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65호] 추모의 글 '봉산동 선생님을 보내고'
등록자 황진영 등록일자 2018.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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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산동 선생님을 보내고
 
 
 
                                                                                                                                      글. 이병철 시인, 前 전국귀농운동본부 이사장
 
 
 
봉산동 이인숙 선생님.

사람들이 대부분 ‘봉산동 사모님’으로 부르는 분은 무위당 선생님의 부인이신데
선생께서 작고하신지 24년 동안 홀로 계시다가 이제 세상을 떠나 선생의 곁으로 가신 것이다. 세상의 나이로 아흔이시다.

나는 무위당 선생 생전에는 사모님으로 불렸지만 선생님이 작고한 뒤로는 사모님이라는 말 대신 ‘선생님’이라고 불러왔다.
내가 그리 부른 것은 선생님이 누구의 미망인으로서가 아니라
선생님의 존재 그 자체가 무위당 선생과 함께 내게 또 한 분의 선생님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언제였던가. 무위당 선생 생전이니 거의 삼십년 가까운 오래전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그때 무위당 선생께서 재야단체를 돕기 위한 서예전시회를 서울에서 가졌을 때
개막전에서 인사말씀을 하며 매스컴의 집중을 받는 모습을 보고
관옥 형(이현주 목사님)이 저런 모습이 모두 사모님의 헌신이 뒷받침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라며 사
모님의 공로를 일깨워 준 적이 있었다. 이 말에는 우리 모두 공감하고 동의하였다.

무릇 세상에 나서서 잘난 체하거나 행세하는 이들 거의 대부분은 사실 드러나지 않고
내조해온 이들의 공덕 덕분인데 무위당 선생 또한 사모님의 크신 공덕이 뒷받침 해 온 것임을
모두 인정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동안 무위당선생의 생애와 그 가르침을 제대로 정리하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사모님이신 이인숙 선생님의 회고를 녹취하고 잘 기록해야 한다고 여러 차례 말해왔다.
그러면서 이 작업은 무위당 선생에 대한 것만이 아니라 사모님 자신의 삶과  생각 자체가
이 시대에 중요한 의미와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런 점에서 무위당과 함께 이인숙 선생님의 삶 그 자체는 우리의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시대정신을 드려내는 것이라 여기고 있다.

그래서 나는 해마다 무위당 선생의 기일을 비롯해 가끔 문안인사를 드리려 봉산동을 방문하게 되면
가능한 이인숙 선생님의 말씀을 오래 들으려고 애썼다.
그런 말씀을 통해 내가 이번 생에서 스승으로 모셨던 분에 대해서 좀 더 깊게 알기 위해,
그리고 스승이 가신 뒤에 또 한분으로 생존해 계신 선생님 당신의 생각을 만나기 위해
그 말씀을 새겨듣고자 했다. 이인숙 선생님의 그런 말씀을 통해서 내가 잘 알지 못했던 무위당선생의 일화에 대해서도,
그리고 평생 백수였던 선생을 뒷바라지하시면서 당신이 겪었던 고초와 경험담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울 수 있었다.
내가 이인숙 여사를 사모님이라 부르지 않고 봉산동 선생님이라고 하는 나름의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나는 사모님으로서도, 선생님으로서도 제대로 잘 모시질 못했다.
제자라고 하기엔 모자람과 부끄러움이 크다.

명문학교 출신의 뛰어난 재원으로 한 때 교사로서의 길을 간절히 걷고자 하였으나
사회안전법 전과자 무위당의 아내라는 연좌제로 인하여 그 꿈이 좌절된 채
평생을 무위당의 그늘에서 선생의 뒷바라지로만 해오신 분. 무위당 선생을 뵙고자
봉산동 누옥을 날마다 드나드는 수많은 이들을 고요히 미소로 맞이하시고 말없이 뒷바라지 하시다가  그렇게 배웅하시던 분,
언제나 그 자태와 인품이 학처럼 맑고 고매하시던 분. 후학과 제자들에겐 자애로운 어머니 같으신 분이셨다.
어쩌면 이번 생에서 당신의 역할은 시대를 앓으며 갈 길을 묻는 이들에게
그 길을 가르키는 무위당이란 인물이
그 몫을 제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돕는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보살이나 수호천사의 역할 같은 것이었을지도.
 
이제 무위당 선생께서 예순 일곱의 나이로 먼저 가신 뒤 스무 네 해의
오랜 세월동안 봉산동의 댁을 홀로 지키시던 그 이인숙 선생님 또한 유명을 달리하신 것이다.
어둠과 혼돈이 깊던 시절, 이 땅에 새로운 길과 희망의 등불을 제시하던 봉산동의 그 자리가 이제 빈자리가 되었다.

그 작은 누옥에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찾아와 아픔을 치유하며 다시 새로운 희망을 품고 길을 나설 수 있었던가. 그곳엔 언제나 치악산자락을 떠나지 않고 계시던 무위당 선생과 이인숙 선생님이 함께 계셨다. 그래서 언제 찾아가도 무위당선생의 말씀을 들을 수 있었고 반겨주는 이인숙 선생님의 따뜻한 미소를 만날 수 있었다.

이제 봉산동 그곳엔 무위당선생도, 이인숙 선생님도 계시지 않는 것이다.
두 분이 가시고 남은 이 자리를 어떻게 잘 가꾸고 보존하여
이 땅의 생명평화운동의 산실로 기념하게 할 것인가도 후학들과 남은 이들의 과제가 되었다.

이인숙 선생님의 유해는 부군이자 평생의 도반이셨던 무위당선생의 묘소에 합장으로 모셨다.
이제 오월이면 무위당 선생과 이인숙 선생님을 한 자리에서 함께 뵈올 수 있게 되었다.

장지에 왔던 분들을 배웅해드리고 두 분의 합장으로 새롭게 단장된 묘역에 무위당 사람들이 다시 모여
주룩주룩 내리는 빗속에서 김영주 고문님의 조사와
생전에 무위당선생께서 사모님을 위해 즐겨 불렀다던  노래 ‘검은 장갑’을
이경국 회장님의 선창으로 함께 부르며 선생님을 보내는 마지막 의식을 마쳤다.

묘역에도 가을이 깊어졌다. 건너편의 치악산에도.

지금 내리고 있는 이 비는 어디선가 눈으로 내리고 있으리라. 겨울이 머지않았다.

남은 생의 가을 또한 이리 깊어지고 있음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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