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67호] 생명의 글 '붓다의 깨달음송 -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등록자 교육담당 등록일자 2019.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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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의 글>
 
 
붓다의 깨달음송
 
-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
- 도법스님
 
 
지리산 실상사의 신도들과 지역공동체 식구들은 그동안 실상사와 인연이 있었던 분들과 도법스님을 모시고 2019년 1월 8일-16일 인도의 부처님 성지순례를 다녀왔습니다. 부처님의 4대 성지인 바라나시의 녹야원, 성도하신 붓다가야, 열반하신 쿠시나가르, 탄생지인 룸비니를 순례하고 마지막으로 인도 북부 쉬라바스티에 있는 기원정사에서 순례를 마감하는 법회가 있었습니다. 이 글은 그 자리에 참석한 황도근 회원이 도법스님의 말씀을 녹음하여 편집위원회에서 정리한 글입니다. 참고로 기원정사는 부처님의 교화 45년 동안 가장 많이 머무셨던 곳입니다.
 
 
 
 
 
 
 
오늘은 붓다께서 깨달은 날, 성도재일입니다. 지금 우리는 붓다의 나라 현장에 와서 성도재일 법회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재일을 맞이하여 붓다의 깨달음, 그 깨달음의 사유방식과 세상 방식의 차이를 한 가지 짚어보겠습니다.
 
영화를 보면 주연과 조연이 정해져 있죠. 불교에서는 주연과 조연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실상사에서 주연이 누구일까요? 주지스님이 주연이고 다른 사람은 종 같지요. 보통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불교적으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현실적으로는 세끼를 먹어야 하잖아요. 먹고 사는 입장에서 보면 공양간의 입석 할매가 주연이고, 주지스님을 비롯한 다른 사람들은 조연입니다. 도량을 청소할 때는 어떨까요? 마당도 쓸고 쓰레기도 주워내야 하지요. 이런 입장에서 보면 도량청소를 하는 분이 주연이고, 다른 모든 사람들이 조연입니다. 이렇듯 일반적인 사고방식에는 주연이 정해져 있고 조연도 정해져 있지만, 불교의 사고방식에서는 주연과 조연이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일에 따라 책임 맡은 사람이 주연이고, 나머지는 조연입니다. 이런 사고방식이 인간 모두가 다 붓다임을 잘 드러나게 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불교인에게 가장 관심사가 무엇이겠습니까. 붓다의 깨달음입니다. 붓다도 깨닫기 전에는 중생 싯다르타였습니다. 깨달은 이후에는 붓다 싯다르타입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된 거죠. 그렇기 때문에 깨달음에 대해 너도 나도 관심을 갖게 되는데, 그것을 보통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하고 설명하는 게 잘 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속을 버리고 인적이 끊긴 깊은 산속 선방에 들어가 장좌불와(長坐不臥)와 용맹정진을 하여 오매일여(寤寐一如)가 되고 돈오돈수(頓悟頓修)를 해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합니다. 세계의 모든 불교가 대체로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정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다른 길은 없을까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채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오늘은 제 입장에서 붓다의 깨달음이 대체 무엇인지, 깨닫고 난 다음의 살림살이는 무엇인지,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해 짧은 시간이지만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붓다의 깨달음을 공통적으로 ‘중도연기를 발견했다, 깨달았다’고 합니다. ‘중도의 실천으로 연기를 깨달았고, 연기를 깨달음으로써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졌다’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더 구체적이고 체계적으로는 12연기와 사성제를 얘기하는데 굉장히 복잡합니다. 양도 많습니다.
 
 
붓다의 탄생게는 깨달음송
 
그런데 붓다가 깨달은 내용을 압축적으로 표현한 것이 있습니다. 그 한 마디가 붓다의 탄생게(태어나자마자 바로 외쳤다고 하는 시)입니다. 한 손으로는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으로는 땅을 가리키면서 “천상천하 유아독존(天上天下 唯我獨尊), 하늘 위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존귀하다. 삼계개고 아당안지(三界皆苦 我當安之), 온 세상이 고통에 시달리고 있으니 마땅히 그 고통을 편하게 하리”입니다. 붓다가 무엇을 깨달았고, 어떤 살림을 살았는지, 어떤 살림을 살아서 평화롭고 자유로웠는지, 그 내용을 한 마디로 압축한 것이 바로 이 탄생게입니다.
 
경전에서 붓다가 태어나자마자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나와 있는데, 이 말이 이해가 되십니까? 태어나자마자 시를 읊었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세요? 만일 이게 진짜 사실이라고 한다면, 붓다는 우리하고는 전혀 다른 특별한 사람, 아니 어쩌면 사람이 아닌 신이라고 해야 맞겠죠. 경전의 이런 내용은 상징적, 또는 신화적 표현일 뿐 역사적 사실은 아닙니다. 경전 편찬자들이 ‘붓다의 위대한 삶을 한 마디로 압축해서 사람들에게 쉽게 전하려면 어떻게 표현하는 것이 좋을까’ 하는 문제의식으로 붓다의 일생을 한마디로 요약한 것이 붓다의 탄생게인 것입니다.
 
이 지점에서 붓다가 붓다인 이유, 깨달으신 분이라고 평가받는 이유가 무엇일까를 짚어봅시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이 말만 보면 붓다는 ‘나 혼자 잘났네. 나만 특별하고 대단하네.’라고 하는 것 같잖아요. 그런데 실제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붓다가 자신에 대해 깊이 사유하여 터득해보니 ‘나의 참모습이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더라. 내가 그러하듯이 여러분들도 그렇다’는 것입니다. 붓다가 깨달은 내용인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말을 연기적으로 설명을 해야 붓다의 뜻에 맞는 해석이 됩니다.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붓다가 깨달은 진리를 연기법이라고 표현합니다. 유아독존을 연기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연결될 수 있도록 설명되어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 참으로 고민스럽습니다. ‘어떻게 표현하고 설명하면 좋을까’ 하는 것이 늘 저에게는 화두처럼 되어 있었는데, 어느 날 무위당 선생의 전시회에서 눈이 번쩍 뜨였습니다. ‘아, 이것이다’하고요.
그 내용이 뭐냐면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입니다. 이 이야기는 돌아가신 무위당 선생이 그림을 그리고 그 그림에 쓴 한 구절입니다.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저는 이 구절을 보면서 아주 전율했습니다. 우리가 ‘연기법, 연기법’ 말을 하는데, 이 말이 너무 건조한 거예요. 연기법의 내용이 사람들의 가슴을 울리게 전달이 잘 안돼요. 그런데 연기법을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이라고 표현하는 순간, 어떻습니까. 확 와 닿지요?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나는 나대로 대단하고 너는 너대로 대단하다’라고만 생각했는데, 제대로 알고 보니, ‘너와 나는 한 몸 한 생명이다’라는 얘기인 거잖아요.
 
그런 얼마 후 서울에서 배려문화운동을 하는 분들과 대화하는 자리에서 지금과 같은 설명을 드렸습니다. 제 이야기를 들은 분들이 “그럼 우리는 ‘이제 알았네, 그대가 나임을’이라는 슬로건으로 배려문화운동을 하자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진화를 해가는데 사람들이 마음 나누는 이야기를 관찰해보니 대부분 미안한 마음, 고마운 마음들을 이야기하고 있더라고요. 그 마음은 참 좋은 마음이잖아요. 그래서 보고 들은 내용을 짜깁기해서 ‘붓다의 깨달음송’이라는 노래로 만들었습니다.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그대가 나임을, 그대가 나이었음을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이제 알았네, 그대가 나임을,
그대가 나임을, 그대가 나이었음을
고마워, 고마워, 고마워.
 
이 노래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제 흥껏 부르면 저절로 치유와 회복이 이루어집니다. 어떻습니까. 괜찮지요?
 
나 홀로는 절대로 유아독존이 안 됩니다. 유아독존이 되려면 너와 나, 인간과 자연, 온 우주의 유형무형의 모든 것들이 그물의 그물코처럼 함께 해야 된다는 것이죠. 그렇게 보면 우리 모두는 온통 한 몸, 한 마음, 한생명인 것입니다. 이런 내용을 화엄경에서는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이라는 사고방식으로 불교를 설명한 것이 반야심경입니다. 실상사 입구 천왕문 기둥의 주련에 보면 ‘가득함도 빛나고 비움도 빛나라’는 구절이 있는데, 바로 같은 뜻입니다.
 
붓다가 2,700여년 전 오늘 새벽에 도를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 내용을 사람들에게 정서적인 울림으로 잘 전달하는 최고의 표현이 제가 볼 때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이 아닌가 합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일 뿐이야’라고 알고 관계 맺고 살아갈 때하고, ‘내가 너고 너가 곧 나야’라고 알고 관계 맺고 살아갈 때하고 같겠습니까, 다르겠습니까? 하늘과 땅처럼 다릅니다.
 
‘너는 너고 나는 나야’라고 하면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자기 편의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이고 내 멋 대로면 어떻습니까. 삶이 제대로 살아지겠습니까. 당연히 안 되죠. 삶이 싸움판이 될 수밖에 없죠. 싸움판이 되는 사람을 뭐라고 합니까? 아수라장이라고 합니다. 그 싸움판에서 어떻게 인간다워지고 편안해지겠습니까.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런데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너와 나는 남남이 아니야. 너와 나는 한 몸 한생명이야.’ 그렇게 보면 어떻겠습니까? 자기중심적이고 내 멋 대로일 수가 있을까요? 그럴 수가 없죠. 만일 누군가가 굳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을 불교적으로는 연기법의 진리에 어긋난다고 합니다. 만약 연기법에 어긋나더라도 사는 것이 괜찮으면 그냥 살아도 되죠. 그런데 실제로는 서로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아수라장이 되는데 어떻게 도움이 되겠습니까.
 
그러니까 인간이 자유롭고 평화로워지려면 연기법에 어긋나는 자기중심적인, 이기적인, 내 멋 대로인 사고방식을 기꺼이 내버릴 수 있어야 합니다. 기꺼이 내버리고 삶을 다룰 수 있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저절로 자유로워지고 평화로워진다는 얘깁니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은 상황이기 때문에 일단 깨달음의 내용으로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이 부분을 분명하게 기억하고 살면 좋겠습니다. ‘아, 붓다께서 깨달은 내용이 이런 것이구나’하고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여 삶으로 소화시키면 삶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틀림없습니다.
 
 
자유와 평화로 가는 길, 팔정도
 
다음은 붓다께서 깨달음을 현실의 삶이 되도록 만드는 과정과 내용으로 제시한 것이 중도의 팔정도입니다. 지금 이 순간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중도의 팔정도인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념(正念), 정정진(正精進), 정정(正定)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팔정도를 경전의 순서와 관계없이 뜻으로 정리해보면 ① 정정진, 단단히 마음먹고 ② 정념, 정신 바짝 차리고 ③ 정정, 차분하고 침착하게 ④ 정견, 잘 관찰하고 ⑤ 정사유, 깊이 사유하여 내용을 도출하고 ⑥ 정어, 말로 해야 할 것은 말로 ⑦ 정업, 행으로 해야 할 것은 행으로 ⑧ 정명, 삶으로 살아야 할 것을 삶으로 사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단단히 마음먹고 정신 바짝 차려서 팔정도가 실제 삶이 되도록 끊임없이 학습하고 연마하고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알고 살아야 할 내용이 무엇이었죠?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입니다. 이 내용을 실제 삶으로 사람들에게 연결될 수 있도록 표현한 것이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이고, 이 내용을 내 사고가 되고, 언어가 되고, 삶이 되도록 하는 과정의 내용이 중도의 팔정도인 것입니다. 붓다의 깨달음인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를 실제 삶이 되도록 하는 팔정도를 학습하고 연마하는 순간이요 현장이 바로 지금 이 자리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어보고 싶은 것이었는데, 바로 정업입니다. 실제 내용을 한 번 봅시다.
 
아까 우리가 빙 둘러서서 서로를 바라보며 절했잖아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이제 알았네, 그대가 나임을’ 이라는 사고로 보니 ‘당신이 바로 나의 붓다이십니다. 참으로 반갑고 고맙습니다. 나의 붓다이신 당신이 늘 자유롭고 평화롭기를 바랍니다.’하는 마음으로 절을 했습니다. 이것이 무엇인가요. 바로 정업(바른 행위)에 속하는 겁니다.
 
그 다음 정명은 무엇인가요? 일반적으로 바른 직업이라고 표현하는데, 그러면 뜻이 너무 축소돼요. 삶 전체에 해당이 안 되지요. 이번에 순례하는 동안 우리 밥상을 보며 밥을 제대로 먹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고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단순화시켜보면 음식을 제대로 대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음식을 소중하게 여기고 제대로 대접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음식을 함부로 남기거나 버리면 될까요? 당연히 안 되죠. 어쨌든 누가 차려줘서 밥을 먹게 되었을 경우, 이 음식의 가치를 제대로 존중하면서 고마워하는 마음으로 맛있고 깔끔하게 잘 먹는 것, 이것이 정명이라고 봅니다. 단순히 먹고 사는 직업을 뜻하는 것이 아니고 삶 자체를 바르게 하는 것이 정명이라고 해석하고 설명해야 한다고 봅니다. 음식의 예를 든다면 최대한 남기지 않고 깔끔하게 잘 먹는 것이 최소한의 예의인 거죠. 경험적으로 볼 때 상에 차려진 음식 전부를 남기지 않고 비우는 것이 불가능한 경우가 많지요. 비록 그런 상황이더라도 국이 됐든 밥이 됐든 내 몫으로 내 그릇에 담은 음식은 남김없이 정성스럽게 잘 먹는 것을 정명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내용을 있는 그대로 확인해보면, 이 밥 한 그릇은 온 우주가 우리에게 올린 공양입니다. 그뿐 아니라 이 공양이 우리에게 오기까지는 누군가가 대단히 애써서 지극정성으로 우리에게 올린 것입니다. 그 공양을 우리가 어떻게 함부로 하겠습니까. 상식적으로도 안 맞고 예의상으로도 안 맞는 거죠. 더 양보해서 아무리 해도 다 먹을 수 없어서 남길 수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깔끔하게 정리정돈해서 남기는 것, ‘아, 이 사람들이 남기긴 했지만 허투루 남기지는 않았네. 품위 있게 남겼네’ 하는 마음이 들도록 하는 것, 이런 것을 저는 정명의 하나로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다음 정정진은 무엇일가요? 팔정도의 삶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적재적소에 맞게 노력하는 것, 이게 정정진이죠.
 
이제 붓다의 삶 전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서 이야기를 마치겠습니다. 붓다가 깨닫기 이전의 삶과 이후의 삶은 어떻게 다를까요? 요약하면 깨달음 이후의 삶은 중도의 팔정도 삶이고, 깨달음 이전의 삶은 양극단의 팔사도 삶(팔정도가 없는 삶)일 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한 제자가 붓다께 묻습니다. “세존이시여, 우리 동네에 무수한 성자들이 옵니다. 그런데 누가 진짜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대단해보이고, 또 어떤 사람은 형편없어 보입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붓다는 말합니다. “온갖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고, 대단한 명성과 세력을 갖고 있더라도 실제 그 삶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확인해보라. 그의 삶에 중도의 팔정도가 있는지 없는지. 만약 팔정도가 있으면 진짜이고, 참으로 거룩하고 고귀한 자이다. 반면 팔정도가 없으면 가짜이고 엉터리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알고 살아가는 것이 좋겠다.”라고.
 
중도의 팔정도를 실천하는 것이 붓다의 삶이듯이 우리도 그렇게 하면 되는 겁니다. 붓다가 실천한 팔정도하고 우리가 실천하는 팔정도는 똑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합니다. 같은 것은 지금까지 설명했기 때문에 다른 것만을 설명해보겠습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붓다는 붓다행으로 팔정도를 행하고 있고, 우리는 붓다되기 위해 팔정도를 행하고 있습니다. 같습니까, 다릅니까? 하나는 같고 하나는 다르죠. 우리는 미완성이기 때문에 완성되기 위해 행하고 있다면 붓다는 그런 마음 없이 완성된 붓다행으로 실천하고 있는 것입니다. ‘붓다로 살자 불교’는 사람이 본래붓다이므로 다시 붓다되기 위해서가 아니고 바른 붓다로 온전하게 사는 차원에서 중도의 팔정도행을 해야 정법 불교행을 한다고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입니다.
 
오늘은 붓다의 깨달음 이후의 살림살이 내용으로 봤을 때, 중도의 팔정도행으로 충만한 것이 붓다의 삶이었고 저절로 그 삶이 자유롭고 평화롭고 아름다웠다는 이야기입니다. 반면 똑같은 사람이지만 팔정도가 없는 싯다르타의 삶은 양극단의 팔사도의 삶은 늘 불안과 공포였고, 갈등과 혼란의 삶에 빠지게 했습니다. 또 과거에 사로잡히게 하고 미래에 사로잡히게 하여 현재의 삶을 정상적으로 온전하게 살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악순환의 삶이 되풀이되는 것이었습니다.
 
끝으로 당부합니다. 평소에 거듭 사유, 음미하십시오.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임을. 이제 알았네, 그대가 나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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