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73호]한묵청연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참되라'_소리꾼에서 트로트가수로 변신한 육찬수
등록자 교육담당 등록일자 202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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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묵청연
 
가는 곳마다 주인이 되고 서는 곳마다 참되라(隨處作主 立處皆眞)
-소리꾼에서 트로트 가수로 변신한 육찬수
 
글. 심상덕 무위당사람들 이사장
 
 
 
소리꾼 육찬수와 백발가
 
1990년 여름, 원주 치악산자연학습에서 열린 한살림 하계연수회에 무위당 선생이 강연자로 초청되었다. 100여 명의 수련생들로 꽉 들어찬 강당에 무위당 선생이 20대 후반의 청년을 데리고 들어왔다.
“저와 함께 온 이분은 창(唱)을 하는 소리꾼 육찬수씨입니다. 얼마 전에 노래 공부를 하러 박달재에 들어왔다가 자연농을 하는 최성현씨를 알게 되어 자연농 연수를 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창(唱)을 열심히 연습하고 있어요. 그저께 제천에서 자연농을 하는 친구들과 식사를 하다가 육찬수 도우(道友)를 알게 됐어요. 막걸리 한잔 먹으면서 이분이 부르는 ‘백발가’를 들었는데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자연학습원에서 강연을 해야 하는데 할 얘기가 별로 없으니 백발가로 내 강연을 대신해달고 부탁을 했어요. 찬수씨에게 노래를 청해볼까요? 그런데 백발가를 하려면 머리가 하얘야 하는 게 아닙니까?”(웃음)
청중 앞에선 청년이 겸손하게 말했다. “제가 소리를 한 연륜이 짧아서 잘 될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열심히 불러보겠습니다.”
 
이산 저산 꽃이 피니 분명코 봄이로구나.
봄은 찾아왔건만 세상사 쓸쓸하더라.
나도 어제 청춘이러니 오늘 백발 한심허구나~
 
젊은 소리꾼의 열창이 끝나자 우레와 같은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무위당 선생이 흐뭇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어때요. 오랜 세월을 두고 기억에 남을 노래아닙니까. 제가 몇 마디 떠드는 것보다는 값이 아주 좋기 때문에 우리 육찬수 형한테 부탁했어요. 참 좋죠? 그럼 제 얘기를 시작하죠.”
이날 이후 무위당 선생은 강연 요청이 들어오면 가끔 육찬수씨를 불러 노래를 부르게 했다. 30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연세 지긋한 어르신들 중에는 ‘백발가’를 불렀던 육찬수씨의 모습을 기억하며 그의 소식을 궁금해 하는 분들이 있다. 나도 그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알고 싶어졌다. 여러 곳을 수소문해 본 결과 육찬수씨가 전라도 광주에 살고 있다는 것을 알았게 되었고, 연락이 닿아 두 달 전에 그를 만날 수 있었다.
 
 
 
트로트 가수가 된 사연
 
50대 후반인 육찬수 씨는 광주시 광천동에 있는 상가 건물 2층에서 공연기획사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다정다감하고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환한 웃음으로 인사를 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오랜 훈련을 통해 다듬어진 소리꾼 특유의 탁음이 묻어있었다. 그가 판소리를 하는 국악인으로 활동하고 있을 거라는 나의 예상을 깬 것은 벽에 걸려있는 찬수씨의 홍보 포스터었다. 흰색 양복에 주홍색 난방을 받쳐 입고 부드럽게 미소를 띠고 있는 상반신 사진 위로 ‘트로트 가수 육경준’이라고 쓴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내가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짓자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한복을 입은 소리꾼 모습을 상상하셨나 보죠? 판소리를 그만 둔지 꽤 오래 됐습니다.” 그는 15년 전에 판소리를 접고 트로트 가수로 전환했으며 육태민이라는 예명으로 노래를 부르다가 몇 년 전에 육경준으로 개명(改名)해 활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앨범을 다섯 개나 냈는데도 아직도 무명가수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어요.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공연이 줄줄이 취소되어 거의 휴업 상태입니다. 요즘 신곡을 준비하고 있는데 쉬는 날이 많다보니 노래 연습 할 시간은 충분하네요.” 그가 자신이 낸 곡이라면서 앨범을 건네주었다. ‘해뜰날’, ‘당신의 세월’이란 노래 제목에서 찬수씨가 살아온 세월의 무게와 애환이 느껴졌다.
 
육찬수씨의 고향은 충북 음성으로 어렸을 때부터 대중가요와 우리 민요를 잘 불렀다. 가난한 집안 형편에다 같이 사는 형님 부부의 불화가 심해 마음이 우울할 때가 많았다. 그러면 뒷산에 올라가 목청껏 노래를 부르며 마음을 달랬다.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집을 나왔다. 인천에 있는 공장에서 막노동을 하다가 노래가 너무 하고 싶어 서울 영등포에 있는 작곡가 사무실을 찾아갔다. 작곡가는 노래를 배우려면 백만 원을 선불로 내야한다고 했다. 막노동을 해서는 목돈을 손에 쥘 수가 없었다. 유흥업소에 취직하면 손님들이 주는 팁이 많아 금세 목돈을 만들 수 있다는 소문을 듣고 을지로에 있는 룸싸롱 웨이터로 들어갔다. 사장은 월급은 없으며, 손님들이 주는 팁이 전부라고 말했다. “밤에 일하고 낮에 음악공부를 하려고 들어갔는데 완전히 깡패 소굴이더라고요. 일하다 쉬고 있으면 요령을 피운다고 발로 차고 몽둥이로 패고, 정말 엄청 얻어맞았어요. 한 달쯤 지나니까 여기가 지옥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같이 일하는 여자애한테 버스 토큰 하나만 달라고 해서 버스타고 튀었어요.”
그 이후 찬수씨는 20대 중반까지 도둑질만 빼고 안 해본 일이 없었다. 잠잘 곳이 없어 추운 겨울에 비닐하우스에서 자다가 얼어 죽을 뻔한 적도 있었다.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노래를 하겠다는 생각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스물일곱 살 때 산 속에 들어가서 혼자 노래 공부를 하기로 마음먹고 제천에 있는 천등산 박달재로 갔다. 노래 연습할 장소를 찾아 산길을 헤매고 있는데 저 만치서 웬 농부가 걸어오고 있었다. 농부가 가까이 오더니 “혹시 우리 집을 찾는 분 아니냐?”고 물었다. “이 농부가 누구냐 하면 <좁쌀 한 알>을 쓴 최성현 선생이었어요. 최 선생은 그 당시 제천에서 자연농법으로 농사를 지으면서 농사를 배우러 온 사람들에게 농사법을 전해주고 있었어요. 나를 자연농법을 배우러 찾아온 사람으로 생각한 것 같아요. 몇 마디 말을 나눴는데 마음이 끌려서 시장에 물건 사러 간다는 최 선생을 따라 갔어요.” 장을 다 보고 두 사람은 다방에 앉아 얘기를 나눴다. 100일 동안 노래 공부를 하러 산에 들어왔는데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했다고 하니, 최 선생이 자기 집에서 지내도 좋다고 했다. 그날부터 100일 동안 최성현 댁에 묵으면서 농사도 돕고 노래도 하면서 지냈다. 어느 날 박현숙이라는 판소리 하는 여자가 자연농법을 배우러 왔다. 찬수씨의 노래를 들어보더니 판소리를 하면 어울릴 목소리라면서 판소리를 배워보라고 권했다. “그때까지 저는 판소리가 뭔지 잘 몰랐어요. 며칠 동안 그 분의 판소리를 따라 부르면서 익혔어요. 100일 뒤에 최성현 선생과 작별하고 서울로 가서 누구 소개로 판소리 무형문화재인 한농선 선생님을 만났는데 이 분이 저의 판소리 스승님이셨어요. 판소리를 배우는 동안 머물 곳이 없어서 대학로에 있는 소리창고라는 카페 한 귀퉁이에서 자면서 지냈어요. 잠자리가 불편한 것은 참겠는데 소리를 배워도 연습할 공간이 없는 것이 너무 아쉬웠었어요. 판소리는 어렸을 때부터 해야 하는데 저는 스물일곱 살에 시작했으니 너무 늦은 셈이죠. 그런 만큼 연습을 많이 해야 하는데 연습을 못하니까 실력이 늘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늘 걱정이 됐어요. 이때 용기를 준 분이 무위당 선생님이셨어요.”
 
“머무는 곳마다 그 자리의 주인이 돼라.”
 
찬수씨가 무위당 선생을 처음 만나게 된 것은 선생이 최성현 씨의 자연학교를 방문했을 때였다고 한다. 100일 공부 마친 날 무위당 선생 댁을 찾아가 늦은 나이에 시작한 판소리 공부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그날 저녁 원주 시내 주점에서 선생님이 약주 한잔 드시고 나서 ‘내가 너에게 글을 하나 줘야겠다’하시면서 써주신 글이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입니다. ‘머무는 곳마다 그 자리의 주인이 돼라. 지금 있는 그곳이 진리의 자리’라는 뜻이라고 설명하시면서 ‘네가 지금까지 어렵게 살아왔지만 한 번도 비굴하게 살아온 적이 없지 않느냐. 앞으로 어디를 가더라도 그 자리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너는 소리꾼이니까 노래를 부르는 그 자리가 너를 주인으로 만드는 자리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야. 잘 부르겠다는 욕심보다 성심을 다해 부르면 너의 향기가 듣는 사람에게 전해질거야’라고 말씀하셨어요.”
 
 
隨處作主 立處皆眞(수처작주 입처개진)
 
어느 날 무위당 선생이 “내가 내일 강연을 부탁받았는데 할 얘기가 별로 없으니 네가 와서 소리 한 자락해라”라고 말했다. 판소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초짜에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라는 말에 겁이 덜컥 났다. “선생님 명령을 거역할 수는 없고 큰일 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 앞에서 망신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날 하루 종일 연습했어요. 다음날 강연장에서 ‘백발가’를 끝까지 부르긴 했는데 긴장을 많이 해서 어떻게 불렀는지 생각이 나질 않아요. 그래도 박수는 많이 받았어요. 그 뒤로도 몇 번 더 선생님이 저를 데리고 다니시면서 사람들에게 전도유망한 소리꾼이라고 소개하고 노래를 부르게 하셨어요. 이런 방법으로 힘과 용기를 북돋워주신 선생님 덕분에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워하거나 떨리는 게 완전히 사라졌어요.”
 
무위당 선생의 격려와 배려 속에 자신감을 얻게 된 찬수씨는 어느 날 문득 판소리를 제대로 하려면 전라도 사투리를 배워야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충청도 출신이다 보니 전라도 사투리에서 나오는 판소리의 맛을 살리기가 어려웠다. 남원으로 거처를 옮겨 그곳 사람들과 동화되어 살면서 전라도 사투리를 익혔다. 몇 년 뒤 광주로 이사하여 판소리 명창을 찾아다니며 흥보가와 동편제를 배웠다. 한때는 남원과 광주국악원의 단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던 중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고 두 아이를 낳아 20년 넘게 광주에 살고 있다. “가장이 되다보니 국악만 해서는 생계를 꾸려나가기가 쉽지 않더라고요. 판소리로 다져진 목소리로 대중가요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목소리가 좋다며 불러주는 곳이 많이 생기더군요. 그래서 판소리를 접고 트로트 가수로 직업을 바꿨어요. 15년 동안 가요를 불렀는데 아직도 뜨지 못하고 있습니다.”
 
 
트로트 가수로 활동하고 있는 육찬수씨와 그의 앨범
 
내 시선이 벽에 있는 그의 사진으로 옮겨갔다. 잠시 생각에 잠겨있던 찬수씨가 말을 이어갔다.
“아직도 트로트가 잘 안 되고 어렵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요. 이럴 때 선생님이 써주신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을 생각하곤 합니다. ‘성심을 다해 노래를 부르면 듣는 사람에게 네 향기가 전해질거야’라고 하신 말씀을 떠올리며 위안과 용기를 얻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만나고 정말 많이 변했습니다. 선생님의 주옥같은 말씀을 듣고 철학이 뭔가, 도(道)가 뭔가, 마음공부가 뭔가 깊이 생각하게 되었고, 지켜야 할 도리는 반드시 지키며 살자는 각오를 갖게 되었습니다. 아내를 사귈 때도 내가 늘 모시고 간다고 생각하며 만났고, 제가 부족해도 주변에 있는 분들이 저를 따뜻하게 대해주시는 게 너무 고마웠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제 인생은 엉망이 됐을지도 모릅니다. 선생님은 제 삶에 은인이십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작별인사를 나누는데 찬수씨가 “내년 무위당 선생님 기일에 묘소를 찾아 인사드리고 예전에 선생님 앞에서 불렀던 ‘백발가’를 들려드리고 싶다”고 했다. 내가 “무위당 선생님도 무척 좋아하실 겁니다”라고 말했다. 우리는 내년 봄 선생님 묘소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헤어졌다.
원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그가 준 앨범을 틀었다. ‘당신의 세월’이라는 노래가 애잔한 반주에 실려 흘러나왔다. 무명가수로 지내온 세월의 아픔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게 배어있는 노래였다. 구성지면서도 애절한 찬수씨의 목소리가 가슴을 촉촉이 적시며 차창으로 그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내년 봄 원주에서 만날 때는 찬수씨의 노래에 화창한 봄꽃이 피기를 기대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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