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68호] 한묵청연 '내안에 평화를(內有平和) -원주 민주화 운동의 주역 신현봉 신부'
등록자 교육담당 등록일자 2020.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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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안에 평화를(內有平和)
-원주 민주화 운동의 주역 신현봉 신부
 
글. 계간지편집위원회
 
 
 
 
내유평화(內有平和, 1988년 작품)
 
 
“여기가 맞나? 와 본지가 하도 오래돼서···.”
 
작년 5월 중순, 무위당 24주기 행사를 이틀 앞둔 화창한 오후였다. 팔순이 훨씬 넘어 보이는 백발의 할아버지가 무위당사무실에 들어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나는 신현봉이라고 하는데 여기 무위당기념관 맞지요? 시내 병원에 왔다가 장 선생 생각이 나서 들렸어요.”
‘신현봉’이라는 이름에 나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큰 소리로 물었다. “어르신이 신현봉 신부님이세요?” 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분이 70년대에 지학순 주교와 무위당 선생과 함께 민주화운동에 앞장섰고, 정의평화구현전국사제단의 산파 역할을 담당한 바로 그 신현봉 신부님이구나’하고 외쳤다.
 
몇 년 전에 봉산동성당에 갔다가 1970년대 초에 이 교회의 담임신부로 있었던 서른 중반의 신부님 사진을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사진 속의 젊은 신부가 손에 지팡이를 쥔 백발의 노인의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동안 윗세대 어르신들로부터 말로만 들었던 정의로운 신부님이 이렇게 연세가 드셨구나.’ 한세월 가득한 노(老) 신부의 얼굴 위로 봉산동성당에서 본 사진 속의 얼굴이 오버랩 되면서 가슴속에 애잔함이 밀려왔다.
 
 
 무위당기념관을 방문한 신현봉 신부(좌)와 1970년대 봉산동성당 주임신부 시절의 모습(우)
 
무위당 선생의 작품이 있는 전시실로 신부님을 안내했다. 전시실 입구에 걸려 있는 초상화 앞에서 신부님은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건강하셨으면 지금도 살아 계실 텐데···. 장 선생, 왜 그리 일찍 가셨소? 어디 계시오? 대답이 없구려···." 미소를 띠고 있는 선생의 초상화를 바라보는 신부님의 눈가에 이슬이 촉촉하게 맺혔다.
 
“장 선생님의 얘기를 듣고 나면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1970년대에 무위당은 신부님이 주임신부로 있었던 봉산동성당에 다니고 있었다. 신현봉 신부에게 무위당은 민주화운동의 동지이자 삶의 조언자이기도 했다. 무위당보다 한 살 아래인 신부님은 무위당을 깍듯이 형님으로 모시면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장 선생님과 나는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선생은 집안의 맏형같이 느껴졌어요. 선생님 댁이 성당에서 길 건너에 있으니까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쪼르르 달려가서 상의 드리고 그랬어요. 그때마다 장 선생님의 해답이 얼마나 명쾌한지 얘기를 듣고 나면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어요. 감옥에 있는 지학순 주교님 구명운동을 할 때는 거의 매일 장 선생님과 상의했어요. 댁에 가면 갱지에 대책을 적어주시면서 조언해주셨어요.”
 
신현봉 신부는 1974년 7월 지학순 주교가 박정희 정권에 의해 구속 수감되었을 때, 최기식 신부와 함께 전국의 성당을 돌며 정부의 폭압성을 알리고 지 주교의 석방을 위한 구명운동에 신부들이 동참해 줄 것을 호소했다. 당시 지학순 주교의 구속에 대한 반응은 가톨릭 사제의 성향에 따라 편차가 있었다. 보수적인 원로 사제들은 지 주교의 사회참여에 그다지 우호적이지 않았다. 신부들 중에는 정부의 왜곡된 발표를 그대로 믿고, 가톨릭 주교가 왜 정치에 참여해서 교회를 혼란케 하느냐며 비판한 사제들도 꽤있었다. 교회 안에서 조차 지학순 주교의 사회참여가 외면당하고 있을 때 신현봉 신부의 ‘지학순 주교 구명운동’에 용기를 주고 후원한 사람이 무위당이었다.
“원동성당에서 정의평화구현전국사제단 만들 때도 장 선생님 코치를 많이 받았어요. 장 선생이 조언하는 대로만 하면 해결이 될 것 같아서 말씀하시는 대로 했지요.”
 
정의평화구현전국사제단이 출범하기까지 신현봉 신부의 활동은 눈물겨웠다. 전국을 순회하며 기도회를 열었을 때 보수적인 교구장의 벽을 넘지 못할 때는 피눈물이 났다. 그렇지만 신학교 시절, 같은 반에서 공부했거나 선후배 관계로 아는 신부들이 동참해주면서 뜻을 같이 하는 신부들이 늘어났다. 로마에서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함세웅 신부를 비롯해, 그의 동기생들인 김택암, 양홍 신부, 그리고 연배인 김승훈 신부가 서울의 주축이 되었다. 정의구현사제단 탄생을 막후에서 도와준 이가 무위당이었다.
 
1974년 9월 23일, 원주에서 300여 명의 사제들이 모여 성직자 세미나를 열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결성하기로 결의했다. 원동성당에서 기도회를 마친 신부들은 ‘지학순 주교 석방’, ‘민주회복’ 등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시위를 전개했다. 당시 사제단은 두려움을 몰랐다.
 
‘지학순 주교 석방’을 외치며 가두시위에 나선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과 원주 시민들(1974년)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을 출범할 때 누가 대표를 맡아야 할지를 놓고 여러 얘기가 오갔다. 지학순 주교 구명운동을 계기로 출범한 것이니 원주교구의 신현봉 신부가 대표를 맡아야 한다는 의견이 많았다. 무위당은 신현봉 신부에게 “원주교구에서 대표를 맡으면 안된다. 이렇게 되면 전국으로의 확장성이 떨어질 수 있다면서 서울교구의 신부가 맡으면 좋겠다”는 조언을 했다. 결국 정의구현전국사제단 대표에는 서울교구의 김승훈 신부, 총무에는 함세웅 신부가 맡게 되었다.
 
그해 9월 26일, 사제단은 명동성당에서 ‘시국선언’을 발표하고, 60여 명의 신부와 2000여 명의 신자들은 ‘유신헌법 철폐하라’, ‘민주헌정 회복하라’는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명동파출소 앞까지 평화적인 시위를 벌였다. 이 과정에서 신현봉 신부가 연행되었다.
 
“미사를 끝내고 십자가를 앞세우고 명동거리로 나왔어요. 경찰은 우리가 밖으로 진출하리라는 예측을 못한 것 같았어요. 아무도 제지하지 않았으니까요. 쭉 걸어서 옛 국립극장 앞까지 가니까 경찰이 그제야 막기 시작하더라고요. 시민들이 어리둥절해 있다가 우리가 든 현수막을 보고 박수를 치는 거예요. 시민들의 박수소리를 들으니까 힘이 생기더라고요. 이게 민중의 소리이고 하나님이 돕고 계시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경찰과 대치하다가 내가 ”지학순 주교 석방하라!“고 외쳤는데 갑자기 덩치 큰 전경이 와서 내 목을 꽉 조이는 거예요. 그 순간 외국 기자들의 사진기 플래시가 막 터졌어요. 다음날 내 목이 꽉 졸린 그 사진이 외신에 다 나갔어요. 나중에 이게 보도사진상도 받았다고 해요.”
 
1976년 3월 10일 신현봉 신부는 명동성당에서 열린 3.1구국미사와 관련해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2심 법정 진술 때 “아이고, 아이고!”하면서 곡으로 시작했다. 재판장이 무슨 일이냐고 묻자 “민주주의와 인권이 죽었기 때문에 조의를 표하는 것”이라고 했다. 신현봉 신부는 항소심 최후진술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의 몸뚱이는 가둘 수 있어도 신앙과 양심은 결코 가둘 수 없다. 긴급조치로 묶인 많은 학생들을 석방하라. 나는 이들과 함께가 아니라면 감옥에서 나가기를 원하지 않는다.”
 
신현봉 신부는 대법원에서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형을 언도 받고 홍성교도소에서 생활하다가 1977년 7월 17일 제헌절을 맞아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출감 소식을 들은 지학순 주교는 교도소 정문 앞으로 마중을 나갔다. 그런데 저녁때가 되어도 나와야 될 신현봉 신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지학순 주교가 교도소장을 만나 “왜 신부를 내보내지 않냐?”고 항의했다.
 
교도소장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시국사범들은 다시는 시위를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내야지만 나갈 수 있는데, 신부님이 각서를 쓰느니 차라리 감옥에 있겠다고 해서 아직도 못 내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말해도 듣지 않으니 주교님이 설득시켜 주십시오”라고 부탁했다. 이 말에 지 주교는 기가 찼다.
 
자신의 신념을 절대로 굽히지 않는 신현봉 신부의 성격을 잘 알고 있는 지학순 주교는 면회실에서 신부를 만났다. “이봐. 나라면 그까짓 각서 100장이라도 써주겠다. 각서 쓰고 나와서 다시 데모 하면 되는 것 아니냐? 후일을 도모하려면 우선 감옥에서 나가는 게 중요하니 빨리 써주고 나오라”고 명령조로 말했다. 주교의 말에 신현봉 신부는 마지못해 각서를 쓰고 나왔다. 지 주교는 출감할 때 입으라고 새 옷을 사서 갖고 갔는데 신현봉 신부는 한사코 감옥에 들어올 때 입었던 한복을 입겠다고 고집했다.
 
일행은 그날 밤 늦게 원주에 도착했다. 원동성당에서는 100명이 넘는 교우들이 환영행사를 준비해놓고 이제나저제나 도착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신현봉 신부가 성당 안에 들어섰을 때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다. 대부분 ‘성당에 웬 스님이?’하고 어리둥절해했다. 그도 그럴 것이 빡빡 깎은 머리에 수형생활로 몰라볼 만큼 홀쭉해진 얼굴, 흰 무명 저고리를 입은 신부님을 스님으로 착각할 만도 했다. 사회를 보던 신부가 “신현봉 신부님이 드디어 오셨군요”라고 말하자 그제야 신부를 알아본 교우들은 웃음과 환호, 박수로 환영했다.
 
 
감옥에서 석방된 직후의 신현봉 신부님(1977년)
 
회갑기념 선물로 받은 ‘내유평화(內有平和)’
 
기념관 전시실의 작품을 찬찬히 둘러보던 신부님이 ‘세상의 무거운 멍에를 멘 자여 내게로 오라, 나에게서 위안을 받을 것이다’라고 쓴 작품 앞에서 멈췄다.
 
“장 선생은 이 성경 구절처럼 살다 가신 분입니다. 내가 회갑을 맞은 1988년에 ‘내유평화(內有平和)’라고 쓴 서화를 선물로 받았어요. 내 안에 평화, 얼마나 거룩한 말입니까. 지학순 주교님과 무위당 선생이 민주화운동에 헌신한 것도 어찌 보면 우리 모두의 평화를 위해서였다고 생각해요.”
 
올해 92세인 신현봉 신부님은 1999년에 사제에서 은퇴한 뒤 지학순 주교님이 머물던 원주 신림 용소막성당 뒤편에 있는 사제관에서 생활하고 있다.
 
신부님이 무위당기념관을 방문하고 몇 달 지난 작년 가을에 김영주 고문님과 박설희 사무국장과 함께 사제관을 방문했다. 신부님을 모시고 있는 식복사가 “최근 며칠 동안 신부님의 건강이 좋지 않았는데 오늘 손님들이 오신다는 말씀을 듣고 아침부터 기분이 매우 좋으시다”고 말했다.
 
우리는 사제관 거실에 둘러앉아 동창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가을 햇살을 받으며 신부님과 정담을 나누었다. 신부님은 젊었을 때부터 음식 만드는 데 일가견이 있다고 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찾아오는 손님들에게 손수 개발한 음식을 만들어 대접하는 것을 즐겨했다고 한다. “내가 식생활에 일가견이 있는데 이젠 기운이 없어서 손님들에게 내가 개발한 음식을 대접할 수가 없네요”라며 아쉬워했다. 문득 신부님의 민주화운동 동지인 김정남 선생님이 펴낸 <이 사람을 보라>에서 읽은 글이 떠올랐다.
 
‘신현봉 신부는 인간적인 신부다. 촌사람인 그에게서는 촌티가 나고 사람 냄새가 난다. 시골 성당에서 사목하다 보면 매년 김치를 많이 담게 된다. 봄이 되면 김장독에서 군내가 나기 시작하고 남은 김장을 처리하는 문제가 생기게 마련이다.
 
신현봉 신부는 남은 김치를 꺼내서 배추째 물에 행군 뒤 그것을 한 장 한 장 뜯어 조선기와 위에 말렸다. 김치가 꼬들꼬들 마르면 그것을 쌈으로 싸 먹으면 그만이라고 했다. 그가 가르쳐준 대로 김치쌈을 만들어 먹기를 여러 번 했다. 과연 별미요, 또한 묵은 김치를 버리지 않고 재활용할 수 있는 참 좋은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김정남 著 <이 사람을 보라> 2권)
 
이날 우리는 신부님을 모시고 나와 동네 식당에서 점심을 함께 하고 사제관 마당에서 사진을 찍은 뒤 작별인사를 나누었다. 가을볕이 가득한 마당에서 잘 가라며 손을 흔드는 신부님의 모습이 차창에서 점점 멀어져갔다.
 
‘원주 민주화운동의 산 역사이신 신부님이시여, 강녕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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