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74호] 한묵청연 하늘의 마음으로 사는 즐거움(天心樂) - 88장애인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전 강원도의회 의원 이정동
등록자 교육담당 등록일자 2021.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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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묵청연
 
하늘의 마음으로 사는 즐거움(天心樂)
 
- 88장애인 올림픽 은메달리스트, 전 강원도의회 의원 이정동
 
 
글 심상덕 무위당사람들 이사장
 
 
무위당기념관 입구에 무위당 선생이 쓴 ‘천심락(天心樂)’이라는 한자를 새긴 나무 현판이 걸려 있다.
서예에 일가견이 있는 방문객들은 ‘하늘의 마음으로 사는 즐거움’이라는 뜻의 현판을 보면서 ‘樂이라고 쓴 글씨가 즐거워서 두 팔을 흔들면서 겅중겅중 뛰어노는 사람들 모습 같다’며 선이 굵고 생명력이 넘치는 서체에 감탄한다. 서예 전문가들은 이 작품이 무위당 서예 중 역동적이면서 회화성이 뛰어난 작품이라고 말한다. 천심락(天心樂)은 이정동 전 강원도의회 의원이 소장하고 있다.
 
원주에는 원주가 고향이 아님에도 살면서 고향이 된 사람들이 많다. 45년째 원주에서 살고 있는 이정동씨도 그런 사람 중 한 명이다.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가 불편한 그는 신체장애를 극복하고 성실함과 부지런함으로 살림을 이루고 집안을 일으킨 자수성가한 사람이다.
대구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이정동씨는 청소년 시절에 아버지가 빚보증을 잘못 서는 바람에 집안이 망하다시피 하면서 고등학교를 중퇴했다.(나중에 검정고시로 대학에 입학했다.) 아는 사람의 소개로 원주에 있는 대한통운 수화물 담당 직원으로 취직해 원주역에 배치되었다. 처음엔 가족을 대구에 남겨두고 혼자 지내다가 일 년 뒤 부모님을 모시고 와 살면서 원주가 제2의 고향이 되었다.
가장인 그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10여 년 동안 매일 아침 6시에 출근해 밤 11시에 퇴근하는 고된 생활을 반복했다. 아침부터 늦은 밤까지 불편한 다리로 열차 화물칸에 올라 짐을 점검하고 나면 기진맥진해지면서 온몸이 저리고 아팠지만 조금도 내색하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1976년에 홍천 아가씨를 만나 결혼했고 알뜰살뜰 모은 돈으로 집을 장만했다.
그가 무위당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원주 시내에 있었던 한 서예실 원장과 친해지면서였다. 무위당은 원주 시내에 나오면 그 서예실에 들러 붓글씨를 쓰곤 했다. 무위당의 훌륭한 인품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기에 서예실 원장에게 기회가 되면 선생을 만나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어느 날 서예실에 갔더니 무위당이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그날 처음 선생님을 뵈었는데 체구는 작으시지만 기품 있는 모습 때문에 처음엔 말을 못 하겠더라고요. 제 몸이 불편한 걸 아시고는 ‘자네 생활하는데 애로가 많겠구먼’ 하시면서 한두 말씀 건네시는데 목소리가 너무 다정한 거예요. 담배를 꺼내 피워 무시면서 ‘자네도 한 대 피우게’하면서 저에게 담배를 건네주시더라고요. 제가 감히 맞담배를 피울 수가 있나요. 사양했더니 ‘이봐, 담배도 먹는 거니까 같이 피워도 되네’ 하시면서 불을 붙여주셨어요. 그때부터 선생님과 친해져서 댁에 가서 말씀도 듣고 붓글씨 쓰실 때면 옆에서 먹을 갈아드리기도 했어요.”
처음 먹을 갈 때 많이 혼났다고 한다. 요령이 없어서 좌로 갔다가 우로 갔다가 먹을 막 가니까 선생이 화를 내면서 “그렇게 정성 없이 갈면 안 된다. 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갈아야 제대로 된 농도가 나오는 거야” 하면서 방법을 알려주었다. "선생님은 붓에 먹을 찍어보면 대번에 잘 갈렸는지 아셨어요. 먹을 갈고 나면 ‘너도 부적 하나 써주랴?’ 하면서 글씨를 써서 주기도 하셨어요.”
 
1988년에 이정동씨는 근검절약하여 집을 장만했다. 무위당을 찾아가 “제가 똥간 같은 집을 하나 마련했는데 당호(堂號)를 지어주세요”라고 부탁했다. “그거 정말 축하할 일이구나. 네 집에 어울릴만한 당호를 생각해서 써줄 테니 며칠 지나서 와라” 라고 말했다. 일주일쯤 뒤에 갔더니 ‘천심락(天心樂)’이라고 쓴 글을 보여주며 “어때 마음에 들어?”하고 물었다. 이정동씨는 그때까지만 해도 당호에는 재(齋), 헌(軒) 이런 한자를 써야만 되는 줄 알았다. “이런 글을 집 현판으로 걸어도 되나요?” 하고 물었다. “네 맘에 안 드나보구나. 다시 써주랴?”라고 무위당이 말했다. 자세히 보니 굵고 힘이 넘치는 이 글을 집에 걸면 왠지 행복이 넘칠 것만 같았다. “아닙니다. 감사히 받겠습니다”라고 말하고 즉시 가지고 나와서 표구를 맡겨 집에 걸었다. 집을 방문한 사람들이 힘이 넘치는 이 글을 보면 저절로 흥겨움이 느껴진다면서 좋아했다. 2010년경 원주밝음신협 4층에 무위당 선생의 유품 전시실을 만들 때 내가 이정동씨를 찾아가 ‘천심락(天心樂)을 기념관 입구의 현판으로 쓰고 싶다고 했다. 그는 "제가 무위당 선생님께 거저 받은 것이기 때문에 누구든지 공짜로 쓸 수 있다"고 말했다. 서각을 하는 공예가에게 천심락을 목판에 새겨달라고 부탁하여 기념관 입구에 걸었다.
 
 
천심락(天心樂)이 이정동씨 집 당호가 된 해인 1988년은 서울올림픽이 열린 해이기도 하다. 1988년은 이정동씨에겐 평생 잊지 못할 감격의 해이기도 하다. 이정동씨는 88서울장애인올림픽 사격선수로 출전하여 은메달을 목에 거는 영광을 안았다.
올림픽에 장애인 경기가 있는 줄도 몰랐던 그가 88서울장애인올림픽에 나가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다.
올림픽이 열리기 전해에 공원에 놀러 갔더니 총을 쏴서 인형을 맞추는 놀이가 있었다. 재미 삼아 총을 쐈는데 쏘는 족족 인형에 명중됐다. 구경꾼들이 탄성을 지르며 이구동성으로 사격선수를 해보라고 말했다. 그때는 귓등으로 흘려들었다. 그러던 차에 경찰관 출신인 지인이 원주역 앞 건물에 사격장을 차렸다. 그곳에 놀러 가서 총을 쐈는데 표적을 모두 맞췄다. 놀란 사격장 주인이 88장애인올림픽 선발전에 출전해보라는 거였다. 알아보니 선발전에 나가려면 전국체전에 출전한 경력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실력이 월등하면 번외로 출전이 가능하긴 한데,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보다 15점이 높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정동씨는 남자권총 10m 번외 경기에서 25점을 더 얻었다. 그 후 1,2,3차를 무난히 통과하여 장애인올림픽에 출전하게 되었다. “국가 대표 선수로 선발된 열 몇 명의 선수 중에 지방 출신은 나밖에 없더라고요. 전부 서울, 경기 출신이었어요. 그러다 보니 합숙훈련하면서 설움을 많이 받았어요. 저는 체계적으로 사격을 배운 사람이 아니잖아요. 사격의 기본도 모르는 애송이가 올림픽에 출전했으니, 그동안 피땀으로 노력해온 선수들이 얼마나 아니꼽게 생각하겠어요. 무시당할 때마다 마음속으로 ‘나는 가슴에 태극기만 단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라고 생각했어요. 그는 독일 선수와 겨루어 은메달을 목에 걸었다. 시상대에 섰는데 감격과 함께 그동안 받은 설움이 복받쳐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올림픽이 끝나고 메달로 딴 연금을 어떻게 쓸까 고민하다가 장애인을 위한 체육장학회를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의 호(號)를 따서 대곡(大谷)장학회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이정동씨는 본격적으로 장애인들의 처우 개선과 복지를 위한 일에 혼신을 쏟았다. 1989년에는 장애인신문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창간에 힘을 보탰다. “장애인신문 제호를 부탁하러 무위당 선생님을 찾아갔어요. 제호를 써 달라고 부탁을 드리니까 ‘유명한 사람에게 받아야지 나 같은 시골 영감에게 받아서야 신문이 잘 팔리겠어?’ 하시는 거예요. ‘선생님, 저희들에게는 선생님만큼 유명한 사람이 안 계십니다’ 라고 말했어요. 선생님이 글의 형체를 다르게 세 장을 쓰셨어요. 이중에서 마음에 드는 걸 고르라고 하셔서 세 개 다 주시면 안 되겠냐’고 했죠. 그랬더니 ‘세 개를 다 갖고 가서 이것도 썼다가 저것도 썼다 하면 독자들에게 신뢰감을 줄 수 없게 되니 마음에 드는 것 하나만 갖고 가라’고 말씀하셨어요. 선생님이 100호 기념 축하 휘호도 써주셨어요. 휘호를 부탁하러 갔더니 ‘어, 장애인신문이 안 망하고 살아있구나. 그럼 내가 써줘야지’하시면서 반가워하셨어요. 그때 써주신 게 ‘나 天地간에 태어나 비가 오고 바람이 불어도 내 마음의 맑은 香氣는 아낄 수가 없네’입니다.
 
장애인신문 100호 기념 축하 서화
 
그날 선생님께 점심을 대접하려고 했더니 고향 후배인 이긍래씨가 하는 덕수칼국수로 가서 국수 한 그릇씩 먹자고 하시는 거예요. ‘선생님 비싼 것 드시죠’ 했더니 ‘장애인신문사가 무슨 돈이 있냐? 칼국수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음식이다.” 하시면서 덕수칼국수로 데리고 가셨어요.
 
이정동씨는 80년대 중반에 몸과 마음에 슬럼프가 찾아와 방황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때 봉산동 선생 댁을 찾아가 고민을 털어놓고 선생의 말씀을 들으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치악수석회 고문으로 있었던 무위당 선생의 권유로 수석회에 가입해 수석에 취미를 붙이며 마음을 다스렸고, 치악고미술동우회 회원으로 활동하면서 지역의 역사와 서예를 포함한 예술 작품에 대한 안목을 높였다.
“제가 힘들어 할 때마다 선생님은 늘 사람은 기본을 지키고 살면 된다. 남과 비교하지 말고 자기만의 기본을 지키며 열심히 살다 보면 결실을 맺게 된다는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리고 작품을 써주시면서 마지막에 제 이름을 쓰셨는데 제 이름이 들어간 글들은 평생 삶의 지표가 되고 있습니다. 죽을 때까지 제가 지켜며 살아가야 할 좌우명인 것이죠. 모든 것은 마음에서 이루어진다는 ‘일체심조(一切心造)’도 그렇고 바람에 나부끼는 풀처럼 순리에 따르며 살라는 뜻의 ‘종풍불석향(從風不惜香)’도 저에겐 부적 같은 글입니다. 제가 수석에 몰두해 있을 때는 ‘너 내 마음의 돌 한번 볼래?’하시면서 바위 위에 피어나는 난초를 그리고 ‘석불능언시무사(石不能言是我師: 돌은 말을 못하나 나의 스승이다)’라고 쓰셨어요. 아마 돌에 난을 그린 서화는 저만 갖고 있을 겁니다. 저만을 위해 주신 작품이니까 소중하게 간직해야겠죠.”
 
이정동씨는 2014년부터 2018년까지 강원도의회 의원을 지냈다. 임기 동안 장애인특위 위원장을 지내며 장애인 복지 개선과 권익 옹호를 위해 노력했다. 그는 의정 생활을 회고하며 이렇게 말했다.
“선생님이 살아계셨을 때 도의원에 출마해도 되겠냐고 여쭈었다면 ‘너 나가지 마라’ 라고 하셨을 겁니다. 그래도 출마해야겠다고 고집을 부렸다면 ‘정 네가 하고 싶으면 도의원이 돼서 의사 결정을 해야 할 때면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사람이 그 결정으로 어떤 영향을 받을지 생각하고 결정하라’고 말씀하셨을 것 같습니다. 저는 도의원을 딱 한 번만 하기로 하고 4년을 4선처럼 열심히 하고 멋지게 끝내자고 다짐했습니다. 임기 내내 장애인, 청소년, 노인, 다문화 가정 등 소외계층과 사회적 약자들의 처우와 복지 향상을 위한 활동에 주력했는데 하늘에 계신 선생님이 잘 했다고 칭찬을 해주실지는 모르겠네요.(웃음) 임기를 마치는 날 고별인사를 하면서 후배 정치인들을 위해 그만둔 뒤 지역에서 장애인들을 위해 더 많은 봉사를 하겠다고 했더니 그 다음날 신문에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실렸더군요.”
 
고미술 애호가인 이정동씨는 형편이 될 때마다 시중에 나와 있는 무위당의 서예 작품을 구입해 2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서화작품 외에도 민속품, 도자기, 금속공예, 수석 등 천여 점 넘는 다양한 작품을 갖고 있는 이정동씨는 수십 년 동안 수집한 애장품들을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는 전시공간을 제2의 고향 원주에 마련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작별인사를 나누면서 이정동씨가 말했다. “선생님이 가신지 올해로 27년이 되지만 늘 제 곁에 계시는 것 같아요. 무위당사람들에서 정기적으로 계간지와 책을 보내주고, 해마다 선생님 서화전시회를 열어 끊임없이 선생님의 존재를 환기시켜주니까 ‘선생님은 늘 내 곁에 계시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제가 원주에 와서 가장 잘한 일은 선생님을 만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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