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80호] 기획특집 - 최기식 신부 사제서품 50주년_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6)-1
등록자 관리자 등록일자 202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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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최기식 신부 사제서품 50주년
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6)
글. 편집위원회
 
 
 
황도근 사형 집행은 지 주교님 출옥 전인가요?
 
최기식 아니지요. 1975년 2월에 주교님이 석방되시고, 4월 8일 인혁당 사형 집행이 있었으니까 출옥 두 달 후가 되겠네요.
 
황도근 인혁당 사람 8명 사형 집행은 박정희 정권의 가장 비열하고 잔인한 만행으로 기록될 것이라 하는데요. 그로 인해 민주화 운동이 위축을 받거나 한 것이 아니고 오히려 더 활발해졌다고 봐야 하겠지요?
 
최기식 그럼요. 사형 선고 전에 이미 집행 명령이 먼저 있었다고 생각하고, 조작 계획된 법조 살인 사건임을 드러냈다고 생각하는데 분노하지 않을 사람 있겠어요. 사제단도 거세게 진상을 밝히라며 비판하고 모두 저항했지요. 지 주교님도 그랬고요, 사제단 신부들도 그랬고 김지하는 그 일로 다시 투옥되기도 했어요. 외국인 신부 목사님이 추방되기도 하고요. 인권 민주화 운동이 내실화되었다고 생각했지요.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민주화 운동
김찬수 조금 다른 얘기가 될지 모르겠는데 지 주교님이 출감되기 이전에는 민주화 운동이 시국미사와 예배 밖에는 없었나 하는 생각도 드는데요. 민청학련 사건 전후 민주화 운동에 관한 이야기 좀 해주실 수 있나요?
 
최기식 지난번에 조금 이야기 나눈 거로 알고 있어요. 민청학련 구속 사건 전후를 알다 보면 1970년대 민주화 운동사를 읽게 될 거예요. 공부 좀 해 봐요. 의식화도 될 거예요.(웃음) 군사 장기 집권을 위한 유신헌법, 유신체제(72.12)의 시작과 더불어 대학가에서부터 반체제 민주 회복 운동이 일어나잖아요. 김 추기경을 비롯한 종교 교육 법조 언론인 대표들의 진정서, 범시민단체들의 헌법 개정을 위한 청원 운동 등 전 국민이 궐기 조짐이 보이니 긴급 조치를 발동하지요. (긴급 조치 1호) 유신헌법이나 체제에 대해 비판도 논의도 하지 못하게 입을 봉하고 발을 묶어놓는 거예요. 그래도 멈추지 않고 청년 학생들, 전국적으로 민주 청년 학생연합을 이루며 온 국민이 봉기하게 되니까 비상 체제로 군법회의를 통해 반체제운동을 뿌리째 뽑아버리려 한 것이 민청학련 구속사건 아닌가 해요. 사실이지요. 1,000여 명의 청년, 학생, 재야인사들이 구속되면서 순식간에 학생시위는 숨을 죽여요. 언론도 입을 봉하고 정국은 공포 긴장으로 얼어붙어요. 정말 살벌했다 싶어요. 북한을 닮아 오가작통법을 쓴다는 이야기도 나돌고요. 숨어있는 학생 대표들 신고하면 당시 수백만 원 포상, 알고도 신고를 안 하면 사형받을 수도 있다고 공고하기도 했으니까요. 천여 명이 넘게 끌려가 수사받고 250여 명이 넘게 비상 군법회의에 송치되고 그중 180여 명이 군법회의 재판에 기소돼요. 김대중 납치 사건, 최종길 교수의 의문사, 인혁당 조작 과정 등이 유신반대 운동 선상에서 발생 되는 필연적 조작이라고 보면 돼요. 중앙정보부의 간첩 조작, 법조 살인 집행에 대해 알게 되면 민주화 운동 수난사도 알게 된다고 해요. 투쟁이 어떠했나 이해할 수 있을 거예요. 우리도 나중에서야 완전히 깨닫게 되지만 긴급 조치 4호라는 것도 반 유신체제 운동인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 국민봉기를 북한지령. 국가전복 간첩 활동으로 조작 처단하기 위한 거예요. 지 주교님도 저항하는 범시민단체들과 함께하는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역이었다 싶어요. 정말 하느님 뜻이었다 여겨집니다.
 
김찬수 우리는 지 주교님이 단순히 김지하에게 학생 운동 자금을 대 주었다 해서 연행되시고 나중에 양심선언 때문에 구속되었다고만 알고 있는데요. 구속되시기 전에도 많은 활동을 해 오신 거지요?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어떤 활동들 말이에요.
 
최기식 그래요. 주교님은 그 이전에도 많은 목사님, 교수님, 사회 인사들을 만나고 모임을 한 것으로 알아요. 나도 주교님이 주교관에서 오라고 해서 몇 번 여러 명과 함께 이영희 교수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거든요. 1973년 10월 초부터 서울 문리대학에서 시작해 서울대학교 전체휴학, 이대 숙대 고대 연세대 전국 대학으로 반유신 시위 운동이 퍼져나가고, 고등학교까지 시위에 가담할 때요. 1973년 말에 재야, 종교, 법조인, 교수, 문인들이 헌법 개정 청원서를 내고 100만인 서명운동을 할 때도 김수환 추기경, 지학순 주교, 박형규 목사, 윤보선 전 대통령 등 많은 분이 함께했다고 해요. 1971년 원주 문화방송사건으로 부정부패 규탄 시위도 그렇고 많은 운동권 청년들이 원주에 모여든 것도 그렇고, 함께 국내 구제 시국 정세에 관한 공부 모임을 한 것도 그렇고, 어떤 면으로 봐도 지 주교가 무위당 선생과 반 군사독재 체제에 대한 운동에 깊이 간여했다고 봐야 하는 거지요.
 
김찬수 어떻게 되었든 간에 이전에 많은 활동을 하셨다 해도 양심선언으로 인해 지 주교님이 감옥에 가게 되면서 천주교 전국사제단이 생기게 되고 민주화 운동에 있어 원주가 1970년대 민주화 운동의 메카라고 불리게 되지 않았습니까. 신부님은 늘 주교님의 양심선언 발표를 가장 중요한 것으로 강조하신 것으로 아는데 그 양심선언 의미에 대해서 조금만 얘기해 주실 수 있나요.
 
최기식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나 <양심>이란 말은 많이 듣고 사용하는 익숙한 단어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양심선언>이란 말은 법적 용어 같고 엄중한 것처럼 생각되지요. 어릴 때부터 나도 진실을 강조하거나 고백할 땐 “양심!”하고 말한 적이 많았어요. 그런데 <양심선언>을 생각해 본 적은 없거든요. 지 주교님이 강연이나 강론을 하실 때 <옳은 것은 옳다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지요. 그래야 참 신앙인이 된다는 거예요. 양심을 따르라는 말 아닙니까. ‘옳고 그름의 판단에 있어서 마음 안에 강력한 그리고 진지한 마음의 소리가 있다. 그 소리를 거부하면 존재의 의미나 절대적 삶의 가치마저도 완전히 무너져 버릴 것’이라는 진지한 마음의 소리를, 양심이라는 것으로 배웠어요. 우리는 하느님이 우리 인간 안에 심어준 법, ‘영혼의 소리’라고도 하지요. 그래서 양심의 자유를 모든 법 위에 놓는 이유인 거예요. 미국에 어떤 유명한 사상가가 말했다 해요. 한 사람의 양심이라도 다수결의 원칙, 어떤 민주주의 헌법보다 중시돼야 한다고요. 습득하는 경험에 따라 혹은 사람 따라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정의, 진리, 사랑이 바탕이 되는 양심이라면 다를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봐요. 인간의 양심을 파괴하는 어떤 것도, 인간의 기본 권리나 품위를 짓밟는 어떤 법과 제도의 세력이라도 거부하라는 영혼의 소리, 절대적 가치를 따르는 내적 명령의 소리, 공동선을 선택하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라는, 영혼의 소리에 응답하고 따르기를 표현하는 것이 <양심선언>이라고 봐요. 이 선언은 말이나 글로만의 표현이 아니라 누구도 막을 수 없는 행동 의지로 전해지는 것이라 믿어요. 이는 많은 감동을 전할 뿐 아니라 개인과 단체, 사회를 움직이는 에너지를 전한다고 할까요. 죽음이 오더라도 응답하고 선택하는 행동 의지표현이지요. 지 주교님의 <양심선언>은 불의하고 부정한 정치적 법적 폭력을 대면해서 양심의 소리를 따른 것이라 봅니다.
 
김찬수 그런 양심선언이면 다른 사례들이 있을 것 같은데요. <양심선언> 그러지 않고 <맹세> 하며 하는 것도 있잖아요.
 
최기식 내가 <맹세>하고 말할 때는 나의 말이나 행동이 거짓이 아니고 진실임을 강조할 때 쓴 것 같은데, 조금 다른 것 같아요. 지 주교님의 <양심선언> 같은 것은 우리의 교회 역사 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고 봐요. 로만가톨릭이 교황 중심, 전제 군주체제로 윤리 신앙 교리뿐 아니라 교회 법정 국가사회 법정에서까지 권한을 행사할 때 있잖아요. 교황청의 칙령이나 교서를 반대 비방하거나 항의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을 때 주교 신부 학자들이 공적으로 반대하면 재판을 받고 사형까지 받을 때가 있지 않았습니까. 죽음을 마다하지 않고 양심의 판단을 따르면서 자기 입장을 분명하게 하면 <양심선언>을 하는 것이라고 봤어요. 안중근 의사도 역사 안에서 민족 양심 판단을 따르는 행동의 선언이라고 봐야겠지요.
 
김찬수 그렇군요. 하지만 그런 것 말고요. 주교님 <양심선언> 사건 뒤에 다른 사람들도 비슷하게 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김지하 <양심선언> 뭐 그런 거 말입니다.
 
최기식 많은 분이 <양심선언>을 사용했다고 보지요. 꼭 <양심선언>이라고 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많은 분이 지 주교님 <양심선언>이 유신체제를 부정하는데, 민주화 운동을 하는데 가장 강한 힘을 지닌 가장 좋은 수단이 되었다고 해요. 나는 사제단이 자발적으로 모여 기도를 개최하고 우리의 주장이나 시국선언 등을 발표할 때 그 자체도 <양심선언>이라고 여겼어요. 신앙고백이라고도 했고요. 불의한 시국에 저항하고 투신하는 의지와 입장 태도가 분명했으니까요. 9월부터 시국선언을 발표하며 거리 행진을 한 후부터 학생들도 문인, 언론인, 교수들이 다시 힘차게 일어났거든요. 민주회복국민회의가 구성되며 범국민적 <양심선언> 운동을 제창한 것도 그렇고요. 정치인도 교사들도 <양심선언>을 했고 특히 인혁당 진실 규명을 위한 김지하의 <양심선언>은 정말 큰 파장을 일으켰고 세계로 퍼져나가고 유명했었지요. 말하면 뭐해요. 안승길 신부도 나도 <양심선언>이란 걸로 진실과 입장을 알려주려고 했던 적도 있었는데요.
특별히 문익환 목사님이 기도회에서 내일에 있을 당신의 입장 선언을 한 적이 있는데 잊을 수가 없어요. 문안으로 작성돼서 발표되진 않았어도 내게는 그분의 선언이 가장 강하고 완벽한 자기 입장 선언으로 생각했으니까요.
 
김찬수 그게 언제인데요?
 
최기식 지 주교님이 갇히시고 난 후이지요. 9월인가 10월인가 모르겠는데 명동성당에선 월요일,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는 목요일, 매주 기도회를 하는 거였지요. 목사님들도 명동성당으로 오고 우리도 목요일엔 기독교회관으로 가고 그랬어요. 나는 녹음기를 들고 목요기도회에 계속 참석했지요. 어느 목요기도회에 문익환 목사님이 나타나서 소개를 받고 짧게 강연을 하셨어요. 내가 신학생일 때, 그분이 신학교 마당을 가로질러 선종완 신부 (가톨릭 초대 성서학 박사) 방으로 가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어요. 선종완 신부님과 함께 신·구교 성서 공동번역을 하신 분이어요. 한국신학대학 성서신학 교수이고 시편 전공한 시인이고 평생 학자로 계실 분이었지요. 그런데 그분이 “나는 이제까지 말씀을 책상에서 강단에서만 공부하고 가르치고 기도했다. <이제부터> 불의하고 부조리한 세상 현장에 나가 말씀을 증거 할 것이다.” 하는 내용을, 강한 억양으로 앞으로의 입장을 선언하신 것이 저리게 내 뇌리에 콱 박힌 거예요. 지 주교님처럼 하려는 것일까 생각했지요. 반신반의하면서요. 그런데 정말 그분은 그 시간부터 학생 청년들, 민중 한가운데서 인권운동. 민주화 운동, 민족 화해 통일운동에 오롯하고 치열하게 삶을 바친 분이 되셨어요. 3·1 명동사건 민주구국선언 주도자로 감옥에 갇히기 시작, 반공법으로 여섯 차례, 17년 중 11년간을 감옥에서 보내셨잖아요. 강연할 때 강렬하고 특이한 그분의 몸짓, 간절한 그 인상 모든 국민의 가슴에 새겨졌다고 생각해요. 성직자로 교수로 지성인으로서 통일· 해방 운동가로 한국에서 제일 크신 분이었다 하고 싶어요. 그래서 신부님들 목사님들 정치인 교수 최고 지성인들이 발표한 -입장 –주장 –구국 선언 등 모두가 민주화 길을 밝히는 <양심선언>이었다고 생각하지요.
 
김찬수 정의구현사제단은 그래서 시대적 국민의 양심 역할을 한 거라 말하는 거네요.
 
최기식 그렇게 믿어주면 고맙지요. 양심을 따르는 사람이라 믿겠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이 어디서 시국미사를 한다고 하면 정의와 진실에 목마른 사람도 눌리고 밟힌 억울한 사람들도 누구나 와요. 개신교 천주교 가리지 않고 함께 모여 와요. 학생들도, 노동자들, 농민들도 천주교 시국기도회로 몰려오게 돼요. 처음엔 인권회복 양심수 석방 시국기도회였다가 유신철폐 민주회복하고 강성을 띄니까 청년 학생들이 시국미사라고 하면 빛을 향해 오듯 모여와요. 주로 청년 학생이었지만 농민들, 노동 청년들까지 함께하게 돼요. 명동성당에서,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주중에 한번은 지역 교구에서, 수녀님들 젊은 사제들 목사님들까지 한마음 한뜻 되어 자신도 모르게 투사가 돼 가는 거예요. ‘신부 수녀는 가족이 없어 감옥에 가도 되지 않느냐, 죽어도 걱정이 없어’ 하는 말을 들어도 싫지가 않았으니까요. 마치 투사가 된 듯, 민중의 열정이 식을까 봐 걱정이 들 때도 있었죠. 그래서 주교님이 좀 더 오래 감옥에 계셨으면 하고 이야기들을 많이 했어요. 그래야 교회 사회참여 운동도 더 확실히 될 것이라 여겼으니까요. 실제로 많은 이들이 그렇게 생각했고요. 주교님은 당신 스스로 갇히면서 민중을 교육하고 정의와 진리를 위해 몸 바칠 많은 이들을 일으키는 거라고 믿었어요. 민주 청년 학생들에게는 물론 양심인들과 모든 국민에게 희망과 용기를 준다는 것을 믿기 때문이지요. 확실한 사실이지요.
 
김찬수 결국 반체제운동을 민청학련 구속으로 뿌리째 제거해 보려 했지만 지 주교님까지 구속되면서 사제단의 활동으로 다시 인권운동, 반유신 민주화 운동이 가열됐다고 보는데요. 주교님이 감옥에 계시는 동안 사제단과 어떤 단체들이 드러나게 함께 활동했는지 궁금한데요.
 
최기식 1974년 5월부터 9월까지는 청년, 학생, 민주인사들 모두 구속되며 반유신 체제운동 민주화 운동은 완전히 힘을 잃고 숨을 고르던 때가 아니었나 싶어요. 기독교 인권위원회나 협회에서, 산업선교회 등에서는 꾸준히 청원서 건의문 등을 내고 집회를 하기는 했어요. 잘 알려지지는 않았어도요. 그러나 지 주교님이 구속되고 천주교 사제들이 나서죠. 9월 말, 10월이 되면서 정의구현사제단 이름으로 시국선언과 성명서를 내고 제의를 입은 채 거리시위를 시작하지요. 그제야 많은 단체와 시민들이 함께 호흡하는 것을 느껴요. 명동에서 처음 거리시위를 할 때 사람들이 박수하는 것을 보며 더욱 그런 생각을 했어요. 청년 학생들이 항상 먼저 앞장이었지요. 10월이 되면서 전국으로 다시 연대하며 궐기하기 시작했어요. 종교인, 교수, 언론인, 정치인 연합으로 민주회복국민회의가 발족 되고, 기자들이(동아일보, 조선일보) 투쟁에 나서고 농민, 노동자, 천주교 평신도 단체 등 폭넓게 투쟁에 나서는 분위기가 되었지요. 모두 마음의 무장이 되었다고 할까, 특히 천주교 사제단 시국기도회가 전국 각 교구 동시다발로 열리고 밤샘 기도회도 세미나도 하며 열을 올렸어요. 나부터도 체질에 맞지 않는다고 말하면서도 목이 터지도록 구호를 외치고 최루탄 가스에 눈물 콧물 같은 것 아무렇지도 않게 느꼈으니까요.
 
김찬수 말하자면 반유신 민주화 국민운동이 그렇게 한창 열이 붙고 있을 때 주교님은 석방되시지요. 1975년 2월 17일요. 저항하는 시국 분위기를 좀 가라앉히기 위해 유화정책을 쓰는 것이었을까요? 신부님들은 승리한 기분이었을 것 같은데요.
 
최기식 박정희는 긴급조치 4호를 해제하고 민청학련 관련 주요 인물들을 석방하며 영구집권을 위한 국민투표를 계획했으니 당연하지요. 그러면서 국내·외로 나빠지는 시국 사정을 인혁당 용공세력 탓으로 매듭 하려 한 것으로 본 거니까요. 천주교 측으로 보면 유화정책에 말려들었다 해도 모두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을 거예요. 주교님이 나오면서 나부터도 힘이 빠진 건 사실이니까요. 석방 후 한국천주교 주교회의는 정의구현사제단을 인정이라도 하듯 격려하며, 천주교 공식기구인 <정의평화위원회>를 사회참여 활동기구로 선언하기도 했어요. 전국평신도협의회 단체도 정의구현사제단도 이를 환영했지요. 한편 이틀 먼저 집행정지로 풀려난 김지하, 김동걸, 박형규, 백완기 등 많은 분이 바로 모여서 감옥에 가더라도 민주화 인권회복을 위해 투쟁을 계속할 것을 다짐해요. 민청학련 사건은 조작이라고 선언하면서요. 정의구현사제단은 이틀 동안 세미나를 겸한 기도회를 하면서 지난 활동에 평가도 하고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정비하고 다짐을 하지요. 언론, 종교, 노동, 학원 등 모든 분야에 동참, 인권 자유, 민주화 운동을 계속할 것을 다짐해요. 구속자 가족협회, 후원회 회장인 시노트 신부와 사제단이 함께 인혁당 진상조사 발표를 하면서 시노트 신부님은 오글 목사에 이어 추방 명령을 받고 떠나지요, 사건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운동은 계속되는데 김지하 시인이 다시 구속되고 김상진 열사(학생) 할복 사건, 인혁당 사형 집행 등 인권 민주화 운동은 계속 가열될 수밖에 없었지요. 나는 그러나 서울에 더 있을 수 없어 원주로 15개월 만에 내려오지요.
 
김찬수 주교님이 10개월 만에 원주에 들어오실 때, 사진을 봐도 그런데 대단했다지요? 신부님 얼굴은 사진에도 보이질 않는데 그때 안 계셨나요?
 
최기식 나는 언제나 전례와 행사 준비를 하는 것을 몫이라 여겼지요. 환영 미사 준비 관계로 원동성당 안에 있었지요. 너무 피곤하고 힘들 때였어요. 17일은 주교님이 출감되시는 날인데 그것도 모르고 나는 전주에 있었잖아요. 정의구현사제단이 주최하는 시국기도회가 전주 중앙성당에서 있었지요. 바로 다음 날 18일 저녁엔 명동성당에서 지 주교님 석방 환영 미사가 있었고요. 그리고 19일이 원주 귀환하시는 날이어요. 원주역에서 원동성당까지 행진하는 것을 보고 전쟁터에서 돌아오는 개선장군 같다며 그 장면은 교회 역사 안에서도 영원히 기억될 거라 했지요. 정말 장관이었다고 봐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입성하심에 비유하며 말하기도 했어요. 겉옷을 벗어 깔고 ‘지학순 주교 만세’ 소리 드높고 ‘정의와 진리는 기필코 승리한다.’ 하는 플래카드 펼쳐 들고 행진하는 모습. 성당으로 들어오는 것, 내가 봐도 정말 장관이었어요. 성당 마당에 도착하며 주교님은 바로 성당으로 들어가 무릎 꿇고 기도하셨어요. 그때 뒤에서 모두 감동으로 기도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지요. 그러고 나서 마당에서 미사를 봉헌했고요.
 
김찬수 정말 교회 안에만 머물던 진리의 빛이 세상 밖으로 나가는, 세상과 소통하는 것을 실감했겠어요. 특히 사제들에게, 정의구현 사제들에게 그렇지 않았을까 하는데요.
 
최기식 당연하지요. 주교님을 통해 우리는 폭력과 억압 속에 신음하는 사람들, 불의한 세상에서 밟히고 눌린 이들에게 희망이 되고 벗이 되는 것을 확인했다고 봐요. 어둠을 밝히는 <빛이 되라>는 소명에 응답한다고 생각도 했고요. 정의구현사제단 처음 간행물 소식지 제목을 그래서 「암흑 속의 횃불」이라 했어요.
 
김찬수 그때는 원주에 성당이 네 개밖에 없던 거로 기억하는데 단구동에 외국 신부님이 계셨지요. 그분도 그렇지만 다른 외국 신부님들 활동도 대단했었나 봐요.
 
최기식 우리 교구에 외국 신부님이 그 당시 10여 명이 넘게 있지 않았나 싶어요. 원주· 춘천·광주교구에 골롬반 수도회, 인천·청주교구에 메리놀 수도회, 서울·전주교구에 파리외방 선교수도회 등 외국 신부님들이 선교를 많이 했어요. 많은 신부님 중에 인천교구에 시노트 신부, 전주교구에 지정환 신부, 원주 단구동 허 신부 세 분은 우리하고 함께 고생하고 아픔을 함께 나눈 분들이라 기억이 생생해요. 특히 개신교 오글(오명걸) 목사와 시노트 신부는 민청학련과 관련, 인혁당이 조작된 사실임을 알리며 국내·외로 활동하다가 강제추방 당한 사실은 너무도 유명하고, 역사에 길이 남을 일이었지요. 대한민국 민주화를 위해 십자가를 지고 희생제물이 되기를 자처하신 분들이지요.
 
황도근 주교님이 나오시기 전 신부님들이 민주회복국민회의라고 정치인을 비롯해 종교, 문인, 교수 함께 결성된 것이 있는데 신부님은 관련이 없으셨나요.
 
최기식 그때 나는 잘 모르고 있었어요. 전국으로 정신없이 뛰어다닐 때였어요. 종교인들 특히 사제단의 활동이 강해지니까 정치인을 비롯해 각 분야 민주화 운동 세력이 천주교 쪽으로 규합되나보다 했어요. 원로 사제인 윤형중 신부가 대표가 되고 함세웅 신부가 총무라고 하니까 더욱 그렇게 생각했죠. 정치성을 띤 운동처럼 생각도 했고요. 다만 뒤에서 마음으로 지지하고 기원한 것뿐이지요.
 
황도근 언론인들, 특히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와도 함께했다지요.
 
최기식 언론인들이 우리와 한패가 돼요. 기도회로 모여와요. 자기들 성명서도 들고 제의를 입는 방에까지 들어와 의논해요. 미사 중에 발표하자고요. 그것을 보면서 신기하게 생각하며 기쁨을 느껴요. 자유 언론 민주회복을 외치며 쫓겨난 130여 명의 동아투위 사람들과 동지가 된다는 것이 너무도 마음 뿌듯하고 신바람 나는 거예요. 빈 광고란을 메우면서 자유언론실천선언을 지지하고 언론탄압을 함께 규탄하고 반 유신독재 투쟁한다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이었나 몰라요. 억울하고 고통받는 민중과 하나가 된다는 느낌 축복이라 생각했어요.
 
 
주교님 출감 이후
황도근 주교님이 나오신 후 최 신부님은 원주로 내려와 더는 반독재 민주화 운동은 안 하셨지요? 서울에도 안 가시고요? 유학도 포기하시고요.
 
최기식 주교님 출감 후에도 계속 전국 시국미사에는 참석했어요. 김지하가 다시 구속되고 인혁당 7명 청년대표 1명이 사형 집행되었는데 어떻게 안 해요. 군사 정권은 절대로 안 된다. 이 군사 정권이 끝날 때까지 계속한다고 생각했어요. 사제단이 주최하는 전국기도회나 세미나도 참여하고 공동체 묵상 연수 등 공부도 했어요. 6월부터 원동성당 보좌로 6개월 동안도 그런대로 힘들지 않게 지나지요. 1976년 1월에 충북 단양으로 가면서도 뒤로 물러나고 깊이 간여하지 않으려 했던 것 사실이었어요. 아주 소극적인 사람이 되었지요.
 
황도근 1976년 3·1사건, 신부 목사 교수들 10여 명이 구속될 때 (신현봉, 문정현, 함세웅 신부, 문익환, 윤반응, 이해동 목사, 안병무, 서남동, 문동환, 이문영교수, 김대중, 윤보선) 민주구국선언보다 먼저 원주에서 발표한 <원주선언>이란 것이 있었다는데 그것에 대해 아시는 것 있으신지요?
 
최기식 3·1 사건 일주일 전 원주에서 신·구교 합동 기도회가 있었다고 해요. 합동 기도회는 원주 제일감리교회에서도, 원동성당에서도 있었는데 내가 2월 23일 원주에서 합동미사(예배)에 참여했는지도 지금 기억이 안 나요. 신현봉 신부 강론한 것을 기억하는 걸 보면 참석한 것 같고요. 분명한 것은 <원주선언> 이라는 이름은 나중에 만든 이름 아닐까 해요. 전혀 듣지 못하던 것이거든요.
 
황도근 명동 3·1 구국 선언의 모체가 <원주선언>이라고 하는 것 같은데 사실 아닌가요?
 
최기식 이 사실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신현봉 신부님과 함세웅 신부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도 않더라고요. 3·1절 민주구국선언도 신부들은 서명도 하지 않은 거로 알아요. 미사는 사제단에서 (함세웅 신부) 준비했지만, 명동에서 개신교 측 (문익환 목사)의 청을 받아서 미사를 함께한 것이 된 거지요. 문 목사가 준비한 선언문을 발표하게 된 거예요. 김승훈 신부가 미사 주례와 강론은 하고 미사 후 문익환 목사가 예배처럼 기도와 설교하고, 그다음에 이우정 교수가 민주구국선언문을 읽었다는 것까지는 확실히 알지요. 그러니까 김대중 쪽에서도 준비하던 문건을 문익환 목사가 다시 작성한 것을 3·1 민주구국선언문이라 하는데 이 초안을 그 전주 원주로 가져와서 미사 후 교육원에서 이야기 나누고 서명을 받고 한 것이라 <원주선언>이라 하지 않았는가 하는 거지요. 3·1 구국선언문은 문익환 목사가 주도하지만 이건 나 개인 추정인데 신 신부 강론도 선언문도 김정남 도움이 있을 거라 생각이 돼요. 많은 분들을 그렇게 도왔고 제대로 설명할 사람이 그분밖에 없었다고 보니까요.
 
황도근 최 신부님도 3·1절 명동 미사에 가셨나요?
 
최기식 그럼요. 연락받고 참여만 한 것 같아요. 그때는 단양에서 사목에 집중한다고 할 때니까 관심 없이 마지못해 간 것 아닐까 생각돼요. 그런데도 명동 기도회 사건으로 30여 명이 연행되어 조서를 받았다는데 나도 그중 한 명이 되었지요. 단양경찰서 정보과 두 사람이 와서 서울을 잠시 함께 갔다 와야 하겠다는 거예요. 첫 번째 연행이었지요. 왜 나를 데려가야 하는지 정보원도 나도 모르면서 기차로 서울까지 가요. 경찰서로 가는 줄 알았는데 조서 받는 책상에는 000검사라고 놓여 있었지요. 심문을 받는데 뭘 알아야 답을 하지요. 기도회에 대해서도, 선언문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만 질문하더라고요. 모릅니다. 아닙니다. 두 시간 하니까 나가라고 하데요. 집에 내려와서야 신현봉 신부님이 며칠 먼저 갔는데도 나오지 않고 있는 것을 알았어요. 구속되신 거지요. 사실 선언문발표 때문이라면 신부들이 구속될 일이 아닌데 긴급 조치 9호 발표 후 반유신체제세력을 완전 무력화 뿌리 뽑으려 했던 거지요.
 
김찬수 결국 이 사건 때문에 신부님은 단양에서 다시 원주로 이동되신 거지요. 인권운동 민주화 운동 담당하라고요. 언제 원주로 돌아오셔요?
 
(1976년 단양 본당에서)
 
최기식 4개월 만에 이동하게 되지요. 부활주일을 지나며 바로 원동성당 이영섭 신부님과 맞교대를 하게 되지요. 단양 교우들과 관계는 한참 정드는 사람 강제로 떼어 놓은 것 같이 참 마음 아팠어요. 그 후 원동성당에서 4년 동안은 정말 가장 힘들지만 가장 보람된 기간이었다고 생각하고요. 선배 신부들이 감옥에 있으니 후진 신부들이 안 할 수 없지요. 감옥에 있는 것이 오히려 더 편하다고 말하고 느끼면서요. 인권·민주화 운동, 가톨릭 노동청년 운동, 농민회 운동, 원주에 성서연구모임, 성령 기도회 도입 등 하는 일도 참 많았다 싶어요.
 
김찬수 최 신부님이 북평 성당에서 연행되어 3일간 구금되셨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때가 언제죠?
 
최기식 그게 아마 신 신부님이 감옥에 있을 때, 1977년 4월경일 거라 생각돼요. 4월 18일이 맞아요. 명동성당에서 4·19 기념미사를 정의평화위원회 정의구현사제단이 함께 주최한 시국기도회였지요. 윤 주교님이 강론도 하고 김 추기경님도 계셨고 주교 신부들이 아주 많이 모인 기도회였지요. 김상진 군의 양심선언, 함 신부의 상고이유서도 낭독하고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선언문도 발표하고 성직 수도자들이 밤샘 기도를 한 거예요. 가장 큰 미사였지요. 그 미사 후 다음 날 안승길 신부와 나는 춘천에 가서 강의를 하기로 했었지요. 춘천에서 기도회를 마치고 원주로 오는 도중 횡성 터미널에서 주교님 차 운전을 하는 최 씨를 만나요. 그분이 서울에서 연행하라고 명령이 왔다고 하며 조금 피해 있다가 오면 한다는 거예요. 정보과에서 연락이 왔다고요. 어떻게 해요. 그 양반을 보내고 우리 둘이 횡성 본당 신부에게 갔어요. 횡성 본당엔 그때 외국 신부님이 계셨는데 거기 들어가서 우리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의논했지요.
택시를 타고 횡계까지 가고 횡계부터 버스 타고 강릉을 갔고, 강릉에서 버스를 타고 북평으로 간 거예요. 북평 성당 이대식 신부한테요. 왜 우리를 잡아가려고 할까? 그러니까 안 신부 얘기가 성명서를 쓴 것 때문일 거야 그러더라고요. 아! 그럼 너를 잡으려고 하는구나. 그런 거지요. 그러니까 틀림없이 성명서 때문에 홀딩을 한다고 나를 잡을 이유는 없고 안 신부가 걸려서 그러나보다 속으로 생각을 했어요. 그날 자면서 <양심선언>을 어떻게 쓰면 될까? 또 지 주교님한테 편지도 써야지 생각했죠. 추기경님한테도 쓸까? 그랬어요. 안 신부가 글을 잘 써요. 금방 다 썼대요. 몇 장을 썼는지도 몰라요. 같이 읽어보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되겠다. 안 신부가 만반의 준비를 다 한 거죠. 그렇게 그곳에서 지내는데,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그곳 사도 회장이 경찰서에 가서 얘기했다는 거예요. 그런데 그 얘기를 우리 담당 형사가 삼척경찰서에 있다가 들었다는 거지요. 그냥 넘겼어요. 그다음 날 우리는 낮에 맛있는 것도 먹고 그랬는데 저녁이 되니까 원주경찰서장, 삼척경찰서장 둘이서 들어온 거예요. 이 신부님이 방에 들어오더니 나한테 ‘야 서장들이 왔다.’ 하면서 얘기를 해줬어요. 그리고 밖에서 이 신부님이 뭐라 그러냐면 ‘여기 없다. 안 왔다.’ ‘아 여기 있는 것 알고 있다. 어제 아침부터 우리가 알고 있다. 그래서 여기 경찰들도 이렇게 다 지키고 있었는데 무슨 말씀이냐. 이 방에 있는 것 안다.’ 이야기하는 것이 모두 들리는 거예요. 그때 한 9시쯤 됐을 거예요. ‘그만 나가자. 애태우는 것도 좀 그렇고. 이 신부님이 얼마나 힘들겠어. 그 조용한 사람이.’ 그렇게 나와서 ‘갑시다. 우리 데리러 왔으니까.’ 그래서 그 사람들이 준비한 차를 타고 가면서 둘 다 서울로 가는 줄 알았어요. 가면서 뭐 이런 얘기 저런 얘기, 사건에 관한 얘기도 하고 그랬죠. 그런데 원주 톨게이트로 들어가요. ‘거길 왜 가냐? 원주로 가는 거냐?’ 그랬더니 아니라고 그래요. 서울로 가는 거라고. 그래서 ‘왜 가냐?’ 했더니 잠깐 들릴 곳이 있다고 그러더니 톨게이트 밖에서 안 신부를 내리라는 거예요. 안 신부도 내리면서 어안이 벙벙한 거지요. 그렇다고 ‘내가 아니고 이 사람이에요.’하고 말할 수도 없잖아요. 그래서 가만히 있었는데 서울에서는 최 신부만 데려오라 했다고 해요.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원주에서는 내가 연락책이고 대표로 보였으니까 그랬나 생각했겠지요.
그때는 선언문 때문인지 무엇 때문인지도 모르고 서울 올라가서 이틀 밤 인가를 안기부에서 심문을 받았지요. 그리고 진짜 고문 아닌 고문을 당한 거예요. 나는 이걸 누가 썼고, 의논을 했는지 참석조차 안 했으니 모르잖아요. 안 신부한테 들었으니까 안 신부가 책임을 지기로 한 것은 알지만 다른 사실은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렇다고 안 신부가 했을 거라고도 할 수 없잖아요. 하루가 지나고 심문 요원이 오더니 오태순 신부가 와있다고 해요. 그가 그러는데 당신이 했다고 하는데 하며 마구 다그쳐요. 그래도 난 아니라고 그랬지요. 오태순 신부를 데리고 오라고 함께 이야기하자고 그랬어요. 그 신부가 그렇게 이야기할 것이라곤 절대로 생각을 안 했으니까요. 그러면 지난번 선언(3·1절 기도회)도 아니냐고 묻길래, 그거는 내가 했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그다음 4·18 것도 내가 했다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그건 전혀 모른다고 잡아떼니까 문을 닫았다 열었다 해요. 그러더니 어떤 놈이 문을 갑자기 팍 열고 느닷없이 ‘야 이 새끼야, 네가 신부야?’ 소리를 질러요. 그러고 콱 닫고 나가고 그러더라고요. 이것이 시작인가 보다. 고문을 할 것 같다. 이런 생각을 잠시 했었어요. 그다음부터는 3·1절 기도회에 선언문 작성 과정 기도회 준비과정을 서술하라고 해서 하루 동안 종일 그것만 번복하다가 나오게 된 거죠. 풀려 나오는 날, 정보부 객실에 주교회의 사무총장 이종흥 신부가 앉아 있더라고요. 그분이 보이길래 ‘어떻게 오셨어요?’ 깍듯이 인사를 했지요. 우리보다 대선배니까요. 지 주교님하고 연배가 비슷해요. 사제단 활동을 반대하는 사람이었지요. 데려가라고 하면서 충고도 좀 해주라고 불렀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우릴 보고 ‘다시는 여기서 만나지 맙시다.’ 그러던 안기부 최규희 국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신자였지요. 나중에 참 좋은 분이라 생각했지요. 이후에 강원도 정보부지부장으로 우리를 도우려고도 했고요.
 
 
김찬수 서울에 있을 때부터 인혁당 유가족과 친하게 지내셨다고 하셨는데 그분들이 원주에 가끔 오신 거로 알아요. 신현봉 신부님도 만나고요. 재미나는 이야기 있었다고 하셨는데요?
 
(석방 직후의 신현봉 신부님)
 
최기식 신현봉 신부님이 석방되고, 한참 뒤의 이야기 같아요. 4월 인혁당 3주기 기일을 지나고 유가족 부인들 셋이 바람 쐬러 온 적이 있어요. 1988년 4월 중순이다 싶고요. 4·19를 기해서 명동 시국기도회가 있는 날이었나 봐요. 수안보온천을 모시고 가서 하룻밤을 푹 쉬었지요. 주교님이 타던 지프차를 내가 받아서 쓰고 있었는데, 그 차로 수안보에서 다시 원동성당으로 돌아오는 길이었어요. 도중에 귀래라는 곳에 동네 파출소가 있는데 그 앞에서 차를 잡더라고요. 나를 내리라고 하더니 다른 차를 타래요. 그래서 ‘왜 그러냐?’ 그랬더니 ‘저희가 최 신부님 지금 모시고 가야 합니다.’고 그래요. 인혁당 부인들이 왜 그러냐고 소리 지르고 난리를 쳤어요. 강제로 태우려 하니까 화를 내고 싸우는 거예요. 기관원들과 싸우는 데는 이력이 났을 때라 안가겠다고 발버둥 치며 앞 의자를 발로 차며 소리쳤지요. 강제로 죄수 압송하는 것처럼 그렇게 실려 갔어요. 또 서울로 가는 줄 알았지요. 근데 서울 쪽이 아니고 원주 시내 쪽 같아서 원동성당으로 가나 했지요. 그랬는데 원주 성당이 아니라 강릉으로 달리더라고요. 또 연행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했지요. 그날 명동성당에서 크게 기도회 하는 날인데 기도회에 못 가게 막느라 그런 거예요. 원주까지만 와도 되는데 왜 강릉까지인지 알 수 없는 일이잖아요. 그들이야 명령대로 하는 사람들이니까 하고 생각했지요. 그래서 날 태워서 강릉으로 가더니 어떤 여관인지 식당인지 작은 방에 가둬놓고 경찰들이 밖에서 지키는 거예요. 그래서 그 사람들한테 욕해봐야 소용도 없고 방 아랫목에서 이불 펴놓고 저녁도 안 먹고 누었지요. 저녁 주겠다는 걸 싫다 하고 누워있었어요. 한 9시 즈음 되니까 떠들썩한 게 신현봉 신부님이 경찰들하고 같이 나 있는 방으로 “사이상 여기 있나?” 하고 들어오시는 거예요.
 
김찬수 그분은 어디 계시다가 오신 거예요?
 
최기식 모르지요. 나처럼 기도회 못 가게 잡혀있다가 함께 오셨겠죠. 난 식사고 뭐고 필요 없다고 빨리 보내주라고 화풀이만 계속했지요. 나갈 때까지 아무것도 안 먹을 것이니 가게 하라고. 신현봉 신부님이 ‘야! 그래도 저녁은 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는 거예요. ‘난 안 먹을래요.’ 나도 배고파 죽겠는데 한번 심통을 부렸으니 어떻게 해요. 계속해야지요. 그런데 이 양반들이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술상을 차리는 거예요. 여관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요. 신 신부님은 ‘자네들이 뭐 죄 있겠나 하라니까 그러는 게지’ 하며 오히려 위로하듯 하시며 함께 술잔도 나누고 식사를 하셔요. 감옥에서 오래 수련을 하신 터라 다른가 보다 하고 생각했지요. 10시 30분쯤 되니까 이제 가자고 그래요. 기도가 10시 30분이면 거의 끝나요. 명동에서 기도 끝날 때까지 이 사람들 임무는 지방에서 신부들을 못 올라가게 하는 거잖아요. 11시 거의 되니까 ‘갑시다.’ 그리고 원주에 와서 원동성당까지 데려다줘요. 밤샘 기도를 할 때도 있으니까 그랬나 싶기도 했어요. 인혁당 부인들은 원주에서 버스를 태워 서울로 보냈다고 들었지요. 전국에서 정의구현 사제들은 계속 그렇게 기관원들과 멀고 가까운 친구들이 되기도 했지요. 정보를 주고받으며 친할 때도 있지만요.
 
김찬수 그랬었군요. 지금 말씀하신 게 1977년도 이야기지요? 1978년에 동일방직 사건에 대해서도 알고 계시나요. 혹시 조금이라도 관여하셨나요? 원주에서도 노동 운동을 대단하게 했다고 하던데요.
 
최기식 내가 원주에서 J.O.C(가톨릭 노동청년회) 지도신부를 맡고 있었지요. 1970~80년대 소위 동일방직 똥물 사건은 전국으로 아주 빨리 퍼져나간 세계적 사건이지요. 1970년대에는 노동근로자 환경이 최악이었다 해요. 노동자들이 기계 취급을 받으며 인권은 물론 생계 위협까지 받고 있을 때여요. 자기들이 찾아야 하는 권리 권익에 대해서도 무지하고 전혀 몰라요. 전태일 열사의 분신 사건 경우처럼 조금만 노동법을 알고 깨달으면 분노하고 권리를 찾는 운동을 하는 거예요. 개신교에 산업선교회, 가톨릭에 노동청년회(J.O.C)는 신앙 운동도 되지만 노동자들이 스스로 권리를 찾는 운동을 돕는 단체지요. 기도하고 투신하고 실천하고 하면서 노동자들에게 노동조합 운동을 돕고 가르쳐요. 그러니까 노동조합법도 가르치고 조합을 만드는 과정까지도 함께 하며 도와줘요. 1970년대 후반은 농민 노동 운동의 절정의 시기였다고 해요. <동일방직 똥물 사건>이라고 했지요? 그때 동일방직 노조 지부장이 여성분인데, 민주노조를 하는 것은 거의 여성 노동자들이 주류를 이루었어요. 회의하는 장소에 어용노조 남자 직원들이 들어가 여성 노조원들에게 무차별 똥물을 머리에 뿌리고 가슴에 쑤셔 넣고 한 사건인데, 싸우고 싸우다가 모두 해고되고 감옥에 가고 했어요. 연합 섬유노조 탄압 대표적 사건이라고 해요. 그 사건 나고 한두 달 후엔가 원주에서 한진콜크 노조결성 과정에 강제해고 사건이 나지요. 그때 내가 J.O.C 지도신부였고 장덕기 씨가 회장이었어요. 모임이 두 팀이 있었으나 한 팀처럼 함께 했지요. 교구 역사상 가장 가톨릭 노동 청년 운동이 활발하고 화려했었다 하고 말할 수 있지요. J.O.C 회원들은 노동법을 메모한 수첩을 만들어 노동자들이 깨우치고 노동조합을 이룰 수 있게 돕는 거지요.. (이런 것을 나누어주고 의식화를 시키는 거예요. 노동자들에 대한 횡포가 많으니까요. 그리고 그 노동자들 중에 전태일 같은 경우가 나타나고 그러잖아요. 그럴 때 노동자들의 권익을 보호한다는 것보다도 그 사람들이 단체가 되기 위해 조합을 만들고 되는 그런 것을 우리 가톨릭 외국 신부님들이 특별히 운동을 했던 게 J.O.C에요. 가톨릭노동청년회죠. 그런 운동을 하고 있을 때 그 사람들이 동일방직하고 깊이 관련을 가져요. 사실 동일방직뿐 아니라 많은 회사들이 그때 관련 있었죠.) 원주 한진 콜크 사건인데요. J.O.C 회원으로부터 연락이 오는 거예요. 회사에 조합원들이 매 맞고 강제로 쫓겨났다고 말이에요. 나는 그때만 하더라도 그런 일이 닥치면 너무 힘들고 머리가 아픈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 할 거냐?’ 그랬더니 자기들 좀 살려 달래요. ‘어떻게 살려 달라는 거냐?’ 우리가 나오면 어디 가서 천막이라도 쳐야 하는데 그럴 길이 없다고 겁니다. 나는 바쁘다며 전화로 해결하려 했지요. 교육원 마당 한가운데 강의실이 따로 있으니까 우선 거기로 가 있으라고 그랬죠. 장소는 최고지요. 그곳에 말해놨으니 우선 거기 가서 있으라고 해 놓고 이틀을 못 올라갔어요. 그랬더니 전화가 오고 직접 회원이 와요. 급하니 빨리 좀 와달라고요. 한 걸음으로 달려갔죠. 농성하며 3일 동안 한 끼도 안 빼고 먹는다는 게 라면만이라서 그렇다는 거예요. 남녀 노동자 청년들이 60명 정도가 있었는데 다들 굶고 지쳐 누워있어요. 죽어가는 패잔병 같았어요. 한 명은 벌써 기독병원 응급실에 갔다고 하고, 세 명은 눈이 돌아가고 입에 거품을 물고 있어 울고 신음하고 야단법석이어요. 그 지경인 것도 모르고 그냥 왔다 싶더라고요. 그래서 원동성당 열심인 신자가 하는 의원에 믿고 전화를 했지요. 그랬더니 ‘나는 갈 수 없다. 큰 병원 응급실로 데리고 가라.’ 그래요. 그래서 ‘아니 급해서 그런다. 와서 주사만 주면 될 것 같은데.’ 해도 안 와요. 누구든 꺼리고 겁이 날 일이지요. 결국에 신자라고 하지만 성당에 나오지도 않는 김내과(김학규)라고 있었어요. 몇 군데 더 생각하다가 결국에 그 분한데 연락하며 사정했는데 ‘네 알았습니다.’ 두말 안 하고 달려와요. 즉시 달려와 주사를 놓고 하니까 바로 모두 피어나더라고요. 또 한 명은 너무 위급한 거 같아 병원으로 보내요. 그대로 두면 안되겠다 싶어서 성당 임원들, 부인들에게 말하고 나흘 만인가 성당으로 옮겼지요. 원동성당에 교리실 두 개를 비우고 은행나무 밑에 자리 펴고 거기서 농성을 계속하라고 그랬지요. 그런데 이게 며칠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하루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끝이 없었지요. 부녀회장에게 라면은 안 되겠으니 국밥이라도 먹여야겠다고 이야기했지요. 라면만 먹으니까 병이 나서 죽어가더라고요. 그렇게 해서 성당 부녀회원들이 그 노동 청년들을 일주일이 넘는 동안 도왔어요. 그 친구들은 소풍 온 것처럼 신났지요. 해주는 밥 잘 먹고 교회가 응원한다 싶고요. 출근 시간만 되면 띠 두르고 5~60명 줄지어서 성당 안 입구에서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하고 그러기를 10여 일 지나요. 나는 그냥 열심히 싸워보라고 환경만 돕고 지켜보기로 한 거예요. 그런데 오랫동안 시위를 해도 회사 측도 기관들도 전혀 반응이 없어요. 어디서 와보라는 곳도 없고요. 정보과 직원들이 지켜보는 것 말고 관심이 전혀 없는 것 같았지요. 몇 명 안되는 것들이 뭐 하겠냐 하는 생각이지요.
그래서 내가 정보담당 형사보고 이 사람들 어떻게 좀 해결해줘야지, 이래서 되겠냐고 했죠. 해결 방법이 없다는 거예요. 회사에선 다 해고되었고 다시 들어갈 수는 없다고만 해요. 그래서 거기도 폭력을 써서 애들을 내보낸 거니까, (똥물을 끼얹고 그랬다는 얘기도 들었으니-동일방직) 우리도 힘으로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어요. 주일 하나를 지나고 또 한주가 다가올 때, 신부들 한테 연락을 했지요. 학성동의 양 신부님, 일산동, 단구동. 세 개 본당의 신부님이 그때만 하더라도 충분하니까요. 낮 미사(10.30-11시 미사)를 드리지 말고 저녁 미사만 하고 낮 미사는 원동성당으로 가라 할 수 없겠느냐고요. 그리고 신부님들도 와서 사정이 이러니까 우리가 같이 목소리를 내줘서 애들을 복귀시키든가 해야겠다 하고 의론을 했어요. 고맙게도 세 본당 신부님들이 다 허락해준 거지요. 주일날 갑자기 원동성당으로 사람들이 몰려온 거죠. 노동 청년들 노동자들 여러 젊은이가 마당에 함께 앉고 성모상 앞에다 제대를 차리고 거기서 미사를 드리면서 내가 강론하고 현실 고발을 하게 한 거지요. 단식하는 노동자들과 이제는 우리가 같이 행동을 하겠다고요. 그날 미사를 드리고 오후가 됐는데 타협을 하자고 해요. 어떻게 타협을 하자는 거냐? 노동자들을 회사로 들여보내야지 그랬어요. 아! 들여보낼 수 있으니까 타협을 하자고 경찰서에서 왔어요. 그러면서 경찰서에서 만나자 그래요. 그래서 여기로 오라고 했더니 그건 안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경찰서로 갔어요. 노조 대표 세 명하고 나도 함께 갔지요. 회사 대표 두명, 정보부장, 경찰서장 이렇게 만났어요. 그런데 기분이 나빴던 게 사장 호주머니에서 돈 보따리가 보이는 거예요. 그래서 저거를 누구에게 주려고? 생각하며 살짝 화가 났어요. 나중에는 누구한테 줬는지는 몰라요. 어찌 되었든 그때 타협 본 것은 다 복직시키자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다 복직을 시키는데 두 사람만큼은 못 하겠다는 겁니다. 주동자 한 사람만큼은 시간이 많이 지나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할 수가 없다고 그래요. 대표가 여성인데도요. 워낙 그곳 지부장이 똑똑했나 봐요. 다른 임금 문제를 비롯 다른 조건도 타협으로 얻어냈다고 봐요. 두 사람을 제하고는 다음 날 모두 회사로 복귀했는데, 뒤의 일은 돌보질 못했지요.
 
김찬수 J.O.C에 대해서 좀 더 들려주실 수 있나요. 어떤 단체인지요?
 
최기식 가톨릭노동청년회(J.O.C.혹은 영어로 Y.C.W.) 천주교 국제 공식 단체이지요. 1950년대 말에서 1960년 말까지 도입 시기인데 오래전에 돌아가셨지만, 그 양반 이름이 한국인 박성종 신부, 외국인 전 미카엘 신부 양 노엘 신부로 기억해요. J.O.C를 원주교구에서는 처음에 이영섭 신부님, 그리고 그 뒤에 신현봉 신부님이 지도신부를 했어요. 원동성당에 오면서 그걸 나도 맡게 돼서 서울에서 있는 사람들하고 같이 세미나도 하고 했는데, 그때는 J.O.C 회원들이 노동자이고 가톨릭 성당 내에서 모임을 하고 정의와 사랑의 정신을 익히며 노동법이나 노조 등을 배워 노동자 동료를 만나 노동법을 가르쳐주고 그랬어요. 말하자면 노동자들 인권과 권익을 위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거예요. 노조를 만드는 과정과 방법에 등에 대해서요. 당시 노조를 시작하면서 억압 박해받고 쫓기고 싸울 때 J.O.C가 역할을 했거든요. 그 바람이 서울에서 원주로 내려오면서 원주에서도 범양산업 노조를 성공시키고, 그다음 한진콜크회사에 민주노조를 이루는 과정에서 터졌죠. 그래도 교회에 기대고 노동자들이나 농민들이, 교회 안에서 활동을 하면서 1970년대 말에는 그래도 대단히 활동이 활발했잖아요. 더군다나 우리 교구에는 사회개발위원회 사람들이 농촌이나 광산지역이나 다니면서 의식교육을 거의 완벽하게 할 정도로 같이 했었으니까요.
 
(1980년 가톨릭농민회 원주교구 제 2차 부녀자 교육)
 
내가 왜 이 얘기를 하냐 하면 교회와 사회 이야기를 할 때면 가톨릭농민회하고 J.O.C가 당시에는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에요. 그들을 통해서 교회가 사회 안에 같이 어울리면서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정말로 힘이 되어 주는 역할을 했다는 것이지요. 어떤 면에서는 빛이 되어 주었다고도 얘기할 수 있겠죠. 그리고 시대적 요구에 따라 우리 교회가 사회참여운동을 힘있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교회 얘기가 될 수 있지만, 내가 50년 살아오면서 그때가 1975년부터 거의 1980년 말까지 민주화가 되는데도 이들의 활동이 참으로 컸었다 라고 말하고 싶어요.
 
김찬수 당시 민주화에 대해 좀 더 이야기 해주실 수 있을까요? 교회 역할 면에서요.
 
최기식 원주가 민주화의 메카라고 얘기할 수 있었던 것이 1970년대 말 주교님과 신부님들이 감옥에 가고 노동조합 운동이 전국적으로 활발했기 때문이에요. 거기다 함평 오원춘 고구마 사건, 전국가톨릭 농민회 사건들, 그리고 전국적으로 데모를 본당에서 했잖아요. 교회가 사회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복음을 전하는 데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민주화 발전에도 큰 역할을 한 것이라 봐야 해요. 그런데 지금 젊은 사람들은 그걸 전혀 모르는 것처럼 느껴져요. 신부들까지도요. 그리고 그 당시에 확실한 것 중 하나는 지 주교님이 아니었다면, 또 장 선생님(무위당 장일순) 만나 사회참여운동 사회개발위원회 등이 어우러지지 않았더라면 원주가 민주화의 메카라고 얘기를 할 수 있을까요? 그러니까 지 주교님의 역량이 가장 큰 거였다고 생각을 해보는 거죠. 그리고 신협 운동이 그때 가장 활발했었어요. 신협이 사무실을 크게 만들어 놓고 사람들이 찾아오는 그런 은행 역할은 아니었지요. 매일 백 원, 이백 원 출자 적금을 받기 위해 가난한 사람들을 찾아서 다녔거든요. 그들의 가게나 집집을 찾아가는 것도 하나의 복음적이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사회개발 얘기는 우리가 다 아는 거고요. 그다음 교육원 이야기인데요. 원동성당에 있을 때는 본당에 충실히 하려고 했지요. 교육원에 와서 제일 기억나고 열심히 하려고 했던 게 공소 사목이었어요. 공소 회장들이 거리가 멀어 미사는 못 나오니까요. 지금같이 교통이 좋지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회장들이 미사 대신 예배를 하고 성체도 나누어 주고 그랬죠. 따라서 신앙도 확실하고 책임감도 확실하게 줘야 했어요. 공소가 그때 85개가 넘었는데 공소 회장들, 공소 간부들 대상으로 피정 교육을 하는데 겨울이 되면 두세 번씩 했어요. 외국 신부님들이 협조를 아주 잘 해줬어요. 그래서 ‘들빛’이란 교구 회지도 공소 사람들 중심으로 강론을 써 준거죠. 그러면서 성서연구를 도입하고 그다음 공동체 묵상 운동도 했지요. 그러니까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신앙인 교육운동인데, 그것을 우리는 공동체 묵상이라고 그랬어요. 교회의 기초 공동체가 목적이에요. 교회가 번성해 나가려고 하면 기초 근본 공동체가 친교와 사랑으로 되어 있어야 해요. 그렇게 되면 신앙도 굳어지고 사명감도 생기고 시대적인 징표 같은 것도 서로 가려내게 되지요. 그런 것을 위해서 같이 노력하는 거죠. 난 그렇게 생각을 해서 공동체 묵상이 활발하게 하도록 지도자양성을 꿈꿨지요. 그리고 여성, 학생, 청년들 연수도 해서 거의 2년 동안은 교육원이 빌 때가 없었어요. 교육원이 사회개발 위원회 주간도 많았지만, 신앙교육도 많았다는 겁니다.
 
(1981년 공소 학생 피정)
 
김찬수 쉴 틈 없이 굉장히 활발했군요. 교육원에 계실 때 10·26 사건이 나나요.
 
최기식 네. 활발했어요. 서울도 오고 가고 했어요. 그런 와중에 10·26 사건이 나잖아요. 새벽에 깨서 단구동 바오로 병원에 미사 가는 도중에 라디오방송을 들었어요. 미사도 정신없이 하고 돌아왔어요. 마음속으로 ‘아. 이제는 뭐 되겠구나.’ 이제 변화가 오겠지. 주교님 생각도 나고 그랬어요. 나는 민주화가 어쩌고 이러면서 끈질기게 할 생각도, 역량도 없었던 것 같아요. 성직자로서 그게 참 맞지도 않는 것 같은 생각이 많이 들었고요.
 
황도근 제가 하나 궁금한 게 있어요. 10·26 사태 나기 전에 1978년 1979년도에 원주 가톨릭에 굉장히 사람들이 많이 몰려왔을 거 아니에요? J.O.C 때도 그렇고. 사건 때도. 그러면 사회운동이 아주 깊숙이 관여할 때 다른 의견으로 나오는 것들이 좀 있었지 않았나요? 아니면 전체적으로 거기에 동참하는 분위기였나요? 원주는 그 당시 아주 보수적이었을 것 같은데요.
 
최기식 반대하는 그런 사람들이 있었지만, 지 주교님과 신부들 감옥에 가고 그러면서 신자들보다 일반 사람들도 더 열심히 동참했었다고 봐야지요. 미사에 오고 안 오고를 떠나서요. 소위 원주캠프라고 하는 인재들이 앞선 것에는 뒤에서 시기하는 면도 있지만, 당시에는 주교님도 사제들도 일반 사람들에게도 박수를 받고 있었다 믿지요.
 
황도근 앞에서 반대하지 않는다고 해도 뒤에서 싫어했을 수도 있었겠네요.
 
최기식 좋다 싫다 표현이 쉽지 않지요. 좋아도 행동을 하기 어렵고 싫어도 싫다고 표현을 제대로 못 하고 뭐 그런 거 있지 않겠어요? 신부들도 데모하는 곳엔 가지 않았어요. 주교님, 신부님들 감옥에 갔을 때 우리 몇 사람만 가끔 다니고 그랬죠. 신 신부님 감옥에 들어가 있을 때 원주에서 기도회 참여하는 분들이 많지도 않았어요. 신부들도. 기도회 오는 것이 지 주교님 때 하고는 전혀 달랐지요. 전국적으로 ‘구국수호사제단’이라고 반대하는 노골적 단체도 탄생했지요. 그때부터 벌써 성향이 나타나는데, 솔직한 이야기를 할 수는 없지만 어떤 분들은 내가 J.O.C 데모운동 할 때도 ‘신부님이 좀 도와줘야 하잖아요?’ 그러면 화를 막 내더라고요. ‘와서 참석만 해주면 돼요.’ 그러는데도 안돼요. 그렇게 운동하는 그 자체를 교회성직자로써 합당하다고 보는 게 아니죠. 이거는 복음적인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성직자들이 있는 거지요. 지금은 다 돌아가셨지만요. 그러나 한편 그 기도회 모임은 오지는 않지만, 마음은 동참하는 분들 더 많지요. 어떤 동료 신부는 직접 나한테 그랬어요. 우리가 기도회를 안 간다고 해서 사회참여를 반대한다고는 생각지 마라. 그렇게 얘기하면서 함께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말은 안 하면서도 극적으로 반대하고 매도하는 분들도 있지요. 교회 성직자가 할 일이 아니다. 라고 생각하는 장상도 있는 거고요.
 
황도근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군요.
 
최기식 그렇지요. 평신도들도 내놓고 말하는 사람들은 없었어요. 그렇지만, 기도회를 한다든지 그러면 참석하지 않죠. 그런데 문제가 된 건 오히려 그런 사람들보다도 공무원들이었어요. 공식적으로 못 가게 했으니까요. 기도회 왔다가 정보원들이 체크하고 보고하면 난리가 나죠. 거의 4~5명이 뒤에서 다 보고 있으니까 공무원들 다 알잖아요. 그래서 지 주교님은 뭐라고 했냐면 ‘기도회에 나오지 마라.’ 공무원들은 나오지 말라고 하면서 ‘공무원은 공무원의 윤리가 있다. 정부하고 반대하고 거기에 참여할 일이 아니다.’ 이렇게 변론을 해주셨어요. 그러나 그때나 지금이나 말만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성직자 라는 사람들이 감옥에 들락이고 또 매일 성당에서 데모나 하니까 교회는 망하고 신자들은 교회에 오지 않는다고요.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는가에 따라 입장이 많이 달라진다고 보는 거지요.
 
황도근 실제로 그래요?
 
최기식 실제로 숫자가 줄죠. 주일 미사에 그런 사람들이 못 나오니까요. 더군다나 내가 원동에 오고 나서는 그게 뚜렷하게 드러났던 것은 사실이지요. 나는 또 열심히 쉬는 교우들 방문하고 예비자 초대의 밤을 하며 신자들을 많이 늘렸으니까 성당은 겉으로 보면 더 활발해 보였죠. 그런데 일부 안 나오는 사람들이 더러 몇이 있었을 뿐이지요. 교회가 사회참여 활동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말을 했죠. 교회가 그렇게 깊이 참여하면 사람들이 다 못 나오고 교회는 망한다고. 그거는 지금도 뱃속 편하게 사는 사람들은 똑같아요. 정의구현 활동을 싫어하죠.
 
황도근 신자들 중에서도 그런 그룹이 하나 있지요?
 
최기식 그 신자들 그룹이 <대수천>이라고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협회’ 그 사람들이 우리 기도회 할 때 50명이 내려와서 문밖에서 반대하고 신부들 욕하고 그랬지요. 지금도 있어요. 태극기 부대처럼 똑같은 사람들이지요.
 
황도근 지금 말씀 들어보니까 그래도 그렇게 부담스러울 정도로 반대하는 분위기는 없었네요.
 
최기식 원주에서는 그런 거 없었죠. 있었다고 하면 극소수고요. 그리고 사실은 1980년 중반에 신자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요. 서울 특히 강남 지역에서도요. 미문화원 방화사건 뒤에 말입니다. 미문화원 방화사건은 내가 얘기할 수 있는 거는 아니어요. 그런데 서울에서는 진짜로 신자 증가가 폭발적이었어요. 신부 지망생들도 그렇고요. 고등학교 졸업을 하면서 신부될 생각을 안 했는데 미문화원 사건을 보고 고등학교 출신이 신학교 지원을 하는 거예요. 그래서 신부 되어서 정의구현사제단에서 열심히 활동하는 신부들도 있어요. 그래서 1970·1980년대 지성인 신자들이 엄청나게 늘어났어요. 전국적으로도 마찬가지고요. 그때가 제일 많이 늘어났어요.
 
황도근 그래서 힘든 사람들이 찾아가는 거죠. 또 하나 말씀하시기 전에 여쭤보고 싶은 게 10·26사태 났을 때 김영주 회장님이 얘기해 주신 건데요. 지학순 주교님이 바로 문상 가시잖아요. 원주 시청인가요? 그때 반대하는 사람들이 가지 마시라고 박정희 영전에 가서 문상하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고요. 혹시 그때 상황은 좀 아시나요? 그때 같이 가시지 않았나요?
 
최기식 네 그럼요. 그때는 내가 교육원에 있을 때지요. 박정희 대통령이 시해됐다는 뉴스를 듣고 흥분이 돼서 앞으로는 어떻게 될까? 생각하고 있었지요. 다음 날인가 주교관에서 올라오라고 전화가 와서 달려갔지요. 도착해서 보니까 이미 몇 명이 와있어요. 별 이야기도 없고 함께 어디를 간다는 거예요. 말없이 따라가니 시청 빈소를 가는 거지요. 빈소가 이미 꾸려져 있는 거니까. 참 기분이 이상하고 묘하게 느꼈지요. 박정희보다는 오래 살아야 한다고 하더니 먼저 죽으니 정말 문상까지 가시는가 생각했지요.
 
황도근 당일에 가신 거예요?
 
최기식 아니 사건 발표는 다음 날 아침이지만 운명했다고 발표를 안 했어요. 아마 3일째 되는 날 갔을 거예요. 원주 시청에 빈소를 차린 날 후이니까요.
 
황도근 그때 뭐라곤 안 하셨어요?
 
최기식 아무 기억이 없어요. 속으로 불평하는 마음으로 따라 갔으니까요. 주교님이 빈소 앞에서 절을 하는데 뒤에 있다가 나중에 하는 거지요. 아주 불편했어요. 왜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했지요. 한편으로는 그러면서 아! 사제구나. 정말로 사제구나. 죽은 자에 대해서는 사제구나. ‘죄는 밉지만, 사람이 미운 것은 아니다.’ 그대로 하신다 생각했지요.
 
황도근 저는 그 말씀과 그 예를 듣고 상당히 지 주교님을 다시 느끼는 계기가 됐어요. 쉽지 않잖아요.
 
최기식 그러니까 나는 지 주교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그분이 정의로운 분이다 그러기 보다는 속이 참 따뜻한 분이다. 인정이 많은 분이다. 사랑이 많은 분이다. 이렇게 말할 때가 많지요. 주교님하고 부딪힌 일이 있는데, 사회복지 할 때라 생각해요. 한 번은 전두환이 백담사 있을 때인데 거기 가신다고 나서시는 것을 보고 정말 놀랐고요. 그때는 이해를 별로 못했지요. 시해 당했을 때 가서 인사 가는 거는 아마 김영주 씨가 인도했을 거예요. 그렇게 생각을 했고 그분들이 같이 가니까 어쩔 수 없었어요. 백담사 가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냐고 하면, 춘천에 전두환 대통령이 오는데 도정 보고회를 받는 자리가 있다고 해요. 신년사가 있고 그러던 땐데요. 춘천에 모이는데 지 주교님이 거기 초대가 된 거예요. 그래서 초청을 받아서 간다고 누가 얘기를 해줘요. 얼마나 기분이 안 좋은지 주교님을 말려 보기로 마음을 먹었지요. 내가 주교님하고 가장 크게 부딪친 게 그거에요. 주교님과 아침 식사 후인데 ‘주교님, 거기는 왜 가십니까?’ ‘가면 어때?’ 당신은 그 마음이 자신 있는 거예요. 당신이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자신이 있는 거지요. 전두환이와 주교님을 높은 자리에 앉혀 놓고, 추켜세우며 회유하려고 하는 거다. 그런 생각만 드는 거예요. 아침 식사를 하면서 ‘주교님 춘천에 가신다고 들었는데 가실 겁니까?’ 하니까 “음 그럴 생각인데” “주교님 안 가시면 좋겠습니다.” “왜?” “주교님 가시면 이용만 당하신다고 해요”이 소리에 화가 나신 거예요. “나보고 이용당한다. 나름대로 판단해서 가는 건데 왜 내가 이용만 당한다고 해?” 아주 큰 소리로 역정을 내시는 거예요. 그러면서 당신을 무시한다는 거지요. “너까지 나를 그렇게 무시하냐?” 둘이 있을 때 그랬어요. 아이고 거기서 무슨 말을 내가 해요. 가만히 있다가 나왔죠. 그런데 내가 나와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바른말을 한 거잖아요. 나도 화가 나요. 왜 전두환이 들러리 노릇을 하시려고 해? 하면서요. 1985년도인가 그럴 거예요. 김영주 씨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그분이 주교님께 큰 소리로 직언하는 것을 몇 번 봤거든요. 그때는 그분이 이미 교구를 떠났을 때여요. 사무실에 나갔는데 도저히 견딜 수가 없는 거예요. 그리고 분명히 주교님이 잘못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걸려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주교님 방으로 올라가 노크했지요. 들어가 소파에 앉으면서 ‘주교님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그랬더니 마주 앉으시며 ‘뭔데? 말해봐’ 하셔요. ‘주교님! 정말 제가 주교님을 무시해서 그런 말씀을 드린 것으로 생각하십니까?’ 그러니까 즉시 ‘아니야. 그래서 그런 게 아니야.’ 하면서 미안하다 하셔요. 그러고 가지 않으신 것으로 알아요.
 
김찬수 백담사도 전두환 만나러 가셨잖아요. 그때는 반대 안 하셨어요?
 
최기식 손정완이란 분이 있잖아요. 주교님이 백담사를 같이 가기로 했다고 자랑처럼 나한테 말했어요. 전두환이가 귀양살이하는 그 백담사를 간다고요. 그런데 백담사 가시는 것은 아무도 말리지 않았어요. 벌 받는 사람 가서 위로해 주겠다는데 누가 뭐라고 해요? 자신이 있으신 거죠. 그런데 만나고 돌아와서 하신 말씀이 더 기억될 말 같아요. ‘걔는 아직도 정신 못 차렸더구나.’
 
 
 
(다음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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