동을 끝없이 추진했으나 교회내부 개혁엔 많은 반대에 부딪혔다고 하지요. 1978년 요한 바오로 1세의 죽음은 영원한 의혹으로 남게 된 이유이지요.
공의회 문헌이 아직 완전히 다 번역되지도 않은 상태에서 강의를 들었지요. 그래도 강의를 들으며 공부한 몇 가지 분명한 기억들은 있어요. ‘바티칸의 창문을 열어라.’ ‘세상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들어오게 하라’ ‘교회는 그리스도를 믿는 백성의 모임이다’ ‘성직자 중심의 교회에서 평신도 사도직이 강조된다.’ ‘개신교 신자들은 이단자가 아니라 같은 구원의 길을 걷는 갈라진 형제다.’ 등등이요. 그러니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 하는 것 정도는 나름대로 해석하겠지요.
1979년 공의회 문헌 번역문이 나와요. 4개의 헌장(전례, 교의, 계시, 사목), 9가지 교령(미디어, 일치운동, 평신도 사도직 등), 3개의 선언(교육, 종교의 자유, 비그리스도교)이 공의회 문헌, 결과물이지요. 그래도 공의회의 가장 아름다운 꽃은 <현대세계의 사목헌장 (기쁨과 희망 Gaudium. et Spes)> 이라고 말해요. 한번 읽어보세요. 이것 읽고 세례 받은 분들이 많거든요.
 
황도근 지 주교님이 주교품을 받을 때 인장. <빛이되라> 하는 말씀, 이것도 공의회 정신에 의한 것일까요? 창세기 나오는 말씀인데요.
 
최기식 해석하기에 달려 있다고 봐요. 나 보고 해석 하라면 공의회 가르침이 맞다고 말하고 싶지요. 문헌에 교회에 관한 교의헌장 제목이 <백성의 빛>Lumen Gentium으로 했어요. 빛은 그리스도를 말해요(진리, 사랑, 생명, 정의 길). 하느님 백성이 교회라 규정 하고요. 빛을 담은 교회, 곧 빛을 안은 백성을 말하지요. 공의회 정신에는 교회가 참 빛을 담은 그릇 (담지자 擔持者)만으로 머물지 않고 빛을 발하고 활성화하는 교회(사람들)로 볼 때를 말해요, 그 교회를 그리며 빛을 택하지 않았을까요?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선의의 모든 이들과 함께 하느님의 뜻, 공동선(정치 경제 사회 모든 분야에)을 위해 투신하는 백성들, 공동체를 생각하며 말씀 <빛>을 택했다고 설명하고 싶어요. 주교님이 하신 일들을 생각해보면 초대 원주교구가 한국뿐 아니라 전 세계 변화되는 세대에 슬픔과 번뇌, 탄식과 비명이 있는, 불의와 폭력이 가득한 세상에 <참 기쁨과 희망>의 빛으로 발하지 않았나 생각해요. (현 프란치스꼬 말씀대로 ‘여러분 모두가 교회입니다. 교회가 변하고 살아있는 교회가 되도록 온 힘을 다하기를 바랍니다.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비명에서, 환란을 겪는 사람들의 탄식에서,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는 사람들의 신음에서 교회의 사명을 찾아야 합니다.’)
 
황도근 여쭤보고 싶은 게 1968년인가요? 가톨릭센터를 전국에서 처음 만들었잖아요. 그런 것도 공의회 정신이라고 보시는 건가요?
 
최기식 그럼요. 예를 들어서 1966년에 신용협동조합을 시작하잖아요. 그 정신을 빨리 받아들이려고 했겠지요. 신협을 받아들이는 것, 가난한 사람들이 믿고 서로 협동하게 만드는 것, 사랑의 일이지요. 공동선을 실천하는 교회의 일로 보는 거예요. 가톨릭센터도 그렇지요, 외국 신부님인 오 미카엘 신부님 얘기를 나중에 들은 건데, 교구청 짓기 전, 여관에 신부들 모아놓고 ’나는 공의회 정신에 따라 사목을 할 거다.’ 이런 얘기를 했다는 거예요.1 사람들의 생활, 문화 교양, 오락, 휴식, 어떤 것이든 세상을 향한 교회의 사명으로 본 것 아닐까요. 교회의 기본이라 할 수 있지만 신자 아닌 사람들 상대로 이런 시설을 만드는 것 그렇게 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요.
 
황도근 그럼 반발도 있었을 것 같은데. 신부님들이 그렇지 않으셨나요?
 
최기식 그렇지는 않아요. 가톨릭센터를 짓고 학교 병원을 하는 것을 반대하며 반발할 이유가 없지요. 신부들은 성당부터 짓자고 하겠지요. 공의회 문헌을 보면 주교의 권한을 확실하게 탄탄히 하면서, 평신도의 사명이나 역할과 의무를 교회 안팎에서도 넓히고 높인 것이에요. 사제들은 낮춘 편이고요. 처음부터 지 주교님은 사제들 하고도 교회 발전을 도모하지만, 시대적 변화에 따른 교회의 쇄신 운동도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문화 모든 분야 공동선 함양이나 복음의 빛을 전함에 있어서도 평신도들에게 비중을 둔 것이 확실하지요. 평신도들과 직접 한다 해도 공의회 정신이 맞다 해야지요. 그것을 어떤 분들은 부정하죠. 그래도 신부 중심이지 않았느냐고요. 그런데 지 주교님은 신부들도 교회 전례라든가 기도, 성사, 신심 등 사제의 특수 임무를 빼곤 함께하라 하셨어요. 교회 관리운영 같은 거요. 변화되는 이 세상에 복음을 전하며, 증거 하는 데는 확실히 평신도들에게 비중을 두고 그 몫에 강점을 두었다고 봐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빛이라는 것을 강조할 때도 인류공동체, 모든 생명공동체와 교회라는, 크고도 넓은 관계성을 놓고 복음의 빛을 생각하고, 그리스도를 생명, 진리, 빛으로 봐야 하는 거라 생각하죠.
 
황도근 그때도 생활성서, 생활 속에 신앙생활을 하자는 모토가 있었나요?
 
최기식 그렇죠. 부정부패 퇴치 운동 후, ‘생활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고 하는 사목 교서가 있지요. 사목 지침이라고 얘기할 수 있어요. 이게 1972년 성탄절 즈음으로 기억해요. 1973년, 새해에 전 교구민뿐 아니라 한국 교회까지 염두에 두고 시대에 맞는 교회지도자의 역할을 선언한 것이라 보지요. 현실 생활 속에서 신앙 실천, 사랑과 정의, 공정 실현의 절대성을 강하게 느끼면서 한 것이지요. 나는 단순하게 지극히 복음적이라 여겼어요.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 절망하며 고통받는 이웃, 불의 폭력으로 억압받는 이웃과 함께 머무는 그리스도를 찾아가서 만나라’ 하는 내용으로 넘겼지요.
그러나 그 내용 중에 사회정의 실현을 위해 불의한 세력과 마주하여 혼신을 다해 싸우겠다는 내용이 있어요. 신부들한테는 사목 교서인데 좀 거부감이 있었지요. 나도 당시 시국과(부정한 군사 독재세력) 연관된 것으로 강하게 느꼈으니까요. 그래서 이것을 누가 썼냐? 하는 생각, 신부들은 누구 작품 아니냐 하고 의구심을 갖고 얘기 나눈 적이 있었지요.
 
황도근 그것이 논란이었나요?
 
최기식 예. 신부들은 항의 없이 나눈 얘기지만 지 주교님 의견이나 그 뜻은 들어 있어도 직접 쓴 것은 아니다. 문장형식으로나 내용으로나 전통적 교서와 전혀 다른 것을 감지하는 거지요. 사목 교서를 읽고 나도 바로 그렇게 느꼈지요. 김지하가 쓴 것이 아니겠냐 한 거요. 새해 교구 활동 목표라고 하면서 사회정의 실현에, 구체적 실천조직을 한다는 내용. 가난한 대중이 권리를 찾도록 투쟁하게 하고, 협동조합을 유도함으로 복음이 전해져야 한다고 나와요. 공의회 정신의 실천 방법을 제시한 거나 마찬가진데 우리 사제들은 사실 모두 받아들이기가 버거웠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신부들은 마음에 안 들어도 직접 주교에게 표현을 안 해요. 너무 투쟁적으로 보였다고 해도 바로 반대하는 것은 못 하잖아요. 주교의 이름으로 나가는 건데요. 사실 비서실에서 하는 첫 작업이었는지 모르지요. 나는 당시에 그렇게 믿었어요. 어떻든 주교님이 뜻하신 것과 다를 수는 없다 하고요. 나중에 경험한 일이지만 정의구현사제단 성명서가 나가고, 시국선언이 나갈 때도 같은 경우였지요. 세례를 받지 않은 김정남 씨가 썼잖아요. 신부들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옆에서 듣고 그 자리에서 써요. 그리곤 함께 수정을 조금 하고 사제단 이름으로 나가지요. 이렇게 김지하가 썼다 해도 아무 문제가 되는 게 아닌데 신부들에겐 예민한 것 아니었나 싶어요. 김지하는 그때 원주에 와서 기획실 직원으로 돼 있었다지만 신부들과는 대면도 없는 사람이었을 테니까요.
 
황도근 신부들과의 갈등이 드러날 정도는 아니었죠?
 
최기식 그렇지요. 갈등이 겉으로 드러나는 어떤 목소리는 없었지요. 모든 본당에서 신부님들이 실천해야 하는 ‘현실 속에서 그리스도를 찾자’ 사목 지침은 내용을 구체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건데, 이해가 잘 안 되기도 했어요. 정치참여 쪽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고요. 이것이 무슨 뜻일까? 나도 생각했지요. 교회 안에서, 또 교회 밖에서 구체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할 땐, 그냥 현실 속에 집집이 찾아다니면서 만나며 사목하자 그러는 거지요. 나는 그랬어요. 그런데 여기에 어떤 정치성이 있다는 거, 이것이 신부들한테는 동감하기 어려웠다 싶어요. 나는 본당 일에 여념이 없었지만, 그때 주교님 활동과 원주 신부들 분위기를 생각해보면 주교님하고 몇몇 신부들하고 사이가 별로라고 생각했지요. 의견 충돌 같은 것 보다 몇 명의 평신도들의 말만 듣고, 그들하고만 일한다는 불만 같은 거지요. 우리 신부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따라가지 못한 거로도 볼 수 있는데, 즉 의식차이라고도 볼 수도 있지요. 주교님은 벌써 가톨릭 노동 청년, 농민회 사회운동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거든요. “교회를 사회운동 조직으로 만드는 건가? 너무 사회 조직처럼 하고 있다.” 교회 안에서 사제들에게 반향을 엿볼 수는 없었지요. 사회 안에 깊숙하게 들어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 사목을 생각하고 평신도들의 활동을 중히 여기며 한 것으로 봐요. 신부들이 의식 면에서나 활동 면에서나 주교님을 따라가지 못했다는 거고요. 당시 정치적 국면 상황을 봐도, 그분의 사회참여 활동은 최고의 역동성 혹은 강동성이 아니었을까 해요. 어떤 이는 공의회 정신 실현으로 원주교구 르네상스 시기라고도 하니까요.
 
김찬수 지 주교님이 한국노동교육협의회라는 걸 만드셨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그것에 대해서 아시나요?
 
최기식 그런 것은 잘 모르고요, 개신교 산업 선교회 하고 가톨릭 노동청년회(JOC)에 함께 관여하신 것은 알아요. 이창복 씨가 JOC 회장도하고 그럴 때 박형규 목사하고 함께 한 거로 알아요. 그러니까 내가 본당 사목에 열중할 때 주교님은 벌써 농민 노동자들, 학생들과도 함께 하고 있었으니까요, 내가 처음 들어가자마자 원주MBC 부정부패 사건이 일어났어요. 사회적․정치적 정의구현 부정부패 척결, 가난하고 고통 받는 이들을 선택한 주교님의 신념을 나도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었지요. 반대만 안 하면 동조하는 거다. 주교님도 그렇게 인정했을 거예요. 무위당 선생과 주교님 가까이 있는 청년들은 거의 완전무장된 사람으로 볼 수도 있고요.
 
황도근 그러면 하나만 더 여쭤봐도 될까요? 공의회 얘기인데요. 방송국은 왜 만드시게 됐어요? 왜냐면 그게 궁금하거든요.
 
최기식 내가 1971년 10월 1일 원주에 오고 3일 날 데모를 하기 위한 모임을 학성동 성당에 했다고 그랬죠. 원주문화방송이 만들어진 뒤 1년을 운영하고 감사를 했는데 그것이 문제가 된 거예요. 우리가 1,300만 원 을 낸 건지 MBC가 1,700만 원인지 정확하지 않은데, 어쨌든 자본금이 3,000만 원인가 그랬어요. 그런데 나중에 감사를 해보니 우리 돈만 들어갔고 저쪽에서는 약속대로 자금을 제대로 낸 것이 아닌 거예요. 경리 문제가 보통 허술한 게 아니지요. 우리가 보낸 것만 가지고 1년 동안 운영을 한 거죠. 왜 너희들은 돈을 안 내놓는 거냐? 이렇게 된 거고 결국 약속을 안 지킨 것처럼 됐어요. 그러면서도 모든 권한은 MBC 대주주인 정수장학회 자기들이 가지고 있고 말이에요. 항의해도 답을 안 주니까 주교님이 직접 방송국을 찾아가요. 내가 듣기로는 그래요. 주교님이 찾아가니 그 앞에서 잠깐 기다리라고 하고 몇 시간인지 모르나 문밖에 앉혀 놓고 나중에는 만날 수가 없다고 돌아가라고 한 거예요. 주교님이 화가 났죠. 내려와서 그 얘기를 나누고 그냥은 얘기가 안 되겠다. 그때 부정부패 규탄대회를 계획한 거죠. 그때는 그렇게 들은 것으로 기억해요.
 
황도근 그때 신부님들 반응은 그렇게까지 원하지 않으셨던 것 같아요.
 
최기식 신부님들 몇 분은 이야기를 좀 들었겠으나 나부터 뭐가 뭔지 잘 몰랐어요. 그때 교회 밖으로 나가며 시위를 하고, 이런 건 상상도 못 할 때였어요. 우리도 뭔지 모르고 주교님이 오라니까 신자들 함께 간 거지요. 원동성당 마당에서 그 많은 사람이 모였으니 신났지요. 미사 드리고 시위를 하고 밖으로 행진하다가 돌아와서 연좌시위를 계속하고. 5분간 강의를 하라고 해서 인권에 대한 자료를 들고 하기도 했지요. 당해본 일도 없으면서요. 시위할 때 김지하, 최규창 회장이 마이크 들고 함성으로 구호를 외치던 그것은 생각나요. “뿌리 뽑자 부정부패! 물러가라 군사독재!”
 
 
부정부패 뿌리뽑아 사회정의 이룩하자
 
 
황도근 제가 여쭤본 것에 핵심이 아직 안 나왔는데. 왜 방송국까지 하시려고 했죠? 그땐 안 계셨지만 학교나 가톨릭센터는 이해가 가지만 방송국까지는 어떻게 생각을 하지요?
 
김찬수 그건 내가 좀 아는데 지 주교님이 외국 주교회 한번 가셨죠. 그런데 외국에서는 방송을 통해서 선교 활동을 많이 하는 얘기를 듣고 방송을 통해 선교를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을 하셨다고 그래요.2 마침 그때 MBC에서 지역에 방송국을 확장하려는 계획이 있었고, 아마 처음에는 원주교구와 하려고 한 게 아니라 원주에 다른 곳하고 하려고 했는데 자금을 마련하지 못해 천주교 원주 교구에 제안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주교님은 언론을 통해 선교 활동을 하고 싶어하셨다고 들었어요. 부정부패 규탄 시위도 어떻게 되었냐면, 지 주교님이 아세아 주교회의, 아마 필리핀에서 열린 주교회인지 가셔서 우리도 이제 방송 시작했다고 하면서 라디오방송을 한다고 하니까, 필리핀 신부가 얼마 들었냐고 물어본 거예요. 얼마 들었다 했더니 깜짝 놀라면서 그 정도 투자면 라디오방송 세 개를 할 수 있는 돈이라고 했데요. 그 소리를 듣고 돌아와서 ‘야! 외국에 가보니 우리가 그 정도 돈이면 라디오방송 세 개는 한다고 들었다. 한번 알아봐라’ 한 거고. 감사과정에서 드러난 부정을 따지려고 본사에 갔다가 몇 시간 동안 사장 방문 앞에서 무시 박대당하고 나서 규탄하기로 작심했다고 들었지요.
 
최기식 설립 문제는 한국 신부들보다 외국 신부들이 더 잘 알았을 거예요. 매스컴 위원회를 시작한 석 신부님도 그랬을 거고, 오 신부님도, 진광학교에 있던 경 신부도 마찬가지로 그런 쪽으로 아마 조예가 있고 동감했을 거예요. 공의회 바람이기도 했으니까요. 언론에 전문이던 김영주 실장 힘이 절대적 아니었을까요. 시작은 아무튼 나는 잘 몰라요. 원주 문화방송은 그래요, 그래도 70년대 후반엔 밤의 명상도 천주교 편에서 나오고요, 교회뉴스도 잘 보도 해주고 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봐요. 원주MBC 부정부패 규탄 시위 사건 자체가 민주화 운동에도 천주교 위상에도 엄청난 영향과 도움을 주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천주교에서 하는 역할이나 역량이 무너져가는 과정이 안타깝더라고요. TV 방송, 방송국 건축, 지분대로 협력하고 키웠는데 중앙본사에 완전 예속, 따로 할 수 있는 것도, 천주교회에 도움 되는 어떤 것도 할 수 없게 만들더라고요. 지방방송국에 전무제도도 그렇고, 민간 합자 회사를 없앤다고 하면서 운영에 아무 힘을 갖지 못하게 하더라고요. 처음에는 천주교 측에서 전무를 맡았는데, 나중에 상무 제도로 변하고 또 상무 제도를 없애버리고요. 나도 원주MBC 이사를 꽤 오래 했는데 상무 제도 없앨 때, 천주교 반대 투쟁위원 대표를 하기까지 했어요. 결국에 서울 본사 사장한테 착한 교구장이 비우고 양보를 한 것으로 끝이 나지요. 그 뒤론 천주교 쪽에서는 원주MBC 이사회에 참여한다 해도 교회 쪽에 어떤 프로그램 운영에도 힘이 없어진 것이라 보지요.
 
황도근 또 하나만 여쭤볼게요. 그 당시 큰 사업 중 하나가 진광학교 설립이죠. 1969년 3월 27일이네요. 이때도 지학순 주교님이 많은 일을 펼치시는데요. 어떻게 이렇게도 많은 일을 펼치셨나요? 1967년에 진광중학교를 열고 1969년에 진광 학원 법인 설립 인가가 나지 않았습니까. 내가 원주 오기 훨씬 전이지요. 장일순 선생은 대성학원도 만든 분이잖아요. 장화순, 김영주 씨와 의논하고 제안하며 주교님이 허락한 거겠지요. 육민관중학교를 인수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 후에 원주대학 인수 제안이 들어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래서 장일순 선생은 원주대학을 인수하자고, 그걸 받아들이자고 했는데 한쪽에선 중고등학교도 운영이 힘겹고 복잡하니, 포기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나요. 그 원주대학이 지금 상지대학이 된 거지요. 신부들은 모르겠어요. 의논도 하고 신부 회의도 했겠지요. 고등학교를 시작할 때는 1973년도로 돼 있는데 인문계 고등학교였지만 직업학교도 있을 정도였어요. 참으로 지역사회 발전에 꼭 필요한 시대적 응답이라 생각했지요. 나중에 독일 사람이 직업 교사로 오기까지 했었으니까요. 그런데 그런 것들이 힘들었나 봐요. 사립학교의 특성을 교육부에서 인정하지 않고 일반 학교로 변한 것을 보면 말이에요. 여러 일을 하면서 공의회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서 그런 일들이 벌어진 건 아닌지 추측을 해봅니다.
 
최기식 그러니까 주교님은 세상을 향한 교회 상으로 공의회가 의도한 그 뜻을 거의 완벽하게 실천하고 있었다고 생각해요. 신·구교 일치운동부터 사회참여 운동에 이르기까지요. 처음에는 그런 생각 안 했는데,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여러 가지 일들을 그렇게 대범하게 할 수 있겠냐 싶어요. 돈도 돈이지만 이 가난하고 어려운, 정말 먹고 살기도 힘든, 그런 때라고 볼 수 있거든요. 우리가 가난을 벗어난 지가 얼마 안 되잖아요. 내가 1971년도 신부 될 때도 풍수원에 전기가 안 들어왔어요. 공의회 정신이기도 하겠으나 많은 고통을 느껴온 천주교 수장으로 지역의 열악한 환경, 가난한 교구민의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최선의 노력을 한 것, 이런 것들이 공의회 정신을 구현한 일이 아닐까요?
 
황도근 그 당시 주교님이 외국에 나가서 다른 교구의 도움을 받아올 때, 밑바탕에 공의회 정신이 아니었으면 그 큰 자금을 가지고 올 수 있었을까요?
 
최기식 주교님 처음부터 하시는 일들과 그 열정이 공의회 정신과 맞아 떨어진다고 하면 좋을 것 같아요. 공의회 정신 때문이라고, 그렇게 표현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세계 대전이 끝나고 더구나 한국에선 6·25 전쟁이 끝나고 많은 도움을 받은 후, 구제품 시대가 거의 끝날 때라고 봐요. 식민지 정책으로 부를 누리던 국가들이 정신을 차리고 피지배국 가난한 나라를 도와주려는 기류가 돌 던 때지요. 서독은 이스라엘을, 영국은 인도 아프리카를 열심히 돕는 때 우리도 피지배국 전쟁 분단국 가난한 나라로 알려져 있었고요. 특히 분단된 한국에 대해 서독은 각별한 관심이 있었다고 봐요. 그리고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가톨릭 단체에서 많이 도움을 받은 것으로 알아요. 주교님 몸으로 뛰는 호소력이 낳은 결과라고 봐요.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뿌리라고 볼 수 있는 한국 가톨릭 구제회라고 있었어요. 식량을 비롯해 각종 구호품을 외국에서 받아서 나누어주는 기구였는데. 메리놀 선교회 파 주교(청주 교구장)가 하는 거라 했지요. 후원기구인 미국 가톨릭 구제회를 통해 모두 국제기구에 많은 도움도 칭했겠지요. 천주교 원주교구 교구장이 된 지 주교는 바로 이 기구(구제회)를 주교회의를 통해 인계를 받아요. 나중에 인성회로 명칭을 바꾸면서 도움 받는 국제기구로 되고 가톨릭 국제기구에 속하게 되지요. 1993년 이후엔 도움을 주는 국제 까리타스로 바뀌고요. 도움은 아마도 서독에서 제일 많이 받지 않았나 싶어요. 서독은 당시 분단된 나라로 한국 분단의 아픔과 힘든 사정을 동감하고 있었을 거고요. 그러니까 독일에서는 까리따스(순수 사회복지), 미제레올(사회개발), 미씨오(선교) 세 기구가 있는데 모든 곳에서 다 한국이 도움을 받았다고 보지요. 그리고 홀란드, 오지리 부인회 미국 가톨릭에서 등에서 받았지만 지 주교 님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보지요.
 
황도근 여러 곳에서 지원이 왔는데요, 어디서 온 것이 어느 쪽에 들어갔나 알 수 있을까요.
 
최기식 가톨릭센터(가톨릭 문화센터)는 오지리 부인회란 말은 들었어요. 그리고 학교 짓는 것은 어디서 왔는지 나는 잘 모르지요. 학교 짓는 것에도 많이 왔을 텐데 말입니다. 홀란드나 여러 곳에서 같이 했을 거란 생각이 들고요. 주교관은 독일 미씨오 같은 데서 보내 왔을 거고 미국 가톨릭에서도 도움을 받았을 거예요. 외국 신부님들 힘도 컸겠지요. 걸음도 많이 하고 편지도 얼마나 많이 했을까 생각해요. 어디 어디서 얼마를 원조 받았나 하는 것은 내가 자세히 모르지요. 하여튼 주교님이 주교관 지었죠. 그리고 가톨릭센터, 학교 지었어요. 그리고 병원도 만들었죠. 놀라운 일이지요. 교회로서는 교구가 설정되고 정말 찬란한 시기였어요. 5~6년 지내면서 건물 하나 짓기도 어려운 시절에 동시다발로 그 많은 일을 하셨잖아요. 그리고 주교님 집에 돈이 많거나 영향이 큰 사람이 아니라 빈털터리, 신부 될 때 군화 신고 신부 됐다고 하잖아요. 돈 한 푼 있는 사람이 아니에요. 이게 교회의 힘이지 않겠습니까.
 
황도근 그런데 독일에는 세금 중에 종교세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최기식 그래요. 그래서 신부들도 정부에서 월급을 받아요. 그리고 사제도 두 종류로 나누어져요. 하나는 채플린, 또 하나는 파더, 사제도 등급이 있어요. 정규대학 진학대상 15%만 뽑는다고 했어요. 나머지는 전부 직업학교죠. 초등교사도 채플린도 모두 직업학교 졸업자래요. 정규대학 출신 신부들은 본당 주임도 본당 운영도 모두 맡을 수 있어요. 석사·박사가 대우를 받으니까요. 직업대학 출신은 신부가 되더라도 본당에선 보좌가 되고, 병원 사목이나, 사회복지 일들을 맡아서 해요. 기혼 부제들도 있는데 그 모든 교회 종사자들을 정부에서 월급을 줘요. 종교세가 있으니까요.
 
황도근 종교세가 독일은 1%네요.
 
최기식 종교세가 커요. 그래서 사회복지나 여러 예산의 70%는 정부에서 주고, 교회 안에서 걷는 것이 30%라고 해요. 천주교 개신교 똑같다고 하지요. 원주교구에서 지원받은 많은 부분이 독일 정부에서 준 거라고 해도 되지요. 그들도 그래서 철두철미하게 증빙서류를 만들어 사용한 보고를 해야 해요. 원주교구 사회복지 역사가 다른 교구에 비하면 정말 특이한 점이 있지요. 가톨릭 사회복지 역사에 대한 것도 누군가가 연구를 깊이 했으면 좋겠어요. 지 주교님 빼고 나면 한국 천주교 사회복지 제대로 설명할 할 수 없지 않을까 싶어요. 원주교구 사회복지에 대해서도 그렇고요. 사회복지에 오랫동안 종사한 나의 자존심이기도 하니까요.
 
김찬수 공의회 정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주교님의 뛰어난 활동에 대해서도 들었고요. 공의회를 할 때도, 끝나고 나서도 지도자들의 찬반이 있었나요? 한국 교회 안에서도 계속 갈려 있는 것을 보는데, 왜 그렇지요?
 
최기식 인간 공동체는 여러모로 많이 갈라지고 분열돼 있지 않습니까. (이념, 혈족, 국가, 종교, 소유 등) 천주교회도 거룩하고 하나인 공동체라 하지만 마치 우리나라 진보, 보수처럼 사회 참여, 사회 정의 구현에도 신부들마다 생각과 방식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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