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67호] 한묵청연 '10년의 기다림, 지켜진 약속'
등록자 교육담당 등록일자 2019.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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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의 기다림, 지켜진 약속
 
정리. 김익록 강원도 교육연구원
 
 
△ 1981년 김원화 이사의 결혼식. 주례를 서셨던 무위당 선생님과 함께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몰라 몰라 정말 모른다니깐’, ‘처처단음’ 같은 작품은 무위당 선생의 서화 중에서도 정말 주옥같은 작품이다. 오랜 전에 그리고 쓰신 작품이지만 현대적인 디자인 감각과 위트가 넘친다. 이런 탐나는 작품들을 오랜 기간 동안 소장해온 김원화 (사단법인 무위당 사람들)이사가 무위당 선생 25주기를 맞아 애지중지 아끼던 소장품들을 무위당 기념관에 기증했다. 30여 점이 넘는 소장품과 주변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회수한 것까지 40점 가까운 작품들을 기꺼이 내 놓았다. 앞으로 무위당 기념관이 박물관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많은 작품들을 보유하고 있어야 하는데, 거기에 보태고 싶다고 했다. 그는 어떻게 이런 좋은 작품들을, 그것도 그렇게나 많이 소장하고 있을 수 있었을까? 10년의 숙고 끝에 어려운 결단을 내린 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 심상덕, 김찬수, 황도근, 박설희 네 분과 함께 중앙로 안동반점에서 만나 이야기 듣는 시간을 가졌다. 그는 서운함과 후련함이 함께 들어있는 표정으로 작품 하나하나에 담긴 사연을 들려주었다. 이미 알려진 이야기도 있었지만 처음 듣는 사연들이 많아 매우 흥미로웠다.
 
“우리 아버님이 이북 분이신데 원주에서 건설업을 하셨어요. 중앙시장 4분의 1을 아버님이 지으셨어요. 무위당 선생님 친구 이치중씨가 아버님과 친했어요. 아버님을 선생님께 소개시켜드렸지요. 그런데 아버님이 일찍 돌아가셨어요. 나는 군대에서 제대한 뒤 주류합동 사업을 하면서 선생님을 자주 뵙고 모시게 되었지요. 나는 선생님 휘하 원주 그룹의 막내였어요. 어르신들이 내가 눈치가 빠르고 행동이 잽싸다고 귀여워해주셨어요. 나는 지금도 김영주 회장님과 이경국 형님과 대화하면 엉덩이를 의자 뒤에 안 붙여요. 나보다 연세가 많은 분들을 모시다 보니까 그게 몸에 밴 거예요. 내가 어르신들 앞에서 말로는 가끔 대들기도 하지만 결국에는 순종하니까 어르신들이 귀여워해주신 거지요.”
무위당 선생의 심오한 철학과 사상이 아니라 인간적인 면모가 느껴지는 이야기들을 들으며 우리는 그의 말에 빠져들었다. 아직은 밝히기 힘든 사연들도 있으니 양해해 달라며 그는 쉬지 않고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냈다.   
 
“선생님께 직접 받은 작품도 많지만 구매한 것도 여러 점 있는데 ‘한살림’ (부산한살림에 써주셨던 ‘무엇을 이루려 하지마라......’ 작품을 말한다)은 20만원 주고 샀어요. 그게 어느 표구사에 있었는데 팔려나가려고 하는 거예요. 그래서 처음에 10만원 불렀다가 좀 더 불러야 될 것 같아서 20만원 주고 샀어요. 무위당 선생님 작품을 수집해놓고는 내가 꼭 선물하고 싶은 사람들에게 그 사람에 맞는 것을 골라서 선물하기도 했어요. 내 나름대로 작품을 가지고 배정을 한 거죠. 내가 선생님 작품을 이렇게 수집한 이유는 내 꿈이 돈을 벌어서 선생님 기념관을 마련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시간이 지나면서 ‘무위당 사람들’이 조직되고 무위당 기념관에 전시실도 만들어있으니까 그 부담은 줄어들었어요. 그런데 한 가지가 남았어요. 선생님께서 ‘원주발전연구소’라고 써주신 글이 있어요. 오래전에 내가 도의원 나왔다가 떨어지고 나서 선생님을 찾아뵈었더니 선생님 말씀이 “이놈아, 너는 정치는 안 될 것 같으니 접어라”하시고는 이 글씨를 써 주시면서 “너는 연구소를 만들어서 네가 이사장도, 소장도 할 생각하지 말고, 연구소를 키워서 좋은 사람들을 모아서 네가 막후 역할을 하면서 원주 발전을 위한 연구를 하게 해라” 하시면서 낙관까지 찍어서 주셨어요. 내가 표구도 만들고 현판도 만들었는데 아직도 못 걸고 있어요. 언젠가 선생님이 써주신 현판을 걸고 연구소를 했으면 좋겠다는 소망이에요. 선생님은 “원주의 문제를 다루다보면 그것이 곧 전국적 문제가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내가 그 현판을 붙일 수 있는 여력과 지식이 없어서 아직도 못 붙이고 있어요. 그동안 한 두 명이 그 현판을 달라고 했는데 거절했어요. 그 사람들이 그걸 갖고 가서 선생님 뜻에 반하는 짓을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안 된다고 딱 거절했어요. 그래서 그걸 아직 내가 갖고 있는 거예요. 원주발전연구소는 내 숙원사업이에요. 뜻이 있는 분들이 원주발전연구소를 맡아서 원주의 문제를 제시하고 연구했으면 좋겠어요. 선생님이 나를 잡/놈으로 보시고 이사장이나 소장 같은 것 절대로 하지 말고 이사나 하면서 뒤에서 도와줘라고 하셨으니까 나는 그렇게만 하면 되요.” 
 
그가 기증한 작품들로 여는 전시회는 이번 무위당 선생 25주기 행사의 핵심 프로그램이 될 것이다. 단순히 작품 전시뿐만 아니라 작품에 얽힌 에피소드를 함께 소개하면 참 재미있는 행사가 될 것 같은 기대감이 몰려왔다.
 
 
“한번은 어떤 사건이 벌어져서 가까운 사람들하고 편을 갈라 싸울 일이 생겼는데 우리 편이 이겼어요. 그러자 무위당 선생님이 “물처럼 경쟁하지 말고 살라”하시면서 ‘수류불경’을 써주셨어요. 그땐 내가 철부지여서 선생님에게 막 들이대고 그럴 때였어요. 일식집 이학에서 선생님은 정종 세 잔 드시고 나는 소주 세병 마시고 무슨 문제로 나와 논쟁을 벌이셨어요. 내가 “선생님은 왜 쓸데없는 놈들한테 애정을 쏟으시냐?”고 막 들이댔어요. 그러자 “이놈아, 너는 그 불같은 성질이 문제야” 하시면서 껄껄 웃으시더라고요. 지금 생각하면 철없이 대드는 놈을 귀엽게 봐주신 거였어요. 물론 가끔씩 따끔하게 야단도 치시기는 했지만요. 가끔씩 선생님이 이른 아침에 전화하셔서 “잠깐 들려라” 그러시면 얼마나 기분이 좋았는지 몰라요. “네 바로 가겠습니다”하고 선생님 댁으로 달려갈 때 내가 선생님 사랑을 많이 받고 있구나 하면서 좋아라고 달려갔어요. 선생님 작품 심부름하는 게 너무 좋았어요. 유명한 분들에게 작품을 갖다드리고 나서 친구들에게 “선생님 심부름으로 갖다가 누구누구 만났다”자랑하면서  얼마나 우쭐댔는지 몰라요.”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이 작품이 불교의 연기론(緣起論)에 나오는 내용을 아주 단순하고 쉽게 전하고 있다고 말하는 이도 있다. 조계사 화쟁위원장이던 도법스님은 이 글에 화쟁의 의미가 아주 알기 쉽게 담겨 있다고 말했단다. 무위당 선생은 이렇게 어려운 말을 늘 쉽게 풀어서 글로 쓰시곤 했다. 그냥 ‘서화가’가 아니라 ‘시인 서화가’랄까?
 
“나는 모임에 가면 그 시를 읊어요. 그러면 좌중이 조용해지면서 다 읊고 나면 나를 대단한 사람으로 알아요. 누가 지은 시냐고 물으면 내가 모셨던 무위당 선생님이 내게 주신 작품의 글이라고 말하죠. 그러면 모두들 존경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봅니다. 제가 성질이 울뚝불뚝하고 남들하고 잘 싸우고 얼마나 말을 안 들었으면 이 작품을 주셨겠어요! 선생님을 자주 이학 식당에서 뵈었는데 저와 둘이서 맞대면하고 약주 취하시면 선생님 모시고 원주천 둑방길을 걸어서 봉산동 댁까지 모셔다 드리기도 했어요. 둑방길을 걸으면서 이 얘기 저 얘기 하시다가 “담배 한 대 피고 가자”하시면서 길가에 쪼그리고 앉으셔서 담배를 피우셨어요. 담배 피우실 때 꼭 쪼그리고 앉아서 피우셨어요.”
 
 
김원화 이사는 제일 좋아하는 선생님 글씨로 ‘나는 한적한 들에 핀 꽃 밤이슬......’로 시작되는 작품을 들었다. 이 작품은 원본은 누가 갖고 있는지 모르겠는데 김진성 작가의 서각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고 했다. 이 글은 유행가 가사이다. 외국곡을 번안하여 김세화라는 가수가 불렀던 ‘야생화’라는 노래이다,
 
난 한적한 들에 핀 꽃
밤이슬을 머금었네
나를 돌보는 사람 없지만은
나 웃으며 피었다네
누굴 위해 피어나서
누굴 위해 지는걸까
가을 바람이 불면 져야해도
나는 웃는 야생화
 
“선생님이 심부름도 많이 시키셨어요. 이돈명 변호사님, 김상철 서울시장님에게 작품 갖다드리는 심부름을 제가 했어요. 제가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을 아시고 오전 6시면 전화를 하시는 거예요. “일어났냐?”고 물으시면 집으로 오라는 신호에요. 그럼 “네. 올라가겠습니다.”하고 댁으로 달려가는 거죠. 가보면  벌써 다 쓰 신 작품이 있었어요. “이것 좀 누구누구에게 전달해줘라” 하고 작품을 건네 주셨어요. 그리고 먹이 남아있으면 “너 지난번에 나에게 인사시킨 사람에게 부탁받은 거 있지? 그 사람이름이 뭐였지?” 하시면서 한 점 써 주시곤 갖다 주라고 말씀하셨어요. 벼루에 먹물이 남은 게 없으면 “먹 좀 갈아라”라고 하시며 써주셨어요.
내가 사람들에게 부탁을 많이 받았어요. 무위당 선생님 작품을 받아달라고. 선생님 댁에 가서 말을 더듬으면서 “지난번에 제가 인사시켜드린 아무개 있지 않습니까?” 라고 말하면 선생님이 금방 눈치 채시고 “너 그 사람에게 글씨 부탁 받았구나”하시고는 그 자리에서 먹을 갈라고 하시기도 하고, 어떤 날은 선생님이 부르셔서 가면 다 써놓으시고 “이거 지난번에 부탁한 그 사람에게 갖다 줘라”라고 말씀하셨어요. 내게 부탁한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물어보시고 써주셨어요. 그런데 어느 날 문득 이젠 더 이상 선생님에게 작품 부탁을 하지 말자는 생각이 들었어요. 어느 순간에 이래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선생님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으셨지만, 제 스스로 이젠 더 이상 부탁을 하면 안 되겠다고 느낀 겁니다.”
 
 
김원화 이사는 늘 거절하지 않고 작품을 써주시는 무위당 선생님께 죄송한 마음이 들어 작품 청탁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원주청년회의소(JC)에서 ‘조국의 미래 청년의 책임’이라는 내용의 비석을 세울 때에도 선생님께 부탁드려 글씨를 받는 일을 맡았다.
“이 작품은 치악서예실에서 선생님이 4~5시간을 공들여서 쓰신 작품이에요. 그 작품을 받을 때 너무너무 미안해서 죽을 뻔 했어요. 다 쓰시고 난 글씨 옆에다 이 글을 쓴 이유를 써달라고 부탁드렸어요. 그래서 옆에다 화제를 쓰셨어요. 지금은 단계동 터미널 4거리에 크게 서 있는데, 원래는 1군사령부 지나 장양리 입구에 세웠다가 옮긴 것이에요. 선생님이 글씨 쓰시면서 너무 고생하셔서 사례를 꼭 하고 싶었는데 못했어요. 그게 지금도 너무 죄송해요.”  
무위당 선생은 지역의 시민단체나 기관에서 글씨를 부탁할 때면 주저하지 않고 흔쾌히 써 주시곤 했다. 한동안 원주KBS방송국 로비에 걸려 있던 ‘세계로 미래로 하나로’라는 작품은 화선지 한 장에 글자 하나씩 쓰신 대작이다. 오랫동안 걸려 있다가 새로 부임한 관리자의 지시로 떼어졌는데 지금은 행방이 묘연하다. 김원화 이사는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내가 갖고 있는 선생님 작품 중에 내 이름을 써주신 게 딱 세 개있어요. 그 중에 ‘포신이정’은 선생님이 산과 물을 그리신 최초의 작품이에요. 그날은 “야. 앉아봐라”하시더니 다 그리시고는 “원화야, 이건 해고, 이건 산이고, 이건 물이다”라고 설명해주셨어요. ‘포신이정’은 정신을 간직하고 고요히 하라, 즉 진중하라는 뜻이잖아요. (장자(莊子)의 한 구절이다) 내가 천방지축이고 경망스러운 짓을 많이 하니까 마음을 다스리라고 포신이정을 써주신 것이에요. 이 작품은 내 이름이 들어가 있고, 산수의 풍경을 처음 그리신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제게 자상하게 설명해주신 것이기 때문에 내가 기증하지 않고 끝까지 갖고 있어야 해요. 선생님의 큰 사랑이 담겨있고, 이 놈을 사람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써주신 것이라 내가 소중하게 간직해야 해요.”
 
무위당 선생 작품 중에서 원주 제자들에게 주신 작품들이 유난히 가슴에 와 닿는다는 의견도 있다. 외지 손님들에게 선물한 작품은 주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진중하고 고민하고 무게감 있는 화제가 달린 작품이 많은데 비해 제자들에게 주신 작품 중에는 당신의 마음을 있는 그대로 써주신 작품들이 많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편안하고 감동적이란다. 특히 치악고미술동우회 회원들에게 써주신 작품들이 그렇고, 한문보다 한글로 써 주신 게 좋다고 황도근 교수는 말한다. 실제로 그 작품 중에 익살과 유머가 넘치는 작품이 많다. 
 
“‘몰라 몰라 정말 모른다니깐’, 이 작품에는 선생님의 해학이 담겨 있어요. ‘나는 미처 몰랐네’를 처음에 써 주시고 두 번째로 써 주신 것이 ‘몰라 몰라......’에요. 선생님이 약주 취하시면 “야 이놈아, 나도 구라쟁이야. 사람들이 나를 장구라라고 불러 이놈아. 너보다 내가 구라를 잘 쳐 이놈아.” 그러셨는데 ‘몰라 몰라......’ 이 작품을 보면 그 말씀이 생각나요. 선생님 말씀처럼 이파리들이 꼭 삐진 것처럼 파격적으로 그리셨어요. 위트가 넘치는 그 작품이 나는 너무 좋아요.”
 
김원화 이사의 이야기처럼 ‘나는 미처 몰랐네’와 ‘몰라 몰라 정말 모른다니깐’ 이 두 작품은 특히 회화성과 디자인 감각, 그리고 그 화제의 독특함이 두드러진다. 오랫동안 걸어 놓고 바라보아도 질리지 않을 작품이다. 김진성 작가가 서각으로 옮긴 작품들에도 그 매력들이 여전히 살아 있다.
 
“선생님이 호를 여러 개 쓰셨잖아요. ‘청강’부터 ‘무위당’, ‘일속자’까지...... 어떤 때는 ‘한도인’, ‘일초’ ‘일충’이라고도 쓰셨어요. ‘일충’이라고 호를 쓰신 작품을 내가 갖고 있어요. 나는 선생님 호의 변천사를 따라 작품을 진열하는 전시회를 열고 싶은 꿈도 있었어요. ‘한도인’의 ‘한’은 한가할 한 자를 쓰셨어요. ‘나는 백수다!’ 라는 의미라고 생각해요.”
무위당 선생의 호는 예전에 전시회 도록을 만들면서 한 번 정리한 적이 있다. 무위당기념관에는 그 호들을 사용하시면서 찍은 낙관 모음 자료도 전시되어 있다. 이야기 막바지에 상지대학교 총동문회 일을 보았던 김원화 이사가 상지대학교를 아끼고 염려했던 무위당 선생의 마음을 들려주었다.      
 
“선생님은 상지대학교를 무척 사랑하셨어요. 상지 교지 제호(題號) 써 주신 걸 내가 갖고 있어요. 내가 선생님께 써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상지대 동문회에 써주신 ‘대동상지’라는 글씨도 있는데, 동문회 사무실에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네요. 상지대 김문기 문제가 터졌을 때였어요. 지금은 없어진 투비서점 2층 로마다방에서 선생님이 갱지 3장에다가 해결 방법을 볼펜으로 깨알 같이 써주셨어요. 그것도 내가 갖고 있는데 이건 죽을 때까지 내가 공개 못해요. 잘 모르는 사람들이 선생님께서 김문기를 싸고돈다고 오해할 수 있기 때문이에요.”
 
무위당 선생은 상지대학교 문제를 지역사회 구성원들이 힘을 모아 지혜롭게 잘 해결하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이는 당시 모든 이들의 하나같은 마음이었겠지만 그 방법론의 차이 때문에 의견이 분분하거나 서로 간 오해와 갈등이 생기기도 했다. 선생께서 영면하신 뒤 1998년에 「장일순 유작전」이 상지대학교에서 열렸을 때도 정문 앞에서 학교에 들어오려는 김문기 측과 이를 막으려는 학교 측 사이에 실랑이가 벌어진 적도 있다. 이런 저런 그간의 정황들 때문에 맥락을 모른 채 비판이 나올까 염려하는 김원화 이사의 심정이 느껴졌다. 2001년 7주기에는 원주시립박물관에서 「무위당 그 삶과 미래」라는 이름으로 추모전이 열렸다. 박종수 관장님께서 기획하여 소박하고 정감 있는 전시회를 만들었다. 이후 크고 작은 추모전시회가 원주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열렸지만, 이 때가 가장 따뜻하고 정감 있는 전시회였던 걸로 나는 기억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번 전시회에 기대가 큽니다. 내가 돌아가신 아버님과 어머님을 마음에서 다 보내드렸는데 이번에는 선생님을 보내드리려고 해요. 선생님까지 보내드리고 나면 나는 홀가분하게 살다 가면 되요. 진정한 자유인이 되는 거죠. 솔직히 말해서 며칠 전까지도 기증하는 게 망설여졌어요. 갈등이 많이 되었지요! 내가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것은 공개적으로 마음을 굳히기 위해서입니다. 더 이상 미련을 갖지 말자고 결심하려고 나왔어요. 이경국 회장님과 김영주 선생님에게 작품을 기증하기로 했다고 결심을 말씀드리자 “너 참 큰 결정을 했다”하시면서 “정말 괜찮겠냐?”고 되물으셨어요. 선생님 돌아가시고 나서 선생님 박물관을 만들고 싶었던 게 꿈이었는데 내 능력으로는 안 되고, 원주발전연구소도 내 스스로가 못 만들고, 아, 이게 나 혼자해서는 안 되는 것이구나! 작품도 내가 혼자 갖고 있지 말고 선생님의 뜻을 널리 알리도록 내 놓자. 나도 이제 60이 훨씬 넘었는데 이젠 욕심 없이 살자. 이런 마음이에요! 오늘 이 모임이 나에게 족쇄를 채우는 자리에요. 하하하. 한 가지 더 바란다면 이번 기회에 원주발전연구소도 만들어졌으면 좋겠어요!”
 
김원화 이사는 이제 곧 기증할 작품들을 하나하나 보면서 목록을 짜는데 마음이 짠했다고 한다. 어찌 그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선생님과의 사연이 담긴 서화들, 선생님 돌아가신 뒤에도 선생님과 대화하는 매개가 되어 주었던 그것들, 애지중지하던 작품들을 기증하기로 결정하기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까, 그 감회가 한 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전해졌다. 사실 10년 전에 심상덕 무위당 기념관장은 김원화 이사에게 작품을 기증하여 공적 영역에서 함께 ‘나누자’고 제안했고, 이 제안에 대해 그는 “10년 동안 우리 집에 무슨 작품이 있는지 발설하지 않는다면 생각해 보겠다”고 답변했다고 한다. 그리고 10년이 흘렀다. 심상덕 관장은 10년 동안 입 꾹 다물고 약속을 지켰고 김원화 이사는 이제 그 10년의 기다림에 대해 화답을 보낸다.
 
“‘나는 한적한 들에 핀 꽃’, ‘포신이정’ 포함해서 딱 세 네 점만 빼고 다 내놓으려고 해요. ‘포신이정’은 선생님이 “이게 이거고 저거고”하시면서 설명해주신 거라 내가 꼭 갖고 있어야 해요. 나는 선생님 작품이기 때문에 표구도 두껍고 비싼 걸로 많이 했어요. 평생 내가 두고 봐야 할 작품이니까 되도록 좋은 걸로 표구를 했어요. 내 자식과도 같은 작품들을 시집보내는데 작품마다 이러이러한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잘 정리해줬으면 좋겠어요. 전시회 때에도 설명하는 글을 붙이고. 관람객들에게 작품에 이런 스토리가 있다는 것을 알렸으면 좋겠어요. ‘쉼터’도 선생님이 내게 주신 글인데 사연이 많은 글씨에요. 선생님이 누구에게 갖다 주라고 심부름을 시키셨는데 갖다 주기 전에 그 사람이 돌아가시는 바람에 내가 가지고 있게 된 거에요. 제주도에 노리매라는 카페 정원에 가면 걸려 있어요. 거기 사장님이 글씨를 보시고 너무 좋다고 해서 글자를 키워서 김진성 작가가 각을 해서 보낸 겁니다. 나는 원주 시장님에게 얘기해서 원주에 있는 공공 쉼터에 선생님 글씨로 현판을 달아달라고 제안하려고 해요. 작품이란 건 여러 사람이 보고 빛이 나야 돼. 심상덕 관장님이 집념을 갖고 노력하시니까 너무 고마워요. 그런 모습이 내 마음도 움직이게 했어요! 선생님께서는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하지 말라’고 했지만 우리들은 열심히 하고 있잖아요. 어차피 혼날 각오하고 하는 거잖아요. 이젠 홀가분하네요.”
 
전시회 개막 행사 때 김원화 이사의 사연들을 함께 듣는 시간을 마련하기로 했다. 작품에 얽힌 이야기들 하나하나가 무위당 선생의 인간적인 면모를 느끼게 해 준다. 무위당 선생을 추모하는 일은 당신의 뜻을 잘 받들고 이어가는 것이다. 머리로만이 아니라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발로 실천해 나가야 할 일이다. ‘생전에 그 많은 이들이 선생을 찾아왔던 이유가 무엇일까, 가신 뒤에도 이렇게 많은 이들이 선생을 그리워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미처 뵙지 못했던 이들까지 선생의 흔적을 쫓아 원주를 찾아오는 이유가 무엇일까’ 곰곰이 곱십으며 생각해 볼 일이다. 이제 우리는 무위당 선생 25주기를 맞아 그의 사상과 철학을 우리 현실과 삶 속에서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해 갈 것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런 때라서 이번에 열리는 김원화 이사 소장 작품 기증전은 더욱 의미 있는 전시회라고 생각한다. 마침 이번 제25주기에는 김원화 소장 작품 기증전 외에도 방재기 교수의 무위당 초상화 전시회 「무위당을 그리며 그리다」가 치악예술관에서 나란히 열리며, 차강 박기정 선생의 두 제자 화강 박영기 선생과 무위당 선생의 작품을 함께 전시하는 「스승과 두 제자전」이 원주역사박물관에서 같은 시기에 열릴 예정이어서 무위당 선생의 다양한 작품 세계를 살펴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날씨마저 분명 청명할 오월이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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