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79호] 기획특집 - 최기식 신부 사제서품 50주년_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5)
등록자 관리자 등록일자 20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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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서품식
 
기획특집 - 최기식 신부 사제서품 50주년
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5)
글. 편집위원회
 
 
 
김찬수 지난번에 공의회 정신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는데요. 주교님의 뛰어난 활동에 대해서도 들었고요. 공의회를 할 때도, 끝나고 나서도 지도자들의 찬반이 있었나요? 한국 교회 안에서도 계속 갈려 있는 것을 보는데, 왜 그렇지요?
 
최기식 인간공동체는 여러모로 많이 갈라지고 분열하고 있지 않습니까. (이념. 혈육. 국가. 종교. 소유..) 천주교회도 거룩하고 하나인 공동체라 하지만 마치 우리나라 진보 보수처럼, 사회 참여, 정의 평화운동에도 성직자들 사이에 이해와 실천에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봐요. (지난 호 참고)
특히 한국천주교회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보편된 교회임을 자처하면서 사회 참여, 정의와 사랑 실천면에서는 마치 갈라진 것처럼 보이게 되는 것이지요. 공의회가 진행되면서도, 끝나고 나서도 로마 최고 수뇌부에서도 계속되는 인간적 갈등이 있었다고 해요. 초대교회 역사 안에 신앙 교리 면에서, 지도체제, 제도 면에서 문제가 되어 얼마나 많이 갈리고 분열되었는지 알고 있잖아요. 교회 공동체도 사람의 공동체라서 그런가 봐요. 교회 명예, 권위, 자본이나 안전의 이익 때문이라는 변명을 할 수 있다고도 봐요. 그렇지만 신앙 교리 윤리 면에선 이해를 같이하면서 실천 면에서 입장을 달리하는 것을 보게 돼요. 그러면 ‘세상 바라보는 시선이 달라 그런 거야.’ 하면서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거지요.
 
황도근 우리나라 현재 정치판하고 조금도 다를 바가 없겠네요. 국가를 위하고 민족을 위한다고 하며, 평화통일을 말하면서 행동은 전혀 다르니까요. 사실 천주교회도 역사적으로 세계전쟁, 나찌스학살, 일제 침략, 이념 전쟁에 대해서도 올바른 처신, 예언적 본분을 다하지 못함에 비판을 받지 않았습니까. 한국 천주교회도 지학순 주교님 구속 이전엔 별로 분열 양상이 안 보이다가 그 사건 이후 드러난 것 아닌가요?
 
최기식 맞아요. 주교님이 구속되면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생기게 되었지요. 그런가 하면 그 반대편 입장에 천주교구국사제단 이란 것도 생겼고요. 평신도 편에서도 대한천주교수호협회(대천수)라고 하며 정의구현 사제들 활동을 종북 빨갱이고 악마의 집단이라 외쳐대며 대치 현상을 보이기도 했지요. 주교들도 사제들도 수도자 평신도 모두가 갈리기는 마찬가지예요. 공의회 후에도 많은 분은 정교분리 원칙을 지켜야 한다 생각했지요. 교회 안녕만 생각하고 사회 참여에 대해서는 소극적이었지요. 나도 그런 경우가 아닌가 생각하지요.
 
 
 
유학 포기
김찬수 신부님도 주교님 구속 전만 해도 정치나 사회참여에 관한 관심도 없으셨다는 거지요? 조금 얘기를 바꾸어 신부님 유학을 포기한 과정을 듣고 싶어요. 지난번에 잠시 얘기를 들었는데 갑자기 유학 발령을 받았다고 하셨지요? 휴가를 갔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비보를 받고 부산에서 밤새 달려와 보니 아버지가 아니고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방에 누워계셨다고 하셨잖아요. 열심히 어머니를 모시고 한방의원을 찾아다니고 분주히 책상에 쌓인 우편물을 정리하다가 인사발령 통지를 보고 놀랐다고요. 많은 번민 끝에 서울로 가서 독일어 공부를 하셨다고 했지요? 부모님 때문에 마음이 아파서 울기도 하며 주님 뜻이라 여기며 순종하기도 했다지요? 여기까지 지난번 들었습니다. 1993년 11월이었던가요?
 
최기식 그렇지요. 인수인계 서류 정리할 시간도 없어 사무장에게 부탁하고 황급히 본당을 떠나야 했어요. 친척 누님이 있는 한국순교복자수녀원에 머물며 독일 문화원에서 독일어 공부를 시작했지요. 그런데 부모님 생각하면 떠난다는 생각만 해도 너무 마음이 아파 울기도 참 많이 울었지요. 떠나면 6~7년 동안 올 수 없고, 돌아가셔도 올 수 없다고 생각했고요. 병들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생매장하고 가는 것이라 여겼으니까요. 더구나 형님에게 맡길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거든요. 그래도 시골 형님에게 맡기고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러면서 나와 함께 있던 누님을 풍수원 모 신부님(골롬바노회) 식복사로 가게 했고 근처에서 어머니를 살펴주기로 했지요. 누님에게도 어머니를 맡긴 것이 된 거예요. 그리고 그땐 순교복자회 끄룩스 발바라 누님 수녀님이 ‘부모님은 내게 맡겨. 내가 책임진다.’하며 정말 큰 버팀목이 되어주셨어요. ‘나를 따르려면 부모 형제를 버리고 나를 따라야 한다.’ 기도하며 주님의 말씀으로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요. 어린 소년으로 마카오로 떠났던 최양업 신부님 생각도 하고요. 그러면서 학원에 다니며 7~8개월 지났지요. 주교님이 이야기를 먼저 나누고 발령을 냈어도 아마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 아닐까 생각도 했어요.
 
김찬수 그래서 주교님도 많이 원망하셨겠네요. 그래도 옛날에 유학 보내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었잖아요.
 
최기식 그렇지요. 1950~60년대에는 학생 때 많이 보냈지요. 지도자 양성을 위해 주로 로마로 보냈다고 해요. 그 후 교구 방침에 따라 신부가 되고 나서 보내곤 했지요. 학비도 문제였지요. 지금도 한국 각 교구에서 모두 학비를 부담하는 것은 아니에요. 주로 로마로 많이 가는데, 교황청 포교성에서 도와주어요. 원주교구도 지학순 주교를 비롯해서 김지석 주교, 조규만 주교 등 많은 신부들이 로마에 유학을 다녀왔어요. 불란서 독일 홀랜드 등지 수도회나 선교단체 도움으로 유학을 할 수 있었지요. 학생 때든 신부가 된 후든 원하면 누구나 한번은 꿈을 꾸어 볼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해요. 유학을 갔다 와야 교수도 되고, 교회 지도자가 되고, 교회 중책을 맡는다고 여기니까요. 교구장들도 내일의 일꾼 양성을 위해 휴학을 보내는 것이고요.
 
김찬수 그런데요. 신부님은 결론적으로 유학 발령 받고도 유학을 가지 않으신 거잖아요? 부모님 때문만은 아닌 거로 아는데 간단하게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최기식 첫째 이유는, 학생 때부터 나는 절대로 학자가 될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공부보다는 실천으로 사랑을 살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내 길이라 여겼지요. 광산촌, 농촌,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하며 살자고 수원교구에 있던 친구를 원주로 이끈 것도 그래서였다고 봐요. 둘째는 노부모님도 이유가 될 수 있지만, 그보다 결정적인 것은 주교님 구속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김찬수 주교님이 구속되더라도 학원은 계속 다니지 않으셨나요? 주교님이 감옥에서 나온 후에라도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나오신 후에 인사발령을 취소하셨나요? 나 같으면 훌쩍 떠나도 좋을 것 같은데요.
 
최기식 그렇게 할 수도 있었지요. 1974년 7월 6일 주교님이 외국에서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시는데 김포공항에서 바로 연행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요. 3~4일 후에 주교님이 풀려나셨다는 이야기를 듣고 별일 아닐 거로 생각했지요. 동생네 집으로 가셨다. 수녀원에 계시다. 병원에 연금되셨다는 등 여러 이야기를 듣다가 하루는 명동으로 오라는 연락을 받고 나가지요. 그날이 바로 그 유명한 <양심선언>을 발표하는 날이었어요. 성모병원(현 명동 가톨릭회관) 앞마당에 원주에서 올라온 신부, 신자들, 그리고 바오로회 여러 수녀님들, 서울교구 몇 신부들, 김 추기경님, 윤 대주교님도 계셨던 것으로 기억해요. 50여 명 되었을 거예요. 강론처럼 말씀을 나누고 대성당으로 가시기에 모두 따라갔어요. 조용하고 침울한 분위기 속에 미사를 마치고 다시 병원 쪽으로 왔을 때, 비로소 주교님이 연행되어 간다는 것을 알았지요. 그날이 비상 군법회의에서 법정으로 나오라고 통지를 받은 날인데 <양심선언>으로 유신 독재, 긴급조치를 전면 부정하며 비수를 던지는 것 같은 저항을 한 거지요. 그래서 남산 중앙정보부로 연행되어 가셔요. 그때 원주 김영주 씨였나 봐요. “신부님이 주교님 따라 동행해 가세요.” 그 소리에 바로 나는 검은색 지프 차량 앞자리에 올랐지요. 남산 중앙정보부 2층 조서 받는 방까지 따라서 갔어요. 나무 의자에 앉으시는 것을 보며 문밖으로 밀려 나왔지요. 주교님 나가실 때까지 기다리겠다고 했어요. 그게 용납이 되나요? 정문 밖까지 떠밀려 나와 명동성당까지 혼자 걸어오는데, 그때 그 기분을 어떻게 표현할 수 없어요. 놀라움과 걱정, 분노, 진땀이 나고 눈물이 나더라고요, ‘차라리 내가.’하는 생각만 들고요. 그 뒤로 주교님 나오실 때까지는 학원도 유학을 가는 것도, 그런 생각 자체를 접었다 할까요. 모두 중단하기로 마음먹은 거지요.
 
김찬수 주교님이 그 뒤에 얼마 동안 감옥에 계셨나요?
 
최기식 그다음 해인 1975년 2월 중순이니까 근 7개월 동안이 아닐까 생각되네요.
 
김찬수 그동안 면회를 한다든지 한 번도 못 만나셨겠지요?
 
최기식 그럼요.
 
김찬수 그러면 유학을 간다, 안 간다 하고 언제 이야기를 나누셨어요.
 
최기식 주교님 출감 하신 3개월 후쯤에요. 원동성당에 잠시 머물고 있을 때였지요. 호출을 받고 주교관으로 올라갔어요. 주교님은 내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을 거라 믿으셨나 봐요.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주교님이 말씀하더라고요.
“어- 최 신부 왔어? 그런데 말이야 정부에서 공부하러 나가려면 뭘 써놓고 가라고 하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해?”
“어디서요? 정보부에서요?”
“음 정보부에서.”
“저는 지금 나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생각을 좀 미루면 안 되겠습니까? 그런 서약을 쓴다는 것도 그렇고요.”
“그럼 그렇게 하자. 그럼 우선 원동성당 보좌로 좀 있기로 하면 어떨까?”
“네 감사합니다.”
간단히 유학 문제가 미뤄지게 되니 마음은 아주 가벼워졌지요. 사목이나 열심히 하자 생각하고 청소년들, 교리교사들하고 신나게 지냈지요. 그런데 12월 초에 또 주교관으로 오라고 전갈이 온 거예요.
 
김찬수 인사 문제였겠죠?
 
최기식 그래요. 바로 유학 이야기를 하면서 이번엔 로마로 가야 하겠다고 수정 제안을 하시는 거예요. 로마로 가라고요. 나는 마음을 이미 정한 것이라 확실히 말씀드렸어요.
“주교님 저 공부하러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주교님이 의아한 눈빛으로 나를 빤히 보셔요.
“솔직히 말씀드려 저는 공부할 사람이 못됩니다. 교수가 될 자신도 없고 높은 사람 되는 것도 싫습니다. 학교에서 배운 실력으로 강원도에서 충분히 사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하고도 단호한 억양으로 말씀드렸지요. 잠시 실망하는 얼굴로 멈칫, 말씀이 없으시더니,
“그럼 본당으로 나가야지?” 하셔요.
“네, 감사합니다.” 했지요. 그러니까 바로
“단양으로 가야겠다.” 하시데요. 좀 오래 있으면 해서
“얼마 동안이면 되겠습니까?” 했더니
“최소한 2년은 있어야 하겠지.” 하셔요.
“감사합니다. 열심히 살겠습니다.” 하고 나오는데 유학을 완전히 포기한 기분 정말 묘하더군요. 그곳은 공소가 7개나 되는 곳인데 신부가 부족해 사제는 공석이고 수녀님들이 지키고 있는 성당이었지요. 그런데 1976년 1월 4일 발령이 나서 다시 그해 4월 부활주일 후 바로 또 보좌로 있던 원동성당 주임으로 돌아오게 되지요.
 
김찬수 그렇게 끝나고 다신 유학에 관한 이야기 없었나요?
 
최기식 없었지요. 그리고 참 1983년 8월 미문화원 사건으로 교도소 갔다가 나오니까 그때는 뉴욕 메리놀 대학으로 가라고 하셔요. 그때는 쫓아내는 것 같은 기분이라 또 안 간다고 했었지요.
 
 
 
지학순 주교님의 구속
황도근 유학 이야기 잘 들었습니다. 결국에 유학은 안 가신 건데 결정적인 것은 지 주교님 구속사건 때문이라고 먼저 얘기하셨어요. 주교님이 구속되시면서 신부님 활동과 거취 얘기를 듣고 싶어요. 원주교구에서 먼저 기도회, 석방, 인권기도회가 시작되었겠지요?
 
최기식 김포공항에서 처음 연행되실 때는 원주에서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니까요. 신부님 한두 분 신자들이 마중을 나왔겠지요. 나는 전혀 알지도 못하고 있었고요. 갑자기 연행됐다는 소식에 원주교구는 물론 전 한국 교회가 발칵 뒤집혔다고 봐야지요. 주교회 상임위원회도
바로 열려 입장을 발표하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대통령 면담도 하고 3일 만에 나오신다는 소식을 들어요. 7월 10일 추기경님 주례로 지 주교님 위해 미사를 하는데 주교님이 저녁 8시에 풀려나신다는 소식을 듣지요. 그 미사에 참석한 후 일이 잘 해결되고 더 큰 일은 없을 거라 믿고 있었지요. 나오시며 동생네 집으로, 수녀원으로 가택연금 되었다가 병원으로 옮겼다는 소식도 듣고요. 병원에 한번 가서 뵙기도 했어요. 아무 말씀도 나누지 못하고 돌아왔고요. 그리고 7월 23일 <양심선언> 하는 날 연락 받고 나가 중앙정보부까지 주교님과 동행하고요. 그날부터 주교님이 못 나오시고 구속된다는 것 알고부터 석방 운동, 기도회 운동에 발 벗고 참여하게 된 거지요.
 
황도근 기도회를 할 때 원주 신부들, 원주 신자들이 먼저 주동이 되나요?
 
 
지학순 주교 석방을 위한 기도회 후 거리시위(원주 원동성당 앞, 1974)
 
 
최기식 미사하고 기도회는 누가 먼저라고 하기보다 자발적이고 자생적이었다고 할 수 있어요. <양심선언> 할 때 원주에서 많은 분이 서울로 왔던 것으로 알고 있고요. 그 뒤 기도회는 원주에선 원주대로 신부님들이 열심히 했지요. 구속 직후 처음에 교구 사무처장 양대석 신부, 원동성당 이영섭 신부, 학성동 노세현 신부가 서울로 줄줄이 불려가서 조서를 받고 나오지만 기죽지 않고 기도회를 계속해요. 서울은 서울대로 각 교구도 기도회가 열리게 되지요. 구속되시고 바로 2일 후인 7월 25일 추기경 주례로 명동에서 기도회를 하는데 김 추기경님 강론이 큰 울림을 주어요. 모든 성직 수도자 신자들은 정의와 사랑을 위해 자기 자신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는 그리스도를 보여줘야 한다고요. 그리고 같은 날 주교단 선언문이 나오고요. 27일은 인천교구에서 계속해서 하고 또 각 교구에서도 계속 기도회를 하지요. 인천, 수원, 안동, 청주, 대구, 광주, 전주, 부산교구 기도회가 열려요. 대구, 부산교구는 주교님이 못하게 한다는 얘기를 듣기도 하지요. 가톨릭 시보에도 한 달이 넘도록 지 주교님 구속사건에 대한 기사가 한 줄도 없어서 항의를 한 적도 있어요. 사제들 중심으로 모든 교구에서 자발적으로 석방을 위한 기도를 하지요. 처음에 신 신부님과 나는 신부들을 만나러 참 많이도 다녔지요. ‘지학순 주교는 누구인가’하는 것과 <양심선언> 강론 유인물을 들고 설득도 하고 기도 부탁도 하고요. 각 교구 모든 기도회 전에도 자료를 전해주러 가는데 터미널에도, 역에도, 지하 입구에도 불시 검문하는 경찰도 많았지요. 유인물을 뺐기거나 걸린 기억은 없어요.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제1 시국선언 (1974.9.26)
 
김찬수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은 어떻게 시작됐어요? 아주 처음에요.
 
최기식 서울교구에서는 지 주교님이 처음 연행되고 안 나오니까 젊은 신부들이 추기경님을 방문하는 데서 시작된다고 봐요. 그리고 정식 구속되고 나선 기도 미사 후에 신부들 모임을 따로 하지요. 구속자들 이야기부터 시국이 어떻게 돼가고 있는지 이야기를 듣기도 하고 기도 모임을 하는데 날짜를 정하기도 하고요. 처음 서울 기도회 준비나 추진할 땐 원주교구 신현봉 신부와 내가 늘 참석을 했지요. 신현봉 신부님 역할이 제일 컸다고 생각돼요. 그 동창들이 (박상래 신학교 교수, 김병도 가톨릭 출판사 사장 등) 함께 해주고 함세웅 신부 동창들(김택암, 양홍, 안충석 등), 그 바로 밑 반 오태순, 장덕필 신부가 가장 열성적이었어요. 누가 이끌어서가 아니고 온전히 자발적이었다고 생각돼요. 그리고 주교님이 구속되고 20여 일 후 비상군법회의 재판에서 징역 15년이 선고되면서 사제단 활동이 적극적이고 강성으로 드러나게 돼요. 그리고 기도회 성격도, 명칭 내용도 변하고요. 처음엔 양심인 민주인사 석방,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로 했는데 민주회복 운동으로 변하게 됩니다. 8월 말쯤 될 텐데 인천교구에서 지 주교와 고통 받는 모든 이들을 위한 미사를 드려요. 그때 사제 수도자들 서명을 받는 것이 있었지요. 민주회복 인권회복 기도를 계속하겠다는 것이었는데 사제단 결성의 결속을 다지는 것이 되지요. 그러면서 조직과 얘기가 나오는데 조금 며칠 뒤가 될 거예요. 사제단 명칭 조직에 대해서 논의를 해요. 함세웅이 총무고 박상래가 회장, 또는 신현봉 신부가 회장으로 돼야 한다고 해요. 확실한 것은 내가 발언을 한 거라서 기억하는데 함세웅 신부가 전체 총무로 하는 것은 좋다. 우리 안에서는 그리 인정하고 하자. 그리고 누가 회장이라 해도 좋다. 그러나 공적으로 하지는 말자. 밝혀지면 본인들도, 다른 신부들도 일하기 어려우니 교구 연락 책임자만 정하고 서울 신부님들 중심으로 하자 했던 거예요. 그러면서 각 교구에 열성적인 사제들이 연락 책임자로 함께하기로 했지요, 1982년까지는 회장님 총무님하고 부른 적이 없는 거로 알아요. 그러면서 공식 사제단 명칭은 정하기로 해요. 9월 26일 명동에서 전국시국기도회를 크게 하기로 정하기도 하고요. 명칭도 그때 발표하기로 하지요. 그러면서 시위도 하자고 해요. 그래서 원주에서 시위 예행연습처럼 기도회를 하자고 해요. 각 교구 신부님들이 원주 교육관에 모여 23일 저녁 세미나처럼 많은 얘기를 나누지요. 다음 날 원동에서 하는 기도회 얘기도 하면서요. 원주에선 경험이 있으니 신나게 됐죠. 그다음 명동성당에서 전국기도회가 열리지요. 그래서 9월 26일 명동성당 전국시국기도회에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이름으로 <제1시국선언>이 발표되고 거리로 나가는 두 번째로 시위를 하지요. 그때 신현봉 신부님이 사제복 차림으로 목매어 끌려가고 거리에서 민중들에게 박수 받고 목이 터져라 함성 지르고요. 하느님이 주시는 힘과 용기를 가득히 받는, 신나는 밤이었지요.
 
 
 
전국성년신앙대회
김찬수 사제단이 기도회를 마치고 거리로 행진을 시작한 것은 이 명칭을 확정하면서부터가 되네요. 세 번째 시위는 언제가 돼요?
 
전국 성년대회 미사 (서울 가톨릭대학, 1974.10.9)
 
최기식 10월 9일 있었던 전국 성년 대회가 혜화동 신학교 마당에서 있는 때였지요. 화해 쇄신을 위한 가톨릭 전국성년대회는 14개 교구에서 성직 수도자, 신자 2만여 명이 모이는 행사였어요. 시국 관계로 모임을 반대하는 분들이 많았지만 주교위원회에서 교구대표들도 모이자 해서 준비된 것이라 취소될 수가 없었다고 해요. 하지 말자는 주장도 강했으나 서울교구 부주교인 최석호 신부가 사표를 내고 최성룡 신부가 들어서며 대회가 추진되기로 했다는 얘기를 들어요. 우리 사제단은 힘을 얻고 전날 밤 우리의 비밀계획을 짜지요. 성년 대회는 분명 조용히 신앙대회로 끝날 것이란 예정을 두고, 사제 20여 명이 모여서 의논을 해요. 의견이 분분할 수밖에요. ‘시위를 잠시만 하자.’ ‘자리를 옮겨서 밤샘하자.’ ‘그때 분위기 봐서 우리가 앞장서서 밀고 나가자 하는 것만 결정하자.’ 며칠 전 대전에서 전국 꾸르실료 대회 때도 찬스를 놓쳤으니 이번만은 시위행진을 꼭 해야 한다. 결정하고 밤늦게 헤어지게 돼요. 유인물 준비도, 봉사할 신학생들 동원, 그것을 뿌리는 것과 구호를 외치는 것도 나의 책임이었죠. 학교 입구 기숙사 3층에 동대문 성당 스피커를 빌려 사령탑을 설치하고 미사가 끝나는 순간만을 기다렸죠. 미사 중에 김덕재 전주교구 주교님의 강론도, 안승길 신부의 기도도 너무 훌륭해서 그것만으로도 대회 의미를 충분히 주었다고 했죠. 우리 계획엔 안승길 신부가 행사가 끝날 무렵 사회자 마이크를 뺏어 ‘사람을 찾는다.’하며 신호를 하기로 했지만 저지되었죠. 퇴장 행렬은 시작됐는데 마음이 급해 어떻게 할 바를 몰랐어요. 함세웅 신부가 준비된 신부들과 퇴장하는 복사 행렬 앞에 십자가를 뺏어 행렬의 방향을 돌리는 것에 성공하죠. 순식간에 많은 교우가 둘러싸고 박수를 보내요.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았다고 했지요. 사제들이 모두 따라서 정문으로 나가니 주교들은 난처해 어쩔 줄 몰랐다 해요. 이문희 주교, 도쎄나 대사 노 대주교는 옆으로 빠지고 김재덕, 황익성, 나 주교 두봉 주교 춘천 박 주교가 정문으로 따라 나갔죠. 나는 늘 하는대로 <장하다 순교자> 성가를 하다가 구호를 외쳐댔죠. 전주 신부들은 정문에 플래카드를 펴 들고 있다가 앞장서가고 오태순 신부 등 몇몇은 구호를 외치며 정문 앞에서 시국선언문 낭독하고 한 시간 정도 대치 상태로 있었지요. 먼 곳 가는 버스 다 보내주면서 주교들이 학교로 들어와요. 동성학교 앞 로터리에서는 가톨릭 노동청년들, 신부, 수녀들도 같이 구호를 외치고
시위를 계속해요. 최루탄 가스 맛도 처음 맡아 보고요. 7시가 넘어 끝났는데 대 신학교 다시 들어가 20여 명 신부들이 주교님들한테 감사한 인사도 드리고 신학교 교수 신부님 주선으로 저녁 식사도 하고 그랬어요. 이 행사가 있고 나서 수도회 평신도 단체들, 각 교구에서 신부들도 더 적극적으로 움직이게 되었다고 보지요.
 
 
 
수도원에서 쫓겨남
황도근 주교님 구속되며 신부님은 유학 준비만 하다가 사회참여, 사제단 정의구현 운동가로 변신하는 거잖아요. 갑자기 마음을 바꾸신 거지요?
 
최기식 그렇게까지 말할 것은 없을 것 같네요. 갈 곳도 없고 학원도 재등록을 안 했고, 할 일이 없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다고 할까요.
 
황도근 왜요?
 
최기식 그동안 학원 다니며 복자수녀원에 있었잖아요. 내가 잘못해 거기서 그만 쫓겨난 일이 있어요. 서울교구 젊은 신부들 중심으로 처음 기도회를 한다고 해서 명동성당에 가지 않았겠어요? 허락이 안 돼서 회관(당시 성모병원) 앞마당에서 기도모임을 한다는 거예요. 그러면서 불평하는 것을 들어요. ‘누가 못하게 해요? 주교님이?’ 하고 물었지요. 김00 신부도, 최00 신부도 그렇고
교구 사무처장 신부도 그렇고, 당시 중진 선배 신부들이 그런다는 거예요.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지 못하게 한다고요. “아니, 주교가 감옥에 갔는데 그분을 위해 성당에서 기도를 못해? 미사를 못 드린다?” 얼마나 열이 나는지 화가 치미는데 견딜 수가 없었어요. 나중에 다른 신부들은 기억이 안 난다고 하는데 나는 너무 심한 충격을 받아서 그런지 잊을 수가 없는 거예요. 주교가 억울하게 갇히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갇혔는데, 불의한 독재 권력에 저항하며 갇혔는데 그를 위해 기도도 못한다? 꽂혀도 너무 깊이 꽂혔었나 봐요. 존경하던 선배 신부들인데, 전혀 용납이 안 되고 풀리지 않아요. 나중에 조금 잘못 이해한 것이 있기는 했었지 만요. 그때 나는 한국순교복자수녀회 제3회원 지도신부라고 해서 가끔 월례미사를 드렸어요. 부인들이 약 200명 모이는 모임이었지요. 미사 강론 중에 지 주교님 구속사건 얘기를 해요. 남산에 가신 후, 그 다음 주에 그랬을 거예요. 나도 모르게 그만 주교가 감옥에 갔는데 기도를 못하게 하면 말이 되냐고 큰 소리로 외친 거예요. 주로 할머니들, 나이 든 분들인데 놀라서 눈물도 흘리고 그랬어요. 기도를 반대한다는 신부들 몇 사람 이름을 들은 대로 댄 거지요. 서울 교구 중진들이고 지 주교님과 거의 비슷한 연배 신부님들이었지요. 어느 성당 김00 신부 어디에 최00 신부 어디에 000 신부 하고 말이에요. 그러면 안 되는데 말이지요. 그때 계시던 할머니 중 한 분이 00성당 김00 신부에게 바로 달려간 거예요. 확인도하고 항의도 할 셈이었겠지요. 그 신부님을 평상시 존경하고 잘 알던 분이라 생각해요. ‘신부님이 지 주교를 위한 기도회 미사를 못 하게 했다는데 도대체 그 이유가 뭐냐? 왜 그러셨냐?’ 고 했겠지요. 그 신부님은 금시초문이잖아요. 알지도 못하는 얘기를 할머니가 하니 얼마나 화가 나요. 그러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하냐고 했겠죠. 복자수녀원 3회 미사 때 최기식 신부가 그랬다고 답을 했을 거고요. 나를 부르거나 만날 생각도 안 하고 바로 수녀원 마뗄 총 원장 수녀한테 전화를 걸어 호통을 치지 않았겠어요. ‘어떻게 그런 놈을 수녀원에 두고 있냐. 당장 내쫓아 버려라.’ 하고 막 퍼부었겠죠. 원장 수녀님도 강론을 들었으니 내용을 잘 알고 있지요. 그 신부님도 서울교구에서 가장 가까운 중진 신부님이었으니 어쩌겠어요. 거역도 변명도 할 수 없었겠지요. 아침 미사가 끝나고 잠깐 보자고 하셔요. 수녀님 집무실로 갔지요. “신부님, 잠깐 수녀원에서 나가 계셔야 하겠어요.” 해서 왜 그러냐고 물었지요. 강론 때문에 그런다 하면서 누구라는 말도 없이 신부들한테서 전화가 오고 난리라는 거예요. 무슨 말을 더할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잘못했습니다.”하고 바로 그날 가방 싸 들고 수녀원에서 나왔지요.
 
황도근 바로 나오셨군요. 그 뒤로 그 강론 때문에 힘든 일은 또 없었나요.
 
최기식 그 뒤로 최 신부가 신부들 편 가르길 하고 원주 신부들을 비난했다는 얘기도 골롬반 외국 신부들한테 듣기도 하죠. 한번은 주교님 <양심선언> 타이핑을 했다고 정보부까지 끌려가서 고초를 당했던 수녀님인 서 레몽 샬트르 원장 수녀님이 와서 나한테 얘기를 해주는 거예요. 학생 때 내가 가장 많이 은혜를 입은 신부님, 중학교 1학년 때부터 라틴어를 가르쳐주며 근 12년을 신학교에서 지도신부 해주고 나중에 학장으로서 담배 사건으로 쫓겨날 뻔했던 나를 용서해 줬던 그 신부님, 그분이 말이지요. 수녀원 강의를 하면서 그러시더래요. ‘내가 가장 사랑하고 아끼던 제자가 자기 스승과 선배들을 모함하고 비난하는 아주 못된 세상이 되어버렸다.’ 하고요. 그 소리 듣고 얼마나 마음이 아팠나 몰라요. 나중에 편지까지 드리며 변명도 하고 용서를 빌기까지 했네요. 사실 그분 이름은 댄 기억도 없으면서 그랬지요.
 
 
 
가톨릭 출판사가 배움터
황도근 공개적으로 선배 신부들을 공격한 것이 상처가 되기도 했군요. 그리고 어디로 가셨어요?
 
최기식 원주로 가서 신현봉 신부님과 얘기하고 서울 명동성당 주교관에 붙어있는 가톨릭 출판사로 갔지요. 출판사 사장인 김병도 신부님이 신현봉 신부 동창이라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요. 출판사에 창고 같은 작은 방이 있었는데 침대를 들여놓고 거기 임시로 머물 수 있었지요. 성가회 수녀님들 세분이 출판사에 계셔서 점심도 얻어먹으며 사제들 모임의 간사 역을 자처한 것처럼 된 거지요. 근 7개월을 그곳에서 지내게 되지요.
 
황도근 주교님 구속되며 신부님은 수녀원에서 쫓겨나고 교회가 정해준 거처도 없이 출판사에서 열나게 석방 운동을 하잖아요. 그때의 정치 사회적 시국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상황을 알고 계셨나요?
 
최기식 몰랐다고 해야겠지요. 그 이전에 있었던 대통령 부정선거(1971년), 남북 7·4 공동성명, 유신헌법, 유신체제, 계엄령과 학생·지식인·종교인 구속, 민청학련 사건 등 일련의 사건들에 대해선 언론에 비치는 대로 조금 알고 있었다고 할 수 있지요. 그러나 법 내용이나 정치 현실의 내막, 불의하고 악의적 조작사건 등은 전혀 모르고 관심도 없었고, 현실참여 사명감도 없었다고 말해야 맞겠지요. 한국 교회 대다수 사제 모두가 그러지 않았을까요.
 
황도근 주교님이 민청학련 사건과 관련, 김지하에게 준 자금 때문에 구속됐다고 들었지만요. 단순히 자금 문제 때문만이 아니지 않았나요? 지난 과정을 보면 어떤 사명감에서, 세상 안에서의 교회의 사명감에 의해 투항한 것으로 보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세요? 양심선언을 봐서도 그렇고요.
 
최기식 그럼요. 맞는 얘기지요. 거듭되는 얘기 같지만, 빛이 되기 위해 고통이 있는 현장, 십자가 길을 택한 것이지요. 당시 상황 잠시만 그려보자고요. 민청학련사건 바로 그 이전이요. 1971년 부정선거를 통해 박정희는 재집권하지요. 다음해 7·4 남북공동성명을 발표하며, 자주·평화·민족단결을 빙자해 강한 독재 장기집권을 획책해요. 1972년 10월 계엄령 선포하고, 국회해산 유신헌법 제정, 유신체제 정부가 되죠. 2차 군사혁명이라 할 수 있죠. 다음해 일부 종교인, 학생, 지성인이 반발하게 되죠. 그러니까 1973년 말엔 헌법 개정 청원운동에서부터 민주 청년운동이 시작되고 바로 전국민주청년학생연맹(민청학련)이 구성돼요. 교수, 언론인, 종교인 등 민주화 운동이 각계각층에서 거세게 일어나지요. 박정희는 유신반대세력을 근본부터 뿌리 뽑겠다고 1974년 1월 초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하게 되지요. 유신에 대한 반대도, 어떤 의견도 할 수 없게 국민의 입과 손발을 완전히 묶어버리는 내용이지요. 4월 초에 10여 개 대학과 3개 고등학교가 대대적으로 ‘민중 민족 민주선언문’을 낭독하고 행진을 하기로 했대요. 그때 긴급조치 4호를 발표하는데 데모를 주관하는 이들은 사형도 처할 수 있고 폐교도 불사한다는 거예요. 군과 경찰이 합동해서 학교들을 점령하고 학생 수백 명을 검거하고, 문인 교수 목사까지 검거해서 북한의 지령을 받은 반 국가단체로 규정하지요. 그러기 위해 여러 간첩 사건을 만들어내고 인혁당도 조작해서 민청학련 사건과 연결하는 거였지요. 그러면서 비상 군법회의를 통해 민청학련 사건 관련자 등 많은 이들에게 사형이 선고될 거라는 정보가 원주에 퍼져요. 이들을 살리는 일에 지 주교님이 개입하셔야 한다고 원주 분들이 전갈을 보냈다고 해요. 일본에서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주교님이 김지하에게 돈을 주었다는 이야기를 바로 언론에 흘렸다고, 그래서 들어오며 공항에서 연행될 수밖에 없었다고요. 이런 이야기는 나중에 들었어요. 연행되었다가 풀려나신 그다음 날 비상군법회의는 인혁당 재건위원회 7명에게 사형, 14명에게 무기 내지 20년 선고를 해요. 또 그다음 날, 13일은 민청학련 관련자 30여 명을 군법회의에서 사형 7명, 무기 7명 등 선고를 해요. 그래서 16일인가 지학순 주교님은 민청학련 관계자들이 북한 공산주의 하곤 아무 관련 없다는 주장을 내고요. 그래서도 안 되겠다 싶어서 군법회의 소환을 거부하고 양심선언을 내고 스스로 영어의 몸이 되었다고 생각했지요. (9개월 후 청련연합 대표 한 사람과, 인혁당 7명이 결국 사형집행 되었는데, 군사재판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던 김지하 유인태 이철 등 6명은 지 주교가 살렸다고 한 적도 있으니까요.)
 
 
 
인혁당과 그 가족들
황도근 인혁당 사람도 살릴 수 있었는데 하고 나중에 후회하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나요? 사제들 간에도 지 주교님도 그랬다고 얘기 했었다는데요.
 
최기식 사제들이 후회라기보다 너무 소극적이었다 하고 후회처럼 이야기를 나중에 나눈 적은 있지요. 북의 지령을 받는 간첩단 그러면 모든 이가 두려워했어요. 증거가 있어서 그럴 거라고 하며 인혁당만 하더라도 우리 사제들도 가족들 만나는 것을 두려워하고 피했지요. 언론에서 너무도 두렵게 보도하고 극장에서도 뉴스 시간에 지령 조직표까지 설명하며 보여 주니까 누구나 말하기조차 두려워하지요. 심지어 지 주교님 담당 변호사 임광규 씨도 처음 많은 정보를 알려주곤 했는데, 당분간은 그분들 언급을 안 했으면 하는 거예요. 김지하 어머니도, 김정남 씨도 그렇고요. 인혁당 가족들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신부들 모임에서 제안하면 지금은 절대로 안다고 해요. 나중에 처음부터 자신 있게 ‘조작이다’ 하고 나가지 못한 것을 무지였을까? 두려움이었을까? 하고 생각하며 나도 많이 후회했지요.
 
황도근 사제단이 점점 시간이 지나며 강해지고 인혁당 그들도 민주인사들이라 하고 함께 껴안은 것으로 아는데요. 그 얘기 좀 해주시지요.
 
최기식 내가 출판사 작은 방에 있을 때지요. 밖을 내다보면 맞은편에 추기경님 집무실과 사제관, 교구청 사무실이 보여요. 디귿 자로 돼 있는 3층 건물이지요. 어느 날 이 건물 추녀 밑에 부인들이 서 있는 것을 보는데, 하루만 아니라 계속해서 보는 거예요. 한복을 입은 부인도 있고 늘 4~5 명이 돼요. 그때는 인혁당 부인들이라는 것을 몰랐지요. 어느 날 그들 옆을 지나다가 물었지요. 누구냐고요. 왜 여기에 서 있냐고요. 추기경님을 만나려 하는데 만나주지 않는다는 겁니다. 아무도 만나주질 않아서 계속 기다린다고 하며 자기들 얘기 좀 나보고 들어달라는 거예요. 그 자리에 서서 잠깐 들었는데 은근히 겁이 나더라고요. 영화관에서 본 인혁당 바로 그 간첩단 부인들! 나중에 보기로 하고 헤어졌어요. 그리고 김지하 어머니, 김정남 씨를 만나 물어봤지요. 이들을 만나도 좋겠냐고요. 그랬더니 만나서 얘기를 들어보라고 그래요. 그러면서 김정남 씨가 잠깐 설명해 주는 것을 들어요. 1964년 굴욕적 한일수교 규탄사건(6.3사태)에 대응으로 만든 사건인데 1968년도에 이미 모두 끝난 사건이라고, 그런데 그것을 미끼로 해서 또 이번에 조작한 것이 인혁당 사건이다라고 들어요. 다른 민청학련 가족들도 그 가족 만나기를 꺼리고 있었는데 김지하 어머니는 조금 틀려요. 그래서 함께 만나기로 약속을 하지요. 계성여고 정문 앞 가톨릭 여학생 기숙사가(아피회 수녀들이 운영) 있는데 거기서 만나기로 약속을 하면서 전주교구 문정현 신부를 만나요. 함께 가서 얘기를 들어보자고요. 이미 그분들 얘기를 어디서 들은 듯 몹시 반가워하면서 가겠다고 했고, 또 같은 전주교구 지정환 신부하고 함께 와서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들어요. 가족들한테 직접 물어봤어요. 간첩단이란 또는 국가전복이란 증거가 뭐냐 하고 물었지요. 두 가지를 얘기해 줘요. 하나는 김일성 오차 경제개발 연설문인가 뭔가를 서로 베껴서 나누어 읽은 것. 또 하나는 라디오 채널이 이북방송을 듣게 돼 있었다는 것, 그게 전부라는 거지요. 그것도 꾸민 거라고 하면서요. 나는 가족들을 만나고 인혁당은 확실히 조작사건이라고 믿게 돼요. 그 후 신부들 모임에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진실이라 하더라도 그네들까지 우리가 변호는 할 수 없다는 거예요. 선언문이나 성명서에 인혁당 이야기를 담을 수 없다는 거지요. 그러면 직접 가족에게 미사 때 기도하는 시간을 배려해 주면 안 되겠냐 했더니 모두 좋다고 했어요. 명동에서 하는 전국 기도회였어요. 내가 미사 사회를 보면서 시간을 배정했죠. 이창복 부인 임인영 씨가 5분이 넘게 하느님께 호소하듯 하는데 너무 놀랐어요. 참석한 신부 수녀들, 모든 이들이 눈물을 쏟고, 너무도 감동적이었지요. <아무도 우리의 억울한 말을 들어주지 않는데 신부 목사님들이 들어 주셨습니다. … 남편들은 재판을 받으면서 왜 그 자리에 있는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비밀리 진행되는 군사재판 억울하게 고문 받고 죽어가고 있는데… 하느님 도와주세요. 하느님만이 진실을 아십니다.> 원주 기도회에 와서도 똑같이 했는데 신앙인들 신심까지 일깨우는 듯했지요. 그 뒤로부터 가족들이 신부 목사들과 친해졌지요. 신부들 사제관도 찾아가고 해요. 1975년 2월 중순에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등 많은 민주 인사들이 석방되는데도 그 후에 천주교 정의구현 사제들은 계속해서 인권 기도회를 계속해요. 인혁당 마지막 재판이 가까이 올 때쯤인데 2월 말이 될 거예요. 비로소 사제단이 구속자 가족협회와 함께 법무부 장관의 <인혁당 사건에 관한 담화문>에 대한 반박을 하면서 <진상조사>를 발표하게 돼요. 허위 고문 조작 사건임을 밝히며 정부에 공동 조사를 제안하지요. (가족들은 끊임없이 고문 사실들을 폭로하며 민청학련 관련 조작, 재판기록 유언장까지 조작한 것이라 계속 호소하고 있었지요.)
특별히 인천교구 메리놀 회 시노트 신부와 오글 목사 등 외국 분들이 사실을 국제적으로 알리고 가족들을 도우며 적극적으로 활동했어요. 출옥한 지학순 주교와 박형규 목사, 김지하 시인도 인혁당은 간첩단이 아니라 변호하고 운동이 한창 활발해진다고 생각될 땐데요. 그런데요.
 
황도근 그런데요. 사형집행이 갑자기 되는 거지요?
 
최기식 그 전날 저녁인가 명동성당에서 사제단이 주최하는 인권 기도회가 있었지요. 2시간 동안의 미사와 행사가 끝나고 퇴장을 하는데, 갑자기 통곡 소리가 나면서 성당 전체가 울려요. “주교님, 살려 주세요. 우리 남편들 좀 살려 주세요.” 그날 대법 선고가 ‘사형’이었음을 직접 듣고 거리에서, 경찰서에서 외치고 몸부림치다가 달려온 인혁당 가족들이었지요. 흰 옷차림에 성당 안 뒤편에서 추기경님을 가로막으며 무릎 꿇고 엎드려 엉엉 울며 그러지 않겠어요. 추기경님 뒤를 따라 나오다가 나도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처음엔 미사 때 인혁당에 대한 언급이 없어서 그러는 줄 알았지요. 우리는 그날이 대법 확정 선고일인 걸 몰랐던 거예요. 우리 신부들이 거의 강제로 부축해 일으켰지요. 추기경님도 신부들도 “괜찮아요. 괜찮아요, 걱정하지 마세요.” 하면서요. 정말 우리는 설마 사형집행이라고는 상상도 안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 날 아침 일찍 연락이 오는 거예요. 8명이 사형 집행 되었다고요. 벼락도,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어요. 세상에 이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재판도 하기 전에 집행명령이 이미 나 있었던 것 아닐까. 함세웅 신부가 있는 응암동 성당을 우선 빈소로 정하고 그리로 모이기로 했으니 나보고 가서 준비하라고 했지요. 성당에 가서 아무리 기다려도 누구 한 사람 오지 않아요. 오후가 다돼서 원주 단구동성당 골롬반 허 신부가 이마에 피를 흘리며 들어와요. 성당으로 오다가 모두 막히고 뺏겨 길에서 싸우고 있다는 거예요. 차바퀴 밑에 드러눕고 가지 못하게 열쇠를 뺏고, 시노트 신부는 교도소 앞에서, 문정현 신부, 허 신부가 그날 불광동 네거리서 싸운 이야기 너무도 유명해요. 어떤 사람은 가족하고도 관련 없이 화장터로 바로 가고, 대구로 바로 끌려가고 응암동 성당으로는 한 사람도 못 왔지요. 어쩌겠어요. 다음날 나는 알고 있는 우홍선 씨 집으로 찾아가서 3일을 함께하며 장지에 모실 때까지 한 가족이 돼 주고자 했지요. 불의의 폭력으로 인한 십자가의 죽음을 체험하는, 마음 아픈 시간이었다고 생각하지요.
 
황도근 민청학련과 관련해 모든 민주화 운동을 잠재우려고 사형집행을 한 거라고 보는데 과연 결과가 그렇게 됐나요?
 
최기식 이것이 불의한 폭력집단 군사 정권에 의해 조작된 사건인데, 그리고 그 집단의 잔악함까지 확실히 드러났는데 누가 용납하고 따르겠어요. 그 이후 이 불의한 군사 정권은 절대로 안 된다고 분노하며 민주화 운동이 더 강렬해지는 거지요. 신부들도 더 분노하며 그랬으니까요.
 
 
 
(다음호에 계속)
*본문사진자료 지학순 주교 탄생 100주년 기념 화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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