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78호] 한묵청연 '지키지 못한 선생님의 약속' - 이성순 선생
등록자 관리자 등록일자 2022.05.03
IP 14.54.x.59 조회수 55
 
지키지 못한 선생님의 약속
-이성순 선생
 
글. 심상덕 무위당사람들 이사장
 
 
저축생명공제
 
 
‘貯蓄 生命 共濟(저축 생명 공제)’ 
이 작품은 성남에 거주하는 사업가 이성순 씨가 30여 년 동안 태극기 보관함에 보관해 오다가 작년 11월 초 무위당기념관에 기증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1990년대 초반까지 방배동에 있었던 신용협동조합중앙회에 걸려 있었다. 그런데 어떤 연유로 이성순씨가 갖게 된 것일까? 궁금증을 풀기 위해 그의 사무실을 찾았다.
 
60대 후반의 이성순씨는 동남아시아와 아프리카 여러 나라로 태양광 프로젝트를 수출 하는 활달한 성격의 사업가다. 태양광 사업에 뛰어들기 전까지 25년 동안 신용협동조 합중앙회에서 근무했다.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 동안 은행과 신문사에서 근무했는데 두 곳 다 적성이 맞지 않아 다른 직업을 찾고 있던 중 이웃에 사는 신협중앙회 총무과장 이 추천해 면접을 보고 합격했다.
 
“인사부에서 합격을 통보하면서 내일부터 바로 출근해야 한다는 거였어요. 면접을 보기 얼마 전 신협중앙회에 금융사고가 있었는데 회계담당 직원 여러 명이 퇴사를 해서 회계업무를 볼 사람이 급했나 봐요. 합격한 다음 날 출근해서 회계장부를 살펴보니까 대차대조표도 맞지 않고 회계가 완전 엉망인 거예요. 그땐 전부 수기로 작성을 했는데 조합원 명부도 틀리고 조합원들이 낸 출자 금도 맞지 않고 도무지 어디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첫날부터 머리를 쥐어뜯으면서 회계를 봤어요. 제 능력으로 안 될 때는 회계와 전산업무 전문가인 친구들을 데리고 와서 밤을 새우며 일을 하기도 했어요. 4개월 동안 매일 밤늦게까지 일을 했는데 힘은 들었지만 제 적성에 맞더라고요. 무위당사람들 감사로 있는 박종준씨가 저보다 3년 선배인데 같은 부서에 근무하면서 둘 다 고생 많았죠.”
 
당시 신협중앙회에서는 금융사고가 빈번해서 회계 담당자는 2년 이상 같은 부서에 근무하지 못 하게 했다. 회계업무 능력이 뛰어난 그는 회계과에만 무려 8년을 근무했다. 성순씨가 회계과에서 근무한 지 2년이 지나면 총무과로 발령을 냈다가 며칠 뒤 다시 회계과로 발령을 내는 식이었다.
신협중앙회 본부가 서울 방배동에 있을 때 공제부 사무실에 ‘저축 생명 공제(貯蓄 生命 共濟)’ 휘호가 걸려 있었다. 낙관 위에 글을 쓴 사람의 호(號)가 있었지만 초서체로 흘려 써서 무슨 글자인지 알 수 없었다.
어려서부터 붓글씨를 배운 성순씨는 서예에 일가견이 있었다. 서체에 대한 안목이 있는 성순씨의 눈에 사무실 벽에 걸린 휘호는 막걸리 한 잔 마시고 쓴 것처럼 약간 삐딱했지만 힘찬 붓결에서 글쓴이의 내공이 느껴졌다.
 
“무위당 선생님이 쓰신 글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어요. 그땐 장일순 선생님의 호가 무위 당인 것도 몰랐고, 장일순과 무위당은 각각 다른 사람일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어요.”
 
1992년에 신협중앙회 강원지부 사업과장으로 발령을 받아 원주에서 근무를 하게 되었 다. 원주에 와서 비로소 장일순 선생의 호가 무위당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원주에 살면서 무위당 선생님이 원주의 정신적 지주라는 것을 알았어요. 어느 날 불현듯 무위당 선생님 댁에 찾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혼자 갈 용기가 나지 않아 무위 당 선생님을 잘 아는 세교신협의 염준수씨 와 우리 사무실 운전기사로 있었던 한상봉 씨와 같이 갔어요.”
 
그는 무위당 선생 댁 대문을 들어선 순간의 느낌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역에서 워낙 유명한 분이라 집이 번듯할 줄 알았어요. 웬걸요. 마당이 온통 풀밭인 거예요. 풀이 조금 자란 게 아니라 무릎 위까지 닿을 정도였어요. 선생님에게 인사를 드리자마자 ‘왜 마당에 풀을 베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두십니까? 게으르셔서 그러신 거 아니예요?’라고 당돌하게 물어봤어요. 선생님이 웃으시면서 ‘쟤들도 세상에 나왔을 때는 살려고 나온 것 아니겠는가. 그래서 자라는 대로 내버려 두는 거야’라고 하시는 거예요. 그 말씀에 놀라면서도 감동했어요.”
 
방안을 둘러보니까 선생이 쓴 서화 작품이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니 낙관과 호(號)가 신협중앙회에 있는 것과 같았다. 그날 비로소 그는 신협중앙회에 걸려 있는 것이 무위당의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이성순씨가 봉산동 댁을 방문했을 때 무위당은 암 투병 중이어서 건강이 좋지 않았다. “내가 자네와 막걸리를 한 잔 마시고 싶지만 지금은 좀 그렇고 나중에 한 잔 하자. 내가 술 한 잔 먹고 싶다고 전화할 때는 얼른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무위당은 이성순씨를 세 번째 만났을 때 대성학교 제자가 운영하는 천석식당에서 술을 사주었다. 술기운이 무르익자 무위당이 “야, 우리 형제하자. 내가 너에게 글씨 하나 써줄게”라고 약속을 했다. 천석식당에는 무위당의 작품이 여러 점 걸려 있었다. 성순씨가 제일 큰 작품을 바라보면서 “써 주시려면 저 정도 크기로 써 주세요.”라고 부탁했다. 무위당이 껄껄 웃으며 “네가 욕심이 크구나. 알았어. 내가 몸이 나으면 써줄게’라고 말했다. 그런데 그 뒤로 병세가 악화되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선생님이 원주기독병원에 입원해 계실 때 박종준 선배가 선생님과 골수가 맞는 사람을 찾는다면서 신협강원지부 직원들을 모두 데리고 가서 골수검사를 한 적이 있어요. 그중 한 직원의 골수가 선생님 골수와 맞아서 그 직원 골수를 빼서 기증했어요. 그런데 선생님 상태가 위중해서 골수이식 수술을 못했어요. 마지막 문병을 갔을 때는 사모님도 같이 계셨는데 선생님이 몰라보게 야위신 거예요. 그땐 선생님이 저를 피하시더라고요. 저를 보시더니 가라고 손짓을 하시고는 화장실로 들어가서 문을 잠그셨어요. 당신의 야윈 모습을 보여주시기 싫으셨던 것 같아요. ‘선생님 얼른 쾌차하셔서 저에게 작품 써주시겠다고 하신 약속 지켜주셔야지요’라고 말씀드리고 나왔어요.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돌아가셨다는 부고를 받았어요. 묘소에 안장(安葬)하고 저도 회다지를 같이 하면서 ‘친구님, 잘 가세요’라고 작별 인사를 드렸어요.”
 
무위당이 세상을 떠나게 되면서 작품을 받을 기회는 사라졌지만, 성순씨는 우연한 기회에 신협중앙회에 걸려 있던 ‘貯蓄 生命 共濟(저축 생명 공제)’라고 쓴 작품을 습득하게 되었다.
1990년대 초 신협중앙회에 출장을 갔다가 공제부에 걸려 있던 작품이 주차장 옆 쓰레기장에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얼른 차에서 내려 쓰레기장으로 뛰어갔다. 옆에 있는 돌을 주워 액자의 유리를 깨고 작품을 빼서 차에 싣고 원주 집으로 왔다. 그런데 작품을 둘 곳이 마땅치 않았다. 작품을 둘둘 말아 태극기 보관함에 넣은 뒤 테이프로 봉해 놓았다. 그리곤 바쁜 일상 속에서 까맣게 잊어버렸다. 무위당의 작품은 태극기 보관함에서 30여 년 동안 잠들어 있었다.
작년 10월 말 원주에서 함께 근무했던 후배가 무위당사람들 웹사이트 주소를 카톡으로 알려주면서 원주에 무위당 선생을 기리는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득 태극기 보관함에 넣어둔 작품이 생각났다. 후배에게 ‘내가 무위당 선생님 작품 한 점 갖고 있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러자 ‘그 작품 저 주세요’라는 답장이 바로 왔다. 후배에게 줄까 하다가 곰곰이 생각해보니 이 작품은 개인에게 주는 것보다 무위당사람들 모임에 주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위당사람들이 운영하는 페이스북에 들어가 ‘성남에 사는 이성순인데 제가 무위당 선생님 작품을 갖고 있습니다’라고 썼다.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신협중앙회에서 은퇴하고 무위당사람들 감사로 있는 박종준 선배가 본 거예요. 박 선배가 전화를 하더니 ‘야, 그 작품 무위당기념관에 기증해야지 다른 사람 주면 절대 안돼’라고 하는 거예요. 바로 다음날 택배로 무위당기념관으로 보냈어요.”
 
 
<장일순 평전> 표지의 무위당 선생 사진을 보며 회고에 잠기는 이성순씨
 
인터뷰가 끝나고 <장일순 평전>을 선물로 건넸다. 이성순씨는 책 표지의 무위당 선생 사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선생님은 제게 자연인 같은 분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아주 부담 없이 친구처럼 만나 뵙던 어르신이셨지요. ‘내가 몸이 나아지면 너에게 글씨 써 줄게. 너는 늘 만나니까 천천히 써줘도 되지? 하시고는 끝내 약속을 못 지키셨지요. 선생님에게 작품을 받지 못한 아쉬움은 있지만, 제가 30년 넘게 보관하고 있었던 작품을 무위당기념관에 기증하게 된 것만으로도 기분이 참 좋네요.” 
 
 
  ▷ 의견 목록 (총0개)
 
의견글 등록 권한이 없습니다.
이전글 / 맨 위쪽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