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80호] 기획특집 - 최기식 신부 사제서품 50주년_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6)-2
등록자 관리자 등록일자 2022.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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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특집 - 최기식 신부 사제서품 50주년
썩은 밀알이 되게 하소서(6)
글. 편집위원회
 
 
지학순 주교와 전두환의 관계?
황도근 혹시 그 전에 전두환과 지 주교님과의 그 관계가 좀 있었나요? 정권 잡기 전이나 장군으로 있을 때나요.
 
최기식 전혀 몰라요. 그때 군종에 원주교구 정인준 신부라고 있었어요. 간접적으로 들은 이야기이지요. 정 신부가 전두환 사령관이 있는 사단에 있었는데 총이 분실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해요. 비상이 걸리고 많은 장교에게 목이 걸린 경황이었다고 해요. 분명히 부대원을 공포의 늪 속에 넣은 상태 같았겠지요. 정인준 신부가 자기한테 얘기를 할 기회를 달라고 해서 부대원들을 설득했다고 해요. 자기에게 총을 가져오면 절대 사제의 신원을 걸고 신상을 보장한다고요. 그리고 사령관한테는 누구에게 나왔든가 총을 찾았을 경우 책임을 묻지 말아달라 하며 약속을 받아낸 거지요. 정인준 신부가 그 총기를 찾았다는 거예요. 총만 찾으면 되는 거 아니냐. 그리고 본인 상담은 내가 책임을 지겠다. 누구냐고 묻지를 않기로 약속을 했는데 전두환이 그걸 들어 줬다는 거예요. 그런 인연으로 전두환이 수경 보안사령관으로 갈 때 뽑아서 데리고 간거다 그래요. 그러니까 정인준 신부하고는 아주 가까워진 편이지요. 그때 사제단 신부들 사이에도 정인준 신부 이야기를 했어요. 정인준 신부가 전두환한테 여러 번 이야기 했는데 주교님을 존경하고 있다고 하고 빨갱이가 아니라 했다고요. 나는 그랬을 것이라 믿어요. 그러나 그 뒤에 주교님과 전두환이 서로 만났는지 안 만났는지 어떻게 알아요. 모르지요. 군종을 마치고 나온 신부는 유학을 떠나요. 정인준이가 로마로 갔어요. 로마에 가서도 전두환하고 만났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그리고 나중에 주교님이 돌아가셨을 때, 원동성당에 전두환이 문상을 왔잖아요. 문상을 왔는데 대꾸해줄 사람이 있어야지요. 정인준 신부가 상주가 된 거지요. 단구동성당으로 정 신부가 데리고 갔어요. 정 신부가 단구동성당 주임이었으니까요. 이것은 여기까지만 알지요. 전두환이 집권 후 정의구현사제단 어떤 사제는 ‘완전히 지 주교님이 회유되었다 변했다’ 하고 이야기한 적은 있어요.
 
황도근 주교님은 신부님에게도 미문화원 사건 후 감옥에서 나온 후에도 활동하는 것을 말렸다면서요. 그건 무슨 얘기예요?
 
최기식 한참 뒤의 얘긴데 1983년도 가을로 생각되는데요. 내가 감옥에 나와서 바로 서울로 가서 대학생들에게 강연했어요. 4·19부터 광주까지 사건 얘기를 했지요. 물론, 그것이 학생 데모를 부추기는 일은 아니었어요. 어떻게 보면 부추기는 것으로 볼 수도 있고요. 그리고 바로 전주하고 광주하고 강연 날짜를 잡았어요. 강연 내용도 김정남 씨가 메모를 해주고 그랬죠. 그런데 바로 그때, 전주 가기 일주일 전인데, 미얀마(버마) 아웅산 폭발 사건이라고 크게 났어요. 전두환 대통령 암살하려 했던 사건이요. 부총리, 외무부 장관, 비서실장 등 수행원 17명 사망하고, 수십 명 부상한 사건이요. 엄청난 사건이지요. 아웅산 사건이 나니까 정보 요원들이 딱 붙어요. 내가 감옥에 나온 뒤로는 정보원들의 공세가 대단했었어요. 아웅산 폭발 사건이 터지고 나서 바로 ‘전주에 가겠습니다.’ 그랬더니 가지 말라고 하시는 거예요. ‘무조건 가지 마. 가면 너 당장 데리고 간다고 했어, 감옥으로.’ 그래서 별수 없이 취소했지요. 광주도 취소했고요. 그다음부터 아예 다리가 묶여버린 것처럼 돼 버렸지요.
 
황도근 그것도 오해 소지가 있게 됐군요.
 
최기식 그렇죠. 주교님이 실질적으로 전두환 되고 나서 민주화 운동이나 사회운동을 못 하신 거예요. 그리고 그 사람들의 호의 받아서 북한을 가잖아요. 북한을 다녀오시고 많이 달라진 게 있어요. 여동생을 만나고 그 동생이 한 말을 계속해요. ‘오빠는 속고 있어 우리는 이렇게 잘 사는데...’ 거짓을 말하고 있으니까 김일성을 원망하시는 거예요. 그전에는 ‘박정희 죽는 거 보고 내가 죽어야 한다’ 하시더니 이북에 갔다 와서는 ‘김일성 죽는 거 보고 내가 죽어야 해’ 하고는 눈물을 흘려요. 남북통일 문제는 가슴에 가득하고 염원이 넘치지만, 건강이 약해지고 병이 덮치니 모든 게 무력해져요. 민주화 운동이 절정일 땐데 오해의 여지는 무한한 거지요.
 
황도근 10·26사태 얘기하시다가 너무 많이 앞으로 갔습니다. 혹시 1980년 4월에 사북사태가 일어나지 않았나요? 사북사태에 대해서는 좀 아시는 게 있으신가요?
 
최기식 그때 고한 사북성당에는 김영진 신부가 있었어요. 김 추기경님도 관심을 가지고 지 주교님도 관심 가지고 염려했던 사건이지요. 지 주교님은 김영진 신부에게 ‘목숨을 내놓고 사태 해결을 도와주라’ 할 정도로 강한 관심을 보였다고 들었어요. 추기경님까지도 메시지를 주고요. 거기까지 추기경님이 왔다 갔다는 얘기가 있는데 정확하게는 모르겠어요. 태백사태에 대해서는 소문만 들었어요. 내가 관련하거나 한 일은 없으니까요.
 
황도근 10·26사태 나고 광주 민주항쟁 사이에 특별한 일은 없었던 거죠? 10·26사태 하고 광주 민주항쟁 나기 직전 민주화 운동이 서울에서 활발했거든요. 저도 데모하러 나가고 그랬을 때 서울의 봄이라고 그랬으니까요.
 
최기식 원주에 학생들이 움직이려 했는지는 모르겠지만요. 전국적일 텐데 없지는 않았겠지요. 5·18 직전에는 전국으로 학생 운동이 폭발 현상이니까 조금은 움직이려 했겠지요. 있었어도 순간적이었다 싶어요. 나는 대단하게 느끼지 않았어요. 원주의 학생들이 제일 활발한 거는 1985년, 1986년, 1987년 그때가 제일 활발했지요. 그때도 전국 전국적으로 다 할 때니까요. 광주 때는 별 움직임은 없었던 것 같아요. 10·26 후에는 철통같은 계엄 상태고 모일 수가 없어 <가짜 결혼식> 같은 사건이 있었으니까 5·18까지 원주는 조용했다고 봐야지요.
 
황도근 그런데 제가 듣기로는 광주 일이 나기 전에 정부에서 전두환이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서 반정부 활동이 주도적으로 진행되는 몇 개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겠다는 그런 정보가 있었대요. 근데 그중에 원주가 포함됐었다고 하더라고요.
 
최기식 그걸 어떻게 알아요. 전두환이 그렇게 생각했다 하더라도 나중에 원주 얘기가 나온 거라면, 그쪽 사람들이 만들어 한 얘기지 원주와 무슨 관련이 있어요. 함부로 말할 것이 못 된다 생각해요.
 
황도근 그 당시에 대학생 조직 연합이 많았었잖아요. 그때 들은 얘기는 지 주교님이 서울에 와서 전두환을 만나고 온 다음에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를 했다고 하던데요. 아무 데모도 하지 말고 당분간은 움직이지 말라고요. 그렇게 얘기를 해서 광주 운동 이전까지는 원주는 아주 조용했다고 말입니다.
 
최기식 전두환을 만나고 나서? 나는 금시초문이에요. 그거는 지 주교를 빙자한, 음해하는 것보다도 오히려 더한, 저쪽 편에 있는 사람이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거죠. 그때는 그럴 때니까요. 저쪽에 있는 사람이 지 주교가 하지 말라고 그랬어. 그러니 하지 말아. 이렇게 얘기하는 거라면 이해가 가요. 추기경님을 비롯해 몇 종교 지도자들이 최규하 대통령을 만나 무엇을 건의했다는 것은 들었어요. 전두환 계엄 사령관을 만나서요? 아니라고 봅니다. 원주엔 그럴만한 힘도 없었다고 생각 들어요. 나는 오히려 무위당 선생이 시국 분위기를 파악하고 이런 때는 조용히 엎드려 기는 것이 상책이야 하는 소리는 직접 들었어요. 긴 시간을 두고 보면 그것도 한 작전이라고 볼 수 있는 거니까, 조용하라 기어라 하는 말은 당연하다 생각한 거지요.
 
황도근 그런데 그 뒤에 이어지는 얘기는 만약에 지학순 주교님의 얘기가 없었으면 광주가 아니라 원주였다는 거죠.
 
최기식 그러면 주교님 하고 의논을 했다고 하는 건데, 사실이었다 해도 나는 안 믿을래요. 에이 그건 아니지요. 전두환 머릿속은 알 수 없지만요. 광주가 된 것이 계획되었던 거라 해도 민간인하고 의논하고 어떤 도시를 정했을까요? 5·17 서울서도 그랬지만 남해 일대 동시에 폭발적 시위가 있어서 때마침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여하튼 인혁당 사건 때 얘기면 이해가 가도 그건 아니라 봐요. 그야 모르는 일이지만요.
 
황도근 이걸 지금 신부님에게 정확하게 증언 받는 게 중요해요. 왜냐면 그 당시에 소문이 너무 많았어요.
 
최기식 나는 몰라요 그런 소문은 말입니다. 지금도 금시초문인 것처럼 들리는데요.
 
황도근 그래서 증언을 해주셔야 해요. 그냥 조용히 있었죠? 특별하게 친 전두환 적인 것도 아니고 원주는 그냥 지켜보고 있는 거죠?
 
최기식 움직이는 것은 언제나 젊은 청년 학생들이었는데 우리는 지켜보고 있는 것 보다 제대로 뭘 모르고 있는 거지요. 다시 군사 정권은 생각도 하기 싫었는데요. 잘 되기를 희망하며 지켜보고 있었다는 것이 맞지요. 나도 그랬으니까요. 5·18 광주 민주항쟁 이전의 것은 정말 잘 몰랐어요. 모든 소식통이 막혀있고 거짓이고 그랬으니까요. 알아도 숨을 죽여야 했으니까 정지된 것처럼 조용했다고 생각돼요. 우리가 몇 가지 기억나는 게 있어요. 희망을 가지고 조마조마 기다리는 거지요. 군사 정권이 또다시 시작되지 않기를 바라면서요.
 
김찬수 혹시 최규하 씨가 대통령이 됐을 때 원주의 분위기는 어땠나요.
 
최기식 원주 분위기는 조용한 편이었어요. 그건 생각이 나요. 나중에 얘기지만요. 원주에 민주화 운동을 하는 여러 시민단체, 많은 사람이 최규하 대통령 기념관을 만든다고 할 때 결사적 반대를 했지요. 원주 신부들 몇몇도 스님 목사님들하고 연대하며 반대를 했죠. 다른 거는 모르겠어요. 기억나는 건 없어요.
 
김찬수 전두환이 들어서면서 주교님이 그와 친분이 있어서 일반 다른 사람들은 저항 행동을 그만뒀다. 지금 얘기한 대로 사전에 만나기도 하고요. 소문들이 많아요. 근데 지금 말씀 들어보면 특별히 그런 일이 없었던 거 아니에요.
 
최기식 내가 알기로는 전두환을 뒤로 만난 적은 없다. 찾아가지도 찾아오지도 않았다. 그렇게 말하고 싶어요. 비록 뒤로 만난 적이 있다 하더라도 나와서 그런 얘기를 할 분이 절대로 아니죠.
 
황도근 그때 만날 이유도 없었겠지요. 제가 보기에는 전두환이 드러나게 정권을 확실하게 잡은 것도 아니었고, 불안정할 때가 아닌가요.
 
최기식 살인과 폭력으로 잡았지만, 군사 정권을 잡은 것은 확실한 때이지요. 1986년까지는 그렇게 봐야 해요. 보안사 정보부뿐 아니라 지방 기관원들까지 주교님을 회유시키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한 것은 사실이에요. 선물 공세는 물론이고 명절이 되면 기관장들 모두가 인사를 해요. 주교님은 그럴 때 친하기라도 한 듯 잘 들어주고 대해 주시지요. 주변 사람들 말도 잘 들으시고요. 그런 면은 인정해요. 내가 1983년도 교도소에서 나왔을 때 나한테도 기관원들은 그랬으니까요. 그렇지만 주교님이 전두환하고 직접 만나서 얘기하고 뭘 어떻게 하고 그거는 아니지요. 듣기도 거북할 정도예요.
 
황도근 그러니까 5·18 심각성을 못 느끼셨던 거군요.
 
최기식 5·18 항쟁에 대해 조금 듣게 되는 것은 사건 며칠 후 서울 주교관서 사목국장 호출이라 해서 올라갔는데 그때 광주교구 김승훈 신부로부터 처음으로 이야기를 들어요. 그분이 광주에서 서울까지 오는데 일주일이 걸린 거예요. 도중에 묶여 있다가요. 그 얘기를 듣는데도 그렇게 심각성을 못 느껴요. 이유를 모르겠더라고요. 그 전에 워낙 난리 치고 데모도 하고 그래서 그런가, 답답한 것만 느껴져요. 수백 명이 죽었다 수천 명이 죽었다 해도 그게 와 닫지 않는 거예요. 서울에 올라갈 때, 원주에 올 때 차를 가지고 가면 뒤지기 시작하는데, 차 트렁크도 뒤지고 하면서 경비가 엄청 삼엄하다는 것은 느꼈어요. 성당 주보를 검열을 받으라 해요. 시청에 가지고 가서 계엄사령부 군인한테 말이에요. 직원이 시청으로 가서 검열을 받는데 계속 빨간 글씨로 북북 그어서 가지고 와요. 한두 번은 그냥 넘겼는데, 순교자라는 말도 쓰지 못하게 하는 거예요. 아주 새빨갛게 그어서 가지고 오니 화가 나더라고요. 그래서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지요. 원주 계엄 사령관을 내가 만나겠다고 했더니 오라고 그래요. 차를 몰고서 가니까 정문에서 못 가게 막는데도 말만 던지고 그냥 들어가 버렸어요. 사령관에게 당신이 신자니까 한번 좀 보라고 주보를 내놨어요. 보니까 내용도 별거 없는데 순교자라는 말이 있으면 쫙쫙 그어버리니까 이 양반도 빙긋이 웃더니 알았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다음 날 검열관이 바뀌었어요.
그리고 10월에 인성회 주선으로 16명이 독일 연수를 가서야 거기서 광주의 참상을 더 자세히 알게 되었어요. 그냥 뉴스처럼 나온 것을 보았는데 현장에서 몰래 찍은 영상을 본 거죠. 두들겨 맞는 거라든지 끌려가는 것, 총을 맞고 쓰러지는 것 등 처참한 영상을요.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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